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 21. 원산시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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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종이에 연필. 26.4×18.5cm. 1945년(추정) | ||
공산치하(共産治下)
미국은 (1905년 동경에서 맺은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정대로) 필리핀 통치를 독점하는 대신에 일본의 조선 통치를 적극 지지했다. 그러다가 일본과 전쟁. 1945년 승리하자 전리품인 조선을 연합국 소련과 나누어 가졌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도 잠깐이었다. 북위 38°선 이남은 미군이 점령했고, 이북은 소련군이 점령했다. 이북에 들어온 소련장교 김일성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당시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무산자(無産者)들을 선동했다. 지주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무산자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무산자들의 지지를 얻는 데에 성공하였다.
1931년 일본 다쿠쇼쿠(拓植)대학 상과를 졸업하고 조선에 돌아온 이중석(이중섭의 형)은 동일은행 행원으로서 원산에서 흥남질소비료공장과 관련된 업무를 보았다. 그는 조선인을 차별하는 일본인 직원과 싸운 후 곧 퇴직했다. 그리고는 원산에 눌러앉아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고향 평원군의 가산을 모두 정리하고, 어머니에게 남겨진 외할아버지(이진태)의 유산까지 합쳐 원산에서 백화점을 경영하여 큰 부를 이루었다.
그런데 1945년 해방이 되자 형 이중석은 김일성 집단으로부터 가장 타격을 받는 부르주아 계급으로 분류되었다. 친일파 지주계급으로 규탄 받고는 원산 내무서에 수감되었다. (북한 당국은 이러한 인사들을 일단 감금해놓음으로써 그 가족이나 친지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나중 전쟁 무렵에 가서야 극비리에 처형하게 된다.) 당시 형이 내무서에 잡혀 들어간 것은 이중섭으로서는 집안의 기둥이 잘린 격이었다. 그러나 그 사회는 그러한 슬픔조차도 밖으로 나타낼 수 없는 사회였다.
「소년」과 「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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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사람」종이에 연필. 18.2×28cm. 1945년(추정) | ||
그런데 이 작품에 대해 「이중섭 평전」에는 “해방 전 억압시대에 그려진 작품으로서 전 시대의 실상을 잘 말해준다고 여겨 출품하려했던 듯하다.”라고 적혀있는데, 그것보다는 공산치하의 북한 당국을 고발하기 위한 작품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소년」이란 작품에서 잘려진 나무 그루터기는 원산 내무서에 수감된 형 이중석을 상징한 것이고, 길은 38선을 상징한 것이며, 길에 앉아있는 소년은 형을 잃고 슬픔에 잠긴 이중섭 자신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11회에서 이 「소년」에 그려진 빗줄기는 시련을 상징한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작품 「세 사람」에는 가장을 잃은 가족들이 슬픔조차도 말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슬픔의 극한 상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극한 상황에서의 행위예술
이중섭이 서울을 다녀와 보니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첫째 아들이 디프테리아로 죽어있었다. 당시 김일성이 한의학을 미신이라고 하며 침술사들을 전부 잡아가두었기 때문이다.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사꼬는 죽은 아들의 시신을 그림으로 그려 서울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보였다. 원산의 친구 구상(具常)도 그 슬픔을 같이 했다. 고은의 책에는 그날 이중섭이 구상과 함께 술집에 간 것으로 적혀있다. “헤에, 맛 좋다. 술안주로는 일등이다. 상(常)아, 안 그래?” 그들은 작부의 유방을 한번씩 만지는 것으로 술안주를 삼고는 어린 시체가 있는 방으로 돌아와 “남덕아, 너 홀랑 벗어라. 입어서 뭘 하니.” “상, 내 마누라 옆에 눕게. 잠이 잘 올 테니.” 그들은 발가벗은 마사꼬를 가운데 두고 잤다. 구상은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술도 화닥닥 깨었다. 결혼한 지 불과 1, 2년 밖에 안 된 구상은 천주교 신자로서 이런 장난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드렁드렁 코를 골며 자던 이중섭은 한밤중에 뚝 멈추고 일어나 불빛 밑에서 밤새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구상은 잠에서 깨어난 척하며 물었다. “섭, 무얼 해?” “응, 그림 그리구 있네. 우리 새끼 천당에 가면 심심할 테니까, 동무하라고 꼬마들을 그렸네. 천도복숭아 따 먹으라고 천도도 그렸네. 헤에.” 구상은 이중섭의 웃음에 귀기(鬼氣)를 느껴 섬뜩하면서도 공감했다고 한다. 다음날 그 그림과 그가 가지고 있던 불상, 동자상이 있는 도자기들을 작은 송판관에 시체와 함께 넣어 공동묘지에 파묻었다. 무덤에서 돌아오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아내의 등을 어루만져 주며 “울지 마라. 울지 마라.”했다고 한다.
그것은 극한 상황에서 진정한 예술가만이 할 수 있는 퍼포먼스였다. 이중섭은 영적인 매개자, 혹은 샤만처럼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죽은 아들과의 대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또 천도(天桃)와 아이들을 주화(呪畵)로 그려 관 속에 넣음으로써 탐욕과 폭력이 난무하는 차가운 세상에서 따뜻함을 기원한 것이었다. 이중섭의 퍼포먼스는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미술관 전시와는 차원이 다른, 현장감이 열려있는, 생명감이 살아있는 환경미술이었다. 다음 주에는 「아이들」과 「투계도」에 대해서 해설하기로 한다.
※이 연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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