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과 변형으로 표현된 팽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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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가 보이는 풍경」 | ||
이중섭미술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는 이중섭 작품 중에는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란 제목의 유화가 있다. 이 그림과 제목이 똑같은 이중섭의 다른 유화 작품이 일본에 한 점 더 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이 그림의 제목을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라고 바꿔 부르기로 한다. (※ 오광수 著 「이중섭」에도 이 그림의 제목이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라고 되어있다.)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 단순한 스케치 수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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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섶섬이 보이는 풍경」 | ||
이 「바다가 보이는 풍경」과 「섶섬이 보이는 풍경」에 대해 오광수씨는 그의 저서 「이중섭」161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다가 보이는 풍경」은 근경에 등장하는 몇 그루 나무만이 뚜렷하게 묘사될 뿐 그 아래로 지붕만 보이는 초가와 기와집은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며 숲 사이로 내다보이는 푸른 바다가 그나마 바닷가 풍경임을 알려줄 뿐이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바다가 보이는 풍경」에 비해 이중섭 고유의 거친 터치는 한결 분명히 잡히지만 이 작품 역시 평범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이중섭의 체취를 느끼기에는 미흡하다. 이중섭 태반의 풍경들이 싸인이 없는 걸 감안하면 이중섭의 풍경은 단순한 스케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본격적인 작품으로 작가 자신이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오광수씨의 글은 「바다가 보이는 풍경」의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쓴 글이다. 이 그림의 주제는 ‘이중섭과 마사꼬의 사랑’이다. 그림을 보자. 화면의 왼쪽에 커다란 팽나무 두 그루가 밑동이 붙다시피 그려져 있다. 이 팽나무를 자세히 살펴보면, 왼쪽 팽나무가 두 개의 가지를 마치 사람의 팔처럼 벌려 오른쪽 팽나무를 껴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왼쪽 팽나무는 이중섭 자신을, 오른쪽 팽나무는 아내 마사꼬를 상징 비유한 것이다. (※ 어째서 이중섭과 마사꼬인지는 다음 회부터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다만 주제가 ‘이중섭과 마사꼬의 사랑’이라는 점만 밝힌다.) 초가와 기와집이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려진 것은 바로 이 주제를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팽나무 이외의 다른 것은 모두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이중섭의 여느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주제를 상징과 왜곡과 변형으로 표현해낸 이중섭적인 그림이다. 이 한 폭의 그림 속에는 이중섭의 인생 역정이 담뿍 담겨있다. 이중섭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그림이다. (※ 그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회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단순한 스케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든가 “본격적인 작품으로 작가 자신이 인식하지 않았다”는 오광수씨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이중섭적인 방법을 벗어난 것인가?
또한 오광수씨는 그의 저서 「이중섭」 160, 161쪽에서 이 풍경화는 이중섭이 현장에서 사생한 것으로서 이중섭의 방법에서 벗어난 거라고 했다.
이 오광수씨의 글은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 어떻게 그려진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쓴 글이다. 이 풍경화는 현장에서 사생한 것이 아니다. 이중섭이 1951년 서귀포에 피난 와서 지금의 서귀동 512번지에 있는 ‘이중섭 거주지’ 초가 방 한 칸을 빌어 살기는 했지만, 이중섭이 이곳에서 사생한 것이 이 그림이라는 증거가 없다. 팽나무도 보이고 초가집도 보이고 섶섬도 보이고 수평선도 보이지만, 이 그림과 같은 구도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지점이 이 주변 어디에도 없다. 나무를 내려다보는 각도와 수평선을 내려다보는 각도가 일치하는 지점은 거주지보다도 훨씬 높은 곳이어야 되겠고, 팽나무와 섶섬의 크기 비례가 맞는 지점은 거주지보다도 훨씬 뒤로 물러난 곳이어야 되겠는데, 그러한 지점은 이중섭거주지 주변에 실존하지 않는다. 비슷한 구도라도 볼 수 있는 지점조차 없다. 이 그림은 사생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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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사꽃이 핀 마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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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가가 있는 풍경」 | ||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린 것일까? 이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그림이 바로 이중섭의 또 다른 작품 「초가가 있는 풍경」이다. 오광수씨는 이 「초가가 있는 풍경」과 「복사꽃이 핀 마을」을 통영 풍경이라고 했다(「이중섭」 167쪽 참조). 그러나 이 두 그림은 모두 다 서귀포 풍경이다. (※ 「복사꽃이 핀 마을」은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위에 제시된 「초가가 있는 풍경」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이중섭 거주지 초가에서 팽나무 옆길을 따라 바다 쪽으로 약 70미터쯤 내려온 지점에서 뒤돌아 거주지 초가집을 바라보았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풍경이다. 한라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리뻗은 완만한 능선과 그 앞에 놓인 오름(미악산)이 이 그림의 원경(遠景)으로 그려져 있다. 당시 이중섭 거주지 초가 위쪽에는 지금처럼 집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중섭이 이 지점에서 이런 한라산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그림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대로 자연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다. 왜냐면 이 지점에는 그림과 같은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사생한 것이 아니다. 「바다가 보이는 풍경」과 마찬가지로 머리 속으로 생각해서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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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기와」 | ||
생각해서 그린 것임을 증명해줄 수 있는 또 다른 그림이 바로 이중섭의 「청기와」이다. 「청기와」는 마치 매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이 지붕을 수직으로 내려다보면서 그린 것이다. 이중섭이 실제로 하늘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그린 것일까? 아니다. 사물을 보는 위치(view point)가 현실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머리 속에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과거에 보았거나 지금 보고 있는 몇 가지 풍경들을 머리 속에서 짜 맞추어 사실처럼 그려낸 것이다. 이러한 투시법은 전통회화에서도 많이 쓰이던 방법이다. (※ 위 「평양의 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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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세기작품이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린 것 같다.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이중섭 평전」에서 발췌. | ||
따라서 「바다가 보이는 풍경」은 아내를 일본으로 떠나보낸 이중섭이 부산·통영 등지를 떠돌아다닐 때, 지난 서귀포시절, 비록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그 서귀포시절이 그리워서 그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그림이다. 어떻든 이 「바다가 보이는 풍경」을 현장에서 사생한 거라고 하면서 그래서 이중섭의 방법에서 벗어난 거라고 하는 오광수씨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작가의 인생을 아는 것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므로 이중섭 인생 역정을 다음 회부터 몇 회에 걸쳐 소개하기로 한다.
※이 연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