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무형문화재 신석봉씨가 집전한 진혼굿에서 유족들이 절을 하고 있다.


 4·3 때 대전형무소로 보내졌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군에 의해 집단학살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제사가 8일 오전 11시 유족들의 오열 속에서 치러졌다. 유족들은 이날 총살 현장인 대전시 동구 낭월동 속칭 ‘골령골’을 찾아 희생 50년만에 처음으로 제삿날에 즈음해 제사를 지냈다.

 비록 이승과 저승으로 갈렸지만 희생된 남편 혹은 아버지와 50년만에 첫 만남을 가진 유족들은 불볕 더위로 땀과 눈물이 뒤범벅된 채 주변에 흩어져 있는 유골들을 단지 안에 담아 모셔 놓고 ‘눈물의 제사’를 지냈다.

 ○…언제 어디서 희생된지 몰라 그동안 생일에 맞춰 제사를 지내 온 유족들이 이날 제사를 지내게 된 까닭은 최근 잇따라 발굴된 정부와 미국의 비밀문서 때문이다.즉 지난 해 9월 민주당 추미애 의원이 공개한 ‘제주4·3수형인명부’를 통해 대전형무소 수감인 300명의 명단이 확인됐고,이어 제주출신 이도영 박사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비밀문서를 통해 대략 희생날짜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날 제사를 모신 유족들은 주로 당시 20∼30대 부녀자와 10대 소년들이다.이제 70∼80대 할머니와 50대 장년층이 되어 현장을 찾은 유족들은 ‘집안의 기둥’인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후 겪었던 지독한 가난과 고생을 상기하며 북받치는 설움을 감추지 못했다.시집이 제주시 연동인 강춘자 할머니(80·제주시 노형동)는 “남편은 군인들이 연동마을을 불지른 직후 산으로 피했다는 이유로 끌려가게 됐는데 4대 독자인 남편은 하나 뿐인 딸을 잘 키워 달라며 대전형무소에서 엽서를 보내기도 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마을에서 평범하게 집단학살된 경우와 달리,육지형무소 희생자 유족들은 4·3 유족들 중에서도 가장 피해의식에 시달려 온 사람들이다.따라서 이번에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4·3특별법 제정 이후 변화된 분위기를 실감케 했다.양남호씨(58·제주시 오라동)는 “군인들이 48년 가을에 오라리에 불을 지르자 온 가족이 한라산 정상 아래까지 피했다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먼저 내려오시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나는 이듬해 3월에 내려와 주정공장에 갇혔는데 아버지는 끝내 풀려나지 못한 채 49년 음력 6월 20일에 제주를 떠나셨다”면서 무명바지 하나로 겨울을 넘겼던 7살 때의 기억과 잿더미로 변한 마을을 다시 일으켜 세우던 고생담을 말했다.양씨는 또 “28세때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는 아들 하나만을 키워 오셨는데 50년이 넘는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쓰시던 놋쇠숟가락만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한편 유족들은 유골 보존문제와 함께 정확한 제삿날에 큰 관심을 보였다.이와 관련 당시 대전형무소 경비대원 등 현지 증언자들의 총살날짜에 대한 증언은 7월 3일부터 10일까지로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미국비밀문서는 ‘1950년 7월 첫째주 3일동안 1800명이 총살됐다’고 기록하고 있다(제민일보 1999년 12월 24일자 1·3면 참조).그런데 50년 7월 1일이 토요일이므로 ‘7월 첫째주’는 그 다음 토요일까지로 여겨진다.따라서 총살집행은 7월 2일(음력 5월 17일)부터 늦어도 7월 8일(음력 5월 23일) 사이에 3일간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이와 관련 한국현대사 연구가인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당시 기록을 인용해 대전형무소 수감자 총살이 7월 2일부터 6일 사이에 벌어졌다고 쓰고 있다.

 ○…한편 이날 학살현장 표지석 제막식도 열렸는데,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제단 설치와 유족들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는 등 행사 전반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진혼제 때는 조광자 민속무용단의 바라춤, 대전무형문화재 제2호 신석봉씨의 진혼굿, 민족예술단 우금치의 살풀이춤과 상여소리 등 대전지역 문화단체들이 나서서 원혼들을 위령하는 행사를 벌였다.<대전=김종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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