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보이는 풍경」에 깃든 의미는…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염원했다”

[화가 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 13.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
「바다가 보이는 풍경」에 깃든 의미는…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염원했다”

   
 
  ▲ 「청기와」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는 「바다가 보이는 풍경」에는 서귀동 이중섭거주지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나는 지난 서 이 작품은 이중섭이 현장에서 사생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한라산과 미악산(오름)이 원경으로 그려져 있는 「초가가 있는 풍경」과 마찬가지로 '생각해서 그린 것'이지 눈으로 보면서 사생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또 공중에서 수직으로 밑을 내려다본다고 가상해서 그린 「청기와」와 마찬가지로 '생각해서 그린 것'이라고 했다. 또 이 「바다가 보이는 풍경」은 이중섭을 상징하는 팽나무가 마사꼬를 상징하는 팽나무를 껴안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서 '이중섭과 마사꼬의 사랑'을 상징과 왜곡과 변형으로 표현한 가장 이중섭적인 작품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광수씨가 이 그림을 단순한 스케치 수준이라고 평하면서 '이중섭 스스로도 이 그림을 자신의 본격적인 작품으로 인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어째서 이중섭은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 이번에는 이중섭 작품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를 통하여 이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좀 더 깊이 알아보기로 한다.

   
 
  ▲ 「초가가 있는 풍경」  
 

   
 
  ▲ 「바다가 보이는 풍경」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

   
 
  ▲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는 이중섭이 일본 유학 중이었던 1941년 4월 2일에 그린 것이다. 관제우편엽서에 그려 애인 마사꼬에게 보낸 그림이다. 이 그림 중앙에는 한 남자가 그려져 있고 그 뒤에는 한 여자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점이 있다. 머리 위로 쳐든 남자의 왼손이 마치 나뭇가지와 악수하는 것처럼 연결되어있다는 점이다. 오른손도 마찬가지이다. 화면 바깥으로 나가있어서 보이지는 않지만 왼손과 마찬가지로 나무와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그 다음으로 이상한 것은 색깔이다. 남자의 몸 색깔이 나무의 색깔과 똑같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뒤에 있는 여자의 색깔은 몸 전체가 하얗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참으로 난해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최석태씨가 ?이중섭 평전? 85쪽에서 소개한 것인데 84쪽에는 그 해설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유동적 유기적인 선으로 구획을 지어서 화면을 분할하는 아르누보적인 기법을 쓰고 있는데 (중략) 남자는, 어디로 갈지 모르고 헤매는 여자가 찾아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짐짓 모른 체하고 있는 것 같다. 화면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남자의 눈은 마치 땅에 놓인 꽃을 보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화면 밖에서 그림을 보는 감상자를 공모자로 이끌어 들이는 듯하다. 화면 안쪽의 보이지 않는 눈은 나무의 일부인 듯 감겨져 있을 것만 같다."

"남자는 여자가 찾아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짐짓 모른 체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적었는데 그래서 최석태씨는 이 그림의 제목을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라고 붙였단 말인가?

주제는 무엇인가?

또 최석태씨는 "그림을 보는 감상자를 공모자로 이끌어 들이는 듯하다"라고 적었는데, 그런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 그림의 주제가 아니다. 이 그림의 주제는 <프러포즈>이다. 마사꼬에게 프러포즈하는 이중섭 자신을 그린 것이다. 그림을 보자. 남자가 한쪽 무릎은 꿇고 다른 한쪽 무릎은 세우고 앉아있지 않는가. 머리 위로 쳐든 손. 나뭇가지와 연결된 왼손은 꽃을 받쳐 들고 있다. 전형적인 프러포즈 자세이다. 여자는 수줍은 듯 시선을 하늘로 돌리고 있다. 프러포즈하는 순간의 심리적 긴장감까지 느껴진다. 어떻게 보면 의외로 쉽게 주제를 알아낼 수 있는 단순한 그림이기도 하다. 일단 겉으로 드러나는 주제는 사랑의 고백 <프러포즈>이다.

그럼 진짜 주제는 무엇인가?

프러포즈하는 장면인데, 왜 남자의 몸이 나무와 연결되어 있는가? 또 여자의 몸은 왜 하얀색인가? 왜 둘 다 벌거벗고 있는가? 여전히 의문이다.
마사꼬는 아들이 없는 집안의 둘째 딸이었다. 이 집안의 아들 노릇을 하던 마사꼬의 형부가 학병으로 동남아 방면에 출정했다가 전사한 것은 이 집안으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이제는 둘째 딸 마사꼬가 집안의 대를 이어가야할 차례인데 그녀는 조선 청년 이중섭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인이라는 것도 딸의 순수한 사랑으로써 넘어갈 수 있었지만, 문제는 이중섭이 마사꼬를 데리고 조선에 가서 결혼하고 조선에서 살려고 하는 데에 있었다. 마사꼬의 부모는 딸이 결혼 후에도 일본에 남아서 부모와 가까운 곳에서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마사꼬의 부모는 이중섭과의 결혼을 찬성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렇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데에 이중섭 예술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 이 그림에서 동백꽃처럼 생긴 커다란 꽃을 보자. 그 크기로 보아 우리가 현실에서는 볼 수 있는 흔한 꽃이 아니다. 무속신화에서 말하는 '환생의 꽃'이다. 이중섭은 자신의 그림에다 샤머니즘적인 힘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아르누보적인 선'이 아니라 무속화(巫俗畵)에서 볼 수 있는 선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어렸을 때 집에서 굿 하는 것을 자주 본 데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폴론에게 쫓기던 다프네가 아버지 라돈의 도움을 받아 몸이 월계수로 변했다는 그리스 신화처럼, 이중섭 자신은 나무가 되고 마사꼬는 돌(하얀 대리석 조각상)이 되어 가족이 있는 원산 바닷가에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한 그림이다. 마사꼬와 함께 가서 살고 싶은 원산 바닷가 '이중섭의 유토피아'가 얼마나 확실하게 그려진 그림인가. 이 그림의 진짜 주제는 <이중섭의 유토피아>이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이중섭은 이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를 그리고 4년 뒤에 원산에서 마사꼬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원산 바닷가 송도원에서 신혼생활을 한다. 또 10년이 지난 1951년에는 제주도 서귀포에 피난 와서 이 그림과 똑같은 구도의 그림을 그렸다. 멀리 바다를 배경으로 왼쪽에 커다란 나무가 있는 그림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림에서 이중섭과 마사꼬는 이미 나무가 되어있다. (실제로 이중섭거주지 현장에 가 보면 두 팽나무가 그림처럼 껴안고 있지는 않다.) 「바다가 보이는 풍경」은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를 패러디한 것이다. 이중섭이 이 그림을 그리면서 또 염원한 것은 무엇일까? 당시 그가 거주지 방 벽에 써 붙였던 「소의 말」이란 게송(偈頌)이 그 답을 말해준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을 염원했던 것이다. 이 글에서 '여기'는 서귀포를 말한다. 왜 이중섭미술관이 서귀포에 있어야 하는가? 정답은 <이중섭이 '여기에'라고 했기 때문에>이다. 다음 회에는 이중섭의 유토피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 연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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