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을 기록유산으로2 <5> 조선왕실의 보물 '어보와 어책'

태조옥책

지난해 10월 조선왕실의 보물인 '어보와 어책'이 세계인의 기록으로 각인됐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확정된 것이다.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인의 기록으로 남은 '어보와 어책' 사례를 통해 영원한 기록으로 남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는 제주4.3의 방향을 찾는다.

△어보와 어책이란

조선시대 국왕이 공식문서에 날인하는 행정 실무용인 국새와 달리 어보는 전례를 치를 당시의 명칭만을 새겨 왕실 의례용 인장으로 사용했다.

어책은 어보에 새긴 명칭의 사연과 의미 등을 보다 상세하게 문장으로 정리해서 만든 책이다.
어보의 크기는 가로와 세로의 규격이 동일하며 재료는 금이나 은, 옥 등을 썼다. 손잡이와 보수 등 장식물이 달렸다. 어책은 재료로 금, 은, 옥, 대나무, 비단 등을 사용했다.

이러한 책보를 제작해 봉안하는 과정은 의궤(儀軌)로 발간해 남김으로써 그 신성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한편 후대 이와 같은 사례에는 매뉴얼로 참고가 되도록 했다.

조선왕조시기를 포함해 이후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570여년이라는 장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책보를 제작해 봉헌한 사례는 우리나라가 '유일무이'하다.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한 옥인.

△기록유산으로서 가치

조선시대 국왕의 자리를 이을 아들이나 손자 등은 국본으로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왕세자나 왕세손에 책봉되는 전례를 거쳐야 했다.

어보와 어책은 1차적으로 이와 같은 봉작 전례의 예물로 제작했다. 여기에는 통치자로서 알아야할 덕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구가 들어있다.

왕세자나 왕세손에 책봉되면 그 징표로 국왕에게 옥인, 죽책, 교명을 받음으로써 왕권의 계승자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이들이 성혼한 경우에는 이들의 빈(嬪)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 왕세자나 왕세손이 국왕에 즉위하면 즉위식에서 왕비도 금보, 옥책, 교명을 받았다.

왕과 왕비가 죽은 뒤에는 묘호와 시호가 정해지면 시보와 시책을 받았다. 왕과 왕비가 일생에 걸쳐 받은 책보는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됐다. 살아서는 왕조의 영속성을 상징하고 죽어서도 죽은 자의 권위를 보장하는 신물이었다.

왕조의 영원한 지속성을 상징하는 어보와 그것을 주석한 어책은 현재의 왕에게는 정통성을, 사후에는 권위를 보장하는 신성성을 부여함으로서 성물(聖物)로 숭배됐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책보는 왕실의 정치적 안정성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지금까지 추진 과정

국립고궁박물관은 소장품 중 가장 세계적이고 전 인류가 공통으로 길이 보존해야 할 대상을 검토해 '어보와 어책'을 기록유산으로 등재키로 결정한 이후 2015년 7~8월 진행된 2016년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대상 기록물 공모 에 응모한다. 이어 같은 해 10월 전문가 사전 검토회의와 11월 세계기록유산 한국위원회 등을 통해 2017년 등재 신청대상 후보에 추천된다.

하지만 2017년 4월 진행된 등재심사소위 중간평가에서 '조선왕조실록'에 통합 등재 평가를 받는다. 국립고궁박물관은 해당 부분의 보충자료를 다음 달인 5월에 제출한다.

이에 지난해 8월 국제자문위원회 최종심사에서 등재 권고 결정을 받은데 이어 같은 해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회의 제13차 회의에서 등재 권고 판정을 받았다. 이후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이를 추인하면서 등재가 최종 확정된다.

△ 기록유산 등재 의미

어보와 어책의 기록유산 등재 의미 또한 상당하다.

우리나라는 종묘(세계문화유산)와 종묘제례(무형유산) 등 종묘를 위주로 한 세계유산들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어보와 어책이 기록유산으로 등재 되면서 종묘 신실에 봉안돼 있던 것이 세계기록으로 또 인정받게 돼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유산의 '만루 홈런'을 달성한다.

세계기록유산의 대부분은 종이에 기록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어보와 어책은 옥, 금동, 대나무, 비단 등 다양한 매체에 다양한 기록돼 있어 독창성을 갖는다.

고종의 '황제어새'

△ 제주4.3에 남긴 메시지

조선왕조 어보와 어책 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는 '지정신청서 작성'이었다. 세계기록유산 심사는 현지에 대한 실사가 없고 신청서 내용만을 검토해 결정하기 때문이다.

또 문화유산을 전문적으로 전공한 사람들이 아닌 도서관장 등 단순히 기록물을 관리하는 사람이 다수인 유네스코 심사위원들을 만족시켜야 했다.

이와 함께 동양문화보다는 서양문화에 익숙한 심사위원들을 고려해 유교나 성리학 등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가급적 사용을 자제했다.

이런 준비 과정은 제주4.3에도 메시지를 던져준다.

아직 제주4.3 기록물은 걸음마 수준이다. 최근 행정과 민간에서 기록유산 등재 추진 의사를 밝혔지만 정확한 등재 대상이나 계획, 방법, 추진 주체 등은 물론 신청서를 작성하고 검토 보완할 인적 물적 구성이 거의 없다.

금기의 역사로 숨죽여 지내야 했던 제주4.3이 어느덧 70년을 맞았다. 제주4.3의 아픔을 완전히 해결하고 화해와 상생의 4.3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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