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평론가들의 해석은 갈짓자…“「소년」·「연과 아이」속 빗줄기, 시련 상징”

나는 지난 10회에서 「연과 아이」를 가리켜 ‘아이는 곧 연꽃’이라는 표현을 한 그림이라고 했다. 이중섭의 이러한 표현은 아이와 연꽃을 함께 그려 ‘연꽃 같은 아이’를 표현하려했던 1940∼41년의 은유적인 표현이 발전한 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중섭이 1952년 부산항 부두에서 헌병들에게 폭행당하고 있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아이를 가로막고 나섰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연과 아이」가 그러한 이중섭의 삶에 뿌리를 둔 예술이라고도 했다.

   
 
  ▲ 「연과 아이」  
 



전문가도 해석 못하는 그림

이번에는 「연과 아이」에 그려진 빗줄기가 무엇을 상징한 것인지를 알아보고,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이중섭 특유의 감성을 느껴보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연과 아이」처럼 빗줄기가 그려진 이중섭의 「소년」을 우선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 「소년」  
 



「소년」의 제작시기를 오광수씨는 이중섭의 원산시절인 1942년에서 1945년 사이로 추정했다(「이중섭」 177쪽). 최석태씨도 해방 전 억압시대에 그려진 작품이라고 했다(「이중섭 평전」 148쪽). 그러나 나는 해방 직후에 그린 거라고 본다. (※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섶섬이 보이는 풍경」 장(場)의 「소년」에서 하기로 한다.)

그런 반면에 이 그림이 언제 공개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오광수씨는 이중섭이 원산에서 피난 나올 때(1950년 12월) 짐 속에 넣어가지고 온 거라고 했다(「이중섭」 177쪽). 그러나 최석태씨는 이중섭이 이보다도 5년 전인 1945년 10월 덕수궁 석조전에서의 해방기념미술전람회에 출품하려고 원산에서 38선을 넘어 서울로 가지고 온 거라고 했다. 그런데 이중섭이 이 전시회의 출품기한이 지난 뒤에야 서울에 도착했기 때문에 이 그림은 석조전 전시장에 전시되지 못했다, 그 대신 배인철(시인), 김만형(화가) 등의 주선으로 인천 금융조합에서 열린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전시회가 끝난 뒤, 이중섭은 이곳에서 만나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노상덕에게 이 그림을 주고 다시 38선을 넘어 원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이중섭 평전」 146, 149쪽). 당시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해방기념미술전람회 참여작가들과 함께 찍은 이중섭사진이 있어 이 이야기의 신빙성을 더해준다.

   
 
  ▲ 1945. 10 덕수궁에서 열린 해방기념미술전람회 기념사진. 원안에 있는 인물이 이중섭.  
 



공개일자야 언제였든 간에 중요한 것은 이 「소년」에 그려진 빗줄기가 무엇을 상징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오광수씨는 빗줄기에 대한 해석은 하지 않고 “연필에 의한 드로잉으로서 여기에서는 아직도 이중섭 특유의 양식화가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월남 이후 이중섭 그림에 나타난 만화 같은 형상만을 주목하고 있다(「이중섭」 177쪽). 반면 최석태씨는 이를 빗줄기로 보지 않고 서정성을 표현하는 제작방법으로 보았다. “연필로 구사한 부벽준”이라고 하면서 민족적인 특색이 잘 드러났다고 했다. (아래의 글은 「이중섭 평전」 148∼149쪽에서 옮겨온 것이다.)

“이 그림은 서정성을 짙게 풍기고 있다. 이중섭은 연필을 세워 마치 종이가 뚫어질 만큼 굵고 짙게 선을 그은 뒤에 이를 지우고 다시 그 위에 선을 긋는 행동을 되풀이함으로써 이러한 느낌을 강하게 표현하였다. 이런 제작 방법은 민족적인 특색을 잘 드러내고 있다. 붓을 도끼삼아 내려찍듯 긋는 짧은 획선을 부벽준이라고 하는데 이중섭은 이런 기법을 연필로 구사하였으며, 그에 더하여 이를 지우고 다시 긋는 식으로 되풀이하여 어느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연필 그림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 최석태씨의 글은 부벽준을 잘못 알고 적은 글이다. 부벽준(斧劈?)은 ‘붓을 도끼삼아 내려찍듯 긋는 선’이 아니다. 부벽준은 측필 기법이다. 붓을 눕혔다가 쳐들면서 끌어당길 때 나타나는 붓 자국이 마치 도끼에 찍힌 자국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준법은 바위의 갈라진 면 같은 날카롭고 거친 면(面)의 질감을 나타낼 때 쓰인다. 「소년」의 빗줄기처럼 연필을 꼿꼿하게 세워서 그은 가늘고 긴 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렇듯 오광수씨와 최석태씨는 「소년」의 빗줄기가 무엇을 상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대신 ‘이중섭 특유의 양식화’니 ‘부벽준’이니 하는 엉뚱한 말만 했다. 여기서 필자가 본론을 말하자면 빗줄기는 시련(試鍊)을 상징한 것이라는 점이다. (※ 어떤 시련이었는지는 나중에 「섶섬이 보이는 풍경」 장(場)의 「소년」과 「세 사람」을 해설하면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이중섭 그림 "똑같은 것 없다"

「소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연과 아이」에서도 빗줄기는 시련을 상징 비유한다. 이렇듯 이중섭은 상징과 왜곡과 변형으로써 주제를 표현했기 때문에 평론가들도 그 주제를 제대로 파악해내기가 상당히 어렵다. 2005년 서울옥션을 통해 이중섭 위작을 팔아 9억여만원을 챙겼던 김용수씨 소장의 위작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위작들을 만들어낸 사람은 이중섭 작품의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눈에 보이는 것들만 베끼는 데에 급급했다. 그리고 그 베끼는 것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엉뚱한 그림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수준미달이었다.

   
 
  ▲ '봄'(「사계」)의 부분도  
 

   
 
  ▲ 「사계」  
 


그러나 이 「연과 아이」는 그렇지 않다. (※ 서울옥션 이호재 대표가 기증했다고 해서 같은 위작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또 부산 공간화랑 대표 신옥진이 가짜라고 했다고 해서 그 말을 믿어서도 안 된다.) 주제와 소재가 「사계」의 ‘봄’과 동일하면서도 ‘봄’의 형상을 똑같이 베끼려고 애쓴 흔적이 없다. 연잎의 모양과 잎맥의 구성, 아이가 서있는 각도, 빗줄기의 굵기나 각도 등이 「사계」의 그것과 똑같지 않다. 이 똑같지 않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화가는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 수십 번 그림을 그려도 절대로 똑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습관화된 손놀림에 의해서 부분적으로는 똑같은 그림이 나올 수 있어도, 전체적으로는 절대 베낀 것 같이 똑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위 「파도와 물고기」에 그려진 두 마리의 물고기가 「파도타기」에 그려진 두 마리의 물고기와 형상이 똑같지 않듯이, 「연과 아이」의 형상이 「사계」의 ‘봄’ 형상과 똑같지 않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똑같지 않다고 해서 위작으로 보거나, 부분을 베낀 거라면서 위작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감정(鑑定)이다.

   
 
  ▲ 「파도와 물고기」  
 

   
 
  ▲ 「파도타기」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는 「연과 아이」 원화를 보고 있노라면 기운(氣韻)이 생동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운이 이중섭 특유의 기운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사실, 이 기운은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느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다음 회에는 「섶섬이 보이는 풍경」과 관련하여 그 이해를 돕기 위한 다른 그림들을 우선 해설하려고 한다.


※이 연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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