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은 신혼시절 작품일 수도 있어 문제는 불투명한 작품정보

   
 
  ▲ 「사슴」  
 

지난 6회에서 '사슴'의 제작년도를 '1950년대'라고 가정했을 경우, 이 작품에서 이중섭의 1953년도 상황에 부합되는 주제를 읽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주제는 이중섭 특유의 표현방법인 '상징'과 '왜곡'과 '변형'으로 표현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되는 점도 있다. 내가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에 느꼈던 것인데, 세심한 데에까지 주의를 기울이는 일본화풍의 그림이라는 점이다. 어째서 이중섭이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1953년 당시의 이중섭 그림들과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데에 의심이 간다.

사실 말이지, 한 작가가 평소와는 달리 이렇게 갑자기 다른 분위기의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일생을 통해서 흔치 않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고 갑자기 인생의 환희를 느끼는 신혼 때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중섭이 1945년 4월 원산에서 마사코와 결혼하고 신혼생활을 할 때 그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겠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중섭이 북한 원산에서 그린 그림이 어떻게 소실되지 않고 지금 이렇게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사실 말이지, 한 작가가 평소와는 달리 이렇게 갑자기 다른 분위기의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일생을 통해서 흔치 않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고 갑자기 인생의 환희를 느끼는 신혼 때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중섭이 1945년 4월 원산에서 마사코와 결혼하고 신혼생활을 할 때 그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겠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중섭이 북한 원산에서 그린 그림이 어떻게 소실되지 않고 지금 이렇게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느냐고 말이다.

   
 
  ▲ 1945년 5월 원산에서 이중섭과 마사코의 결혼식 사진.  
 

   
 
  ▲ 1945년 5월 당시 조선남자가 일본여자에게 조선의 전통 혼례복을 입혀 결혼식을 한다는 것은 요즘으로 말할 것 같으면 행위예술을 하는 것보다 더한 일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금까지 공개된 이중섭의 엽서그림들(1940~1943년 작)도 마사코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올 때(1945년 4월) 가지고 왔던 그림들이다. 만일 그녀가 이 엽서그림들을 조선으로 가져오지 않았더라면 마사코의 친정이 미군기의 폭격을 맞았을 때 이미 재로 변했을 것이다. 또 마사코는 이 엽서그림들을 원산에서 남한으로 피난 올 때(1950년 12월)에도 가지고 왔고,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갈 때(1952년 7월)에도 가지고 갔다가 이중섭 사후에 공개함으로써 지금과 같이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슴'도 마찬가지이다. 북한 원산에서 그린 것이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중섭은 1945년에도 일본 관제우편엽서에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조사된다. 고은 저 「이중섭, 그 예술과 생애」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이미 일본은 확실한 패색이 보였다. 여름의 칸나꽃이 핏빛으로 피어있는 하얀 불볕 아래서 아내는 일본이 아주 잿더미로 되고 그의 부모들은 죽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중섭에게는 스케치북도 동이 났다. 형의 백화점에도 그런 것은 진열되지 않았고 문을 닫은 뒤 남아있지도 않았다. 그는 우편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것이 잡물(雜物)로 쏟아져 나온 것을 입수했다. 그는 그 엽서 하나하나에 그림을 그렸다. 그림으로 일기를 쓰고 호흡을 하는 듯이 엽서화는 쌓이기 시작했다."

 '사슴'이 1945년 이때에 그려진 것이라면, 앞에서 말한 일본화풍에 대한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엽서에 그려진 사슴을 보자. 그냥 사슴이 아니라 왜곡된 사슴이다. 산양의 뿔과 염소의 수염과 낙타의 목을 가진 사슴이다. 왜 이렇게 그렸는지를 알면 그것이 일본화풍처럼 보이는 이유도 알게 될 것이다.

"마사코는 원산의 중섭에게 오자 프랑스행의 꿈을 가진 화가 지망이나 일본 상류 사회의 긍지 따위를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리고 오직 이씨 일가의 분위기에 완전히 종속되어 매운 반찬 짠 반찬도 마구 먹고 꽁보리밥도 척척 먹어치웠다. 앞치마를 두르고 몸빼를 입고 우물가에서 한국부녀자의 방식대로 빨래를 하고 집안일을 거들었다. 이미 동경의 중섭에 의해서 단련되었기 때문이다."

고은의 책에 적혀있는 이 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슴'은 당시 아내로서, 또 며느리로서, 제수로서, 숙모로서의 다양한 역할을 해내던 아내 마사코를 남편 이중섭이 상징과 왜곡과 변형으로써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중섭이 왜 평상시와는 달리 이렇게 부드럽고 화려한 느낌에다 섬세함까지 보여주는 일본화풍의 그림을 그렸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새색시 마사코를 마음속으로 염려하고 응원하는 신랑 이중섭의 자상한 마음씨가 그림 속에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슴'은 독특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이 기운은 원화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것으로서 이 그림이 언제 그려진 것인지(1953년 작품인지 아니면 1945년 작품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더라도 이중섭 진품임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만일 이중섭 작품을 위조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엽서의 앞면에다 그림을 그리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엽서그림들처럼 뒷면에다 그림으로써 위작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싸인도 마찬가지이다. 'ㄷㅜㅇㅅㅓㅂ'이라고 적고 그 밑에 밑줄을 긋고 날짜까지 적지 이렇게 'ㅈㅜㅇㅅㅓㅂ'이라고만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위작 제조자가 그린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기증자 이호재씨가 이 작품에 관한 정보를 투명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밝히지 않는 것일까?

2005년 국내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중섭 위작 판매시도 사건'을 보자. 이 사건은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대표가 동경에 있는 이태성 씨 표구점에 가서 직접 받아온 가짜 이중섭 작품 8점을 2005년 3월 자신이 최대주주로 있는 서울옥션 경매에 내놓음으로써 시작된 사건이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이태성 씨에 대한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아버지 이중섭 화백의 50주기를 1년 앞두고 가칭 이중섭예술문화진흥회의 설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작품들을 경매에 내놓는다는 기사였다. 또한 서울옥션 이호재 대표도 이 작품들 중 한 점을 자신이 구입하여 서귀포시립 이중섭미술관에 기증하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 작품들은 일반인이 보아도 가짜임을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가나아트센터 큐레이터들이 몰랐을 리 없고, 서울옥션 내부감정위원인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덕수궁미술관장) 씨가 또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어떻게 된 일인지 이 가짜 작품들은 누구의 만류도 받지 않고 서울옥션 경매에 붙여졌고 4점이 고가에 낙찰되었다. 그런데, 그 중 '물고기와 아이'를 구매한 고객이 이호재 씨에게 한국미술품감정협회(※ 최석태씨가 감정위원으로 있는 협회)의 감정서를 받아달라고 했다. 그럼으로써 이 작품이 감정의 도마 위에 올라가 '위작'이라는 판정을 받게 된 것인데, 이에 맞서 이태성 씨는 그의 어머니(마사코)가 50년 동안 간직해온 작품이라며 한국미술품감정협회를 명예훼손혐의로 2005년 3월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검찰은 14인의 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하여 2005년 10월에 '위작'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고, 며칠 전(2007년 10월16일)에는 이태성 씨에 의한 사기로 보고 '기소중지'와 함께, 소환에 불응하는 이태성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이중섭 위작 판매시도 사건을 볼 때 왜 이호재씨가 2003년 서귀포시에 이중섭 작품 8점을 포함한 한국근현대작가들의 작품을 기증하면서 투명한 작품정보를 제공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중섭 평전」의 저자이면서 한국미술품감정협회의 감정위원인 최석태 씨는 왜 굳이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까지 민원을 신청하면서 서귀포시장 등 관계자를 조사하고 처벌해달라고 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보기에 이호재 씨가 기증한 8점의 이중섭 작품 중 3점이 위작이라고 생각되면 그 근거를 적어 적당한 방법으로 서귀포시에 통보해주면 고마운 일이 될 것을 말이다. 다음 회에 계속하기로 한다.

※이 연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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