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일 시인·예비군지휘관

 세계는 지금 독일 월드컵 공놀이에 들썩들썩 하고 있다. 새벽에 눈뜨고 TV를 켜면 축구이야기부터 시작되고 잠자리에 들때까지 하루를 지배한다.

서쪽 끝에 있는 독일 월드컵경기 모습을 안방에서 볼 수 있고 걸으면서도 휴대폰으로 볼 수 있다니 전파의 문명과 문화에 인간은 거의 포로가 돼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구 인구의 10억이 축구 문화에 젖어 있다니 축구는 구기 종목 운동에 한하여 대단한 위력을 갖고 있다.

축구역사는 B.C 3세기경 로마나 이집트의 벽화에 발로 공을 차는 그림이 있다 한다. 중국에도 주나라 때 공을 차는 경기가 있었다 하고,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부터 축구와 비슷한 경기가 있었다 한다.

문헌을 통한 시초는 1042년 덴마크인이 영국을 점령했다가 철수한 뒤 그들의 두개골을 발굴, 분풀이했다고 한다.

현대 축구는 1863년 탄생, 1904년 5월 FIFA축구 모국인 영국에서 시발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우리나라에 현대축구가 들어온 것은 1882년 고종원년 6월 인천에서 영국 군함 풀 라잉 호스호가 입항해 축구를 하다가 공을 어린이들에게 주고 간 때부터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7번째로 일본과 함께 월드컵을 치렀고, 세계4강에 안착, 세계에 국가위상을 높여 코리아를 모르던 나라들이 작은 공 하나로 알게 됐다.

필자의 유년기인 1960년대는 국가경제가 어려워 축구공을 만져 볼 수 없었다.

그 시대에는 짚으로 엮은 새끼줄을 둘둘 말아 둥글게 만들어 축구를 했으며, 소나 돼지의 오줌통에 바람을 넣어 축구를 했고, 그도 저도 안되면 미군이 먹다버린 씨레션 깡통을 주어다가 속에 작은 돌을 넣어 앞부분을 망치로 찌그려 막은 다음 축구 놀이를 했었다.

 그리고 그 시대에 국가급 큰 경기 모습은 접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 때에는 주로 라디오를 통해 중계하는 모습을 간혹 듣기는 했으나 라디오 역시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고, 먹고 살기도 힘든 때라 운동에 별반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요즘들어 웰빙 문화에 젖은 젊은이들이 조기축구 동우회, 직장축구 동우회 등을 통해 육체적겵ㅍ탔?건강과 유대를 다지며, 즐겁게 인생을 꾸며가는 삶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필자의 유년기에는 서부지역 축구대회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의 잔칫날이나 다름 없었다. 지금도 매년 8월15일 해방 기념을 맞아 열리고 있다. 그 역사와 전통이 대단해 외도, 도평, 이호, 도두, 하귀1,2리, 광령, 해안, 장전, 노형 등 마을이 참가했었는데, 지금은 시내 중심동에서도 참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말로 그 때는 대단했다. 마을의 자존심을 걸고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도 선수거니와 운동장을 꽉 메운 관중들의 응원 모습은 지금의 ‘오∼필승,  오∼대한민국’붉은악마의 응원이 저리 가라였다.

지금 독일 월드컵 소식에는 인간의 마음을 앗아가는 매혹은 없는 것 같다.

필자의 생각에는 현대 축구는 이기는 데만 치충하다보니  한 골을 넣으면 방어 위주로 경기가 늘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또 상업성이 너무 배어 있어 선수가 입는 옷에서부터 신고 있는 신발까지 상품이 돼 버리고 선수 몸값이 천정부지라 어느 한편으로는 나의 쥐꼬리만한 박봉이 처량해 소외감으로 이어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소질을 개발해 명예와 돈을 얻고자 함은 인간의 자명한 이치다.

우리는 젊은 세대와 아름다운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시대를 이겨내는 업을 생으로 받아들여 젊은이들이 밝은 미래를 그려보며 세계를 향한 축구 경기처럼 푸른 잔디 운동장에서 지칠 줄 모르는 붉은악마처럼 뛰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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