◀ 사장못은 마치 원형경기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정교하게 축조돼 있다.<조성익 기자>


◈사장못·새못(애월읍 납읍리)

 봄기운이 뚜렷해지면서 얼마전만 해도 삽날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던 흙에서는 여린 새싹들이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봄은 다시 돌아오고 흙은 꿈틀댄다.흙은 모든 생명을 깨워 새 삶을 시작할 것을 재촉한다.

 애월읍 납읍리에 있는 사장못과 웃못 주변에도 봄기운이 넉넉하다.갈수록 푸르름을 더해가는 나무들과 개나리·벚꽃·유채꽃·목련…,봄을 대표하는 꽃들의 잔치.호젓한 듯 내리쬐는 봄 햇살도 맑은 빛을 더해준다.

 사장못은 납읍리의 대표적인 인공못으로서 크기가 380평가량 되며 웃못보다 먼저 축조됐다.

 공사는 1917년 시작됐다.당시 마을주민이 300여호·1500여명으로 불어 식수원이 부족하게 되자 풍수지리에 능한 한수태(韓水泰·전남 진도출신)의 조언에 따라 납읍리 1796번지 지경에서 못을 팠다.

 곡괭이·삽질에서부터 돌덩이를 등짐을 져 나르기까지 모든 것을 인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당시 주민들의 고단한 삶도 함께 침잠해 들어갔다.

 이 못을 사장못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곳에서 100m가량 떨어진 곳에 사궁병법(射弓兵法)을 연마하던 활터(射場)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2m가량 파 내려가자 암반층이 나와 작업은 중단됐다.지하수가 펑펑 솟아오를 것을 기대했던 주민들은 실망이 컸다.일제 강점기인 탓에 화약 폭파마저 여의치 않아 봉천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물이 귀해 식수감독을 두고 가족수에 따라 물을 배급하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궁여지책으로 물을 가둬두기 위해 주변 둑을 높이 5∼6m의 3단계의 돌담으로 축조했다.마치 그 모습이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인 콜롯세움을 연상케 할 정도로 정교하다.

 향사(鄕史)에 따르면 “당시 마을총회에서 집집마다 가로·세로의 크기가 한자(一尺)가량 되는 돌을 4개씩 의무적으로 내도록 했고 장마철에도 둑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3중벽을 쌓은 것”이라고 적혀 있다.

 사장못 공사는 1940년 봄에야 비로소 마무리된다.당시 소와 말을 동원해 물이 빠지지 않도록 밑바닥을 견고하게 다져 놓기까지 20여년동안 공사가 이뤄진 셈이다.

 제주환경운동연합 조사결과 주변에는 역귀(마디풀)과의 마디풀·수영(괴싱아)·소리쟁이·역귀·개역귀,붕어마름,노박덩굴,아욱,하늘타리,달맞이꽃,송악,아욱메꽃,말즘,네가래등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가운데 가래과의 말즘은 중부 이남의 연못이나 흐르는 물속에 나는 수중식물로 길이는 70cm정도이며 녹갈색을 띤다.잎은 물에 잠기며 가장자리에 주름과 잔톱니가 있는 게 특징이다.

 납읍새마을금고 뒤편에 자리잡은 새못은 3개의 못으로 구성돼 있다.대개 큰못 또는 웃못이라고도 한다.웃못 아래쪽에 있는 알못은 지난 96년 매립돼 다가구주택(15가구)이 자리잡고 있다.학생수가 모자라 폐교 위기를 맞은 납읍교를 살리기 위해 학생 유치 차원에서 다가구 주택을 조성한 것이다.

 새못이 지금의 틀을 갖춘 것은 1937년께로 거슬어 올라간다.당시 재일본청년회에서 보내온 성금의 일부를 활용해 우마급수장·남녀목욕통·식수천의 형태를 갖췄다.

 이곳 역시 당시 6개 자연마을이 윤번제로 돌아가며 못을 정비했다.이가운데 우마급수장으로 활용되는 못은 지난 93년 군도확장과 함께 300평가량 잘려 나갔다고 한다.

 납읍리는 최근 이곳을 자연학습장으로 조성했다.못 입구에 들어섰던 25평 크기의 창고를 허물고 소공원을 조성하는 한편 못 주변을 돌아가며 300여그루의 동백과 철쭉나무를 식재했다.옛날 버드나무가 들어섰던 자리에는 남국의 정취를 담으려는 듯 종려나무가 심어졌다.

 그러나 연못 보전계획은 자칫 또다른 파괴를 부를수 있다.일례로 못 바닥의 퇴적물을 걷어내는 것은 곧 동식물의 서식처를 파괴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목적은 보전인데 결과는 파괴가 되지 않도록 기초조사가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좌승훈·좌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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