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기지가 위미2리(구체적으로 위미항 동쪽 방파제에서 세천포구앞:상코지)에 유치되는 것을 반대한다. 지금의 심정은 ‘독한놈 옆에 있다가 벼락맞는다’는 속담과 똑같다. 해당지역에 거주하는 주민, 지주, 어부, 해녀 등 이해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해군기지를 유치하겠다는 발상은 비극의 싹을 키우는 것이다.

화순지역에서는 엄청난 반대로 사업추진이 불가능할 정도인데 위미지역은 유치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적극 유치하겠다니 착각하는 것 같다.

옛날에는 위미리를 ‘갈주럭 뙤미’라고 불렀다. 잦은 태풍과 가뭄으로 밤낮 갈정뱅이 갈적삼을 입고 일하지 않으면 자식들 먹여 살리기가 어려웠다. 물도 귀하고 시간도 없어 빨래도 못하고 땀내나는 갈옷을 입고 살았으니 ‘갈주럭 뙤미’가 기막힌 삶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에 비하면 요즘 삶은 대통령 부럽지 않은 삶이다.

위미2리는 해안경치가 아름답고 기후도 따뜻해 감귤소득도 높아 몇 년전만 해도 타지역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곳이다. 감귤산업이 어려워졌다고 군사시설을 끌어들여 잘 살아 보겠다는 생각이 착각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역의 발전, 후손의 번영’은 각자의 꿈을 차근차근 실현해 행복한 생활을 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한번 군사기지로 결정되면 자손 대대로 행동과 재산권 행사, 지역개발에 제한을 받게 된다. 대정지역 알뜨르 비행장, 모슬포 훈련소, 모슬봉 레이더기지 주변을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더욱이 해군기지라면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평화속에 행복을 찾는 것이다. 4·3때 평화의 소중함을 체험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집은 불타고, 밤에는 성안에 들어와 함바집에서 자고 낮에는 성 밖 밭에 나가 고된일을 하며 가난을 극복해 왔다. 그리하여 ‘살암시민 살아진다’는 철학을 우리 스스로 터득하게 됐다.

인류 최초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에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 투항됐다. 원폭이 앗아간 생명은 그 자리에서 재로 변해버린 7만명, 방사능에 노출돼 훗날 사망한 20만명을 합쳐 27만명. 당시 히로시마 인구의 3분의2가 원폭으로 희생된 것이다. 한국인 피해자는 그 10%인 2만7000명이었다.

원래 히로시마는 오오다강 하구에 위치한 경치좋은 해안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부터 400년전 전국시대의 무장 모리 데루모토가 히로시마성을 세우면서 비극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일본의 모든 도시가 그러하듯 성을 세웠다는 것은 새로운 중심도시가 생기고 상권이 생기는 것과 직결된다. 마침내 히로시마는 군항 우지나(지금의 히로시마항)를 거느린 군사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됐다. 이같은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말 히로시마를 원폭투하의 희생도시로 만든 주요요인이 됐다.

한번 해군기지로 개발되면 한미 방위조약에 의거, 미국의 핵 잠수함, 기타 핵무기를 적재한 군함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한반도는 강대국이 충돌하는 지역이다. 강대국 충돌시 핵공격이 없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후손들의 생존에 위험(핵)을 느끼고 재산권 행사(강제수용)와 지역산업 발전(자연파괴)에 지장을 초래해 소중한 꿈(자기계획)이 망가져 삶의 의욕마저 상실케하는 해군기지 위미2리 유치를 결사반대한다. <오덕환 / 위미2리 주민>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