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 24.원산시대(6)

   
 
  ▲「달과 까마귀」  종이에 유채. 29×41.5cm. 1954년 작  
 
#선구자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만주벌판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우리 독립군들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군자금이었다. 누가 이들에게 군자금을 대주었겠는가. 배고픈 독립군들은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와 민가의 곡물과 가축들을 털어갔다. '우리가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하는데 당신네들도 일조를 해야 되지 않겠소'하는 요구였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강가에 동포들을 모아놓고 말 타기 묘기(달리는 말 배 밑으로 들어가 총을 뽑아서 쏘는 묘기)를 보여주면 사람들은 그 절묘한 묘기에 박수를 치며 열광했다. 젊은이들은 감탄하여 독립군을 자원해서 따라나서기도 했다.

"마적단이 온다!"고 누가 외치면 사람들은 무서워서 어디로든 들어가 숨었다. 그런데 평안남도 중화군의 지주(地主) 김용현(金用鉉)은 대청마루에 그대로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마적단은 온 동네를 다 털면서도 이 지주네 집은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독립군으로 따라갔다가 나중에 몸이 안 좋아서 고향에 되돌아온 청년에게 김용현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서암 김용현 선생님을 모르는 독립군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김용현은 겉으로는 일제에 협력하는 척하면서도 뒤로는 몰래 독립군 군자금을 대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호 서암은 중화군 서기산의 서(瑞) 자를 딴 것으로서 동학(東學, 천도교)의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와 의형제를 맺고 호를 같이 나눈 것이었다.

서암은 할 일 없이 배회하는 동네 젊은이를 집에 데려와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장사밑천까지 대주면서 잘해보라고 격려해주기도 했다. 젊은이는 얼마 안 있어 돈 떨어졌다고 또 찾아오곤 했다. 한번은 이 젊은이가 무슨 일로 일본 순사에 붙잡혀 토사를 받았는데 이 집 자전거를 훔쳐간 것까지 불게 되었다. 순사는 젊은이를 포승줄로 묶어 이 집에 끌고 왔다. "영감님, 이 놈이 영감님네 자전거를 훔쳤습니까?" 그랬더니 "아니요. 내가 가지라고 그냥 준 거요."라고 말했다. 나중에 감옥에서 풀려나온 그 젊은이는 이 집을 찾아와 정말 잘못했다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서암의 가르침을 받아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했다. 서암은 1943년에 타계했다.

전윤병도 동학인이었다. 그는 평안남도 순천군 자산면의 지주였는데 서암과는 사돈지간이었다. 일제 때 조선팔도 방방곡곡을 다 돌아다니며 민족 주체사상을 전파시켰던 사람이다. 두세 집밖에 없는 시골 산골마을까지도 찾아가 호롱불 밑에서 주인과 함께 밤새워 새끼를 꼬며 우리민족의 주체사상을 이야기했다. 다음날 그 집을 나오려 하면 주인은 못내 아쉬워 "선생님, 하루만 더 묵고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전윤병의 집 부뚜막 위에는 밥을 담아 뚜껑을 덮어둔 주발 40∼50개가 올려져있었고 가마솥에는 항상 따뜻한 국이 끓고 있었다. 찾아오는 손님이 비록 거지라 해도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다. 꼭 식사 대접을 해서 보냈던 것이다.

그렇게 식민지시대를 보내다가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기다리던 해방이 찾아온 것이다. 광복의 그날 전윤병은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 그리고 사흘 후에야 고향집에 나타났다. "어델 갔다 오셨습네까?" 집안 식구들이 물었더니 "서울 좀 다녀왔지." 하면서 접어 넣어두었던 신문 한 장을 옷 안에서 꺼내어 방바닥에 보라고 던졌다. 신문에는 전윤병 선생이 해방을 기념하는 뜻에서 성북구 창동의 33만㎡(10만평) 땅을 천도교단에 희사했다는 굵은 헤드라인이 박혀있었다. 그날 전윤병은 사람을 시켜 소작인들을 모두 집으로 초대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잔치 때 쓰는 큰상들을 편 뒤 소작인들을 앉혔다. 여름이었는데도 예의상 하얀 두루마기까지 차려입고 지주네 집에 온 소작인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전윤병은 봉투들이 놓인 은쟁반을 금고에서 꺼내왔다. 봉투 겉면에는 소작인들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있었고, 그 안에는 토지문서들이 들어있었다. 전윤병은 소작인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그 봉투들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이 땅들이 다 자네들의 것이네."라고 했다. 내어놓은 국수를 소작인들은 어려워서 잘 먹지를 못하고 허둥지둥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전윤병은 나중에 악질 친일파 지주로 재단되어 해방 후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50년에 처형되었다.

#달용이

평안남도 순천군 자산면의 달용이는 밤중에 몽둥이를 달궈 닭장 속에 들이밀면 닭이 꼬꼬댁 소리도 내지 않고 슬그머니 그 따뜻한 몽둥이 위로 옮겨 앉는 것을 이용해서 동네 닭서리를 하던 젊은이였다. 동네에서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다 도맡아서 했지만, 사람들은 같은 조선인이고 해서 다들 눈감아 주었다. 달용이는 소련군이 들어오자 인민군이 되었다. 높은 계급장을 달고 38선 경비대장으로 나갔다. 분단 초기 38선은 그렇게까지 확고하게 굳어진 것이 아니었다. 남에서는 고무신이 올라갔고 북에서는 명태가 내려오는 봇짐장사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북사람들이 짐을 꾸려가지고 월남하는 일이 많아지자 38선을 못 넘게 경비를 강화한 것이었다. 밤중에 몰래 38선을 넘는 주민들을 향해 경비대는 따발총을 갈겼고, 붙잡아 가두기도 했다. 휴가를 받아 고향 자산면에 온 38선 경비대장 달용이는 "이남에 내려간 자산면 여자들 중에 나 안 거쳐 간 여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하며 동네사람들에게 으스댔다. 경비대는 38선 넘어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가두고 짐을 뒤져 금품을 뺏은 뒤 놓아주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넘어가길 시도했고, 그러다가 또 붙잡히면 또 금품을 빼앗고. 다 빼앗고 나중에는 뺏을 게 없어지니까 붙잡았다가도 가두지도 않고 "영감 동무, 또 걸렸네!" 하면서 그냥 내보내주더란다. 그런 와중에 달용이는 여자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다. 38선을 넘다가 붙잡힌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외쳤다. "여보시오, 이 해방 도로 무를 수는 없소?" 얼마나 우리민족이 기다렸던 해방인가. 그런데 그 해방을 무르고 도로 일제식민지시대로 돌아갈 수 없느냐고 했으니 비록 기전체 정사에 오르지 못한 이야기이기는 하나 오히려 정사보다도 더 당시의 시대상황을 실감나게 설명해주는 것 같아서 여기에 소개한 것이다.

#토지개혁

만주에서 분탕질이나 하던 김성주는 해방이 되자 자신이 마치 독립운동을 했던 것처럼 독립투사 김일성의 이름을 차용, 소련 대위 계급장을 달고 이북에 나타났다. 그가 1946년 3월에 발표한 토지개혁법은 소작인들이 그 전까지 지주들로부터 빌어 부치던 토지의 소유권을 소작인이 가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줌으로써 소작인들로부터의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적 속셈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이중섭의 형네 토지도 이때 몰수당했다. 혹시 지금 남한 사람들 중에는 '왜 그때 북한의 지주들이 토지개혁을 반대하지 않았을까, 데모라도 하지 않고.'라는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만약 그랬다가는 그 자리에서 총살당하는 그런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저 공산당이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토지분배란 것도 말이 무상분배였지 실은 나중에 수확물로써 공출케 하는 그런 분배였다. 수확기가 임박했을 때 농민조합에서 현장에 나와 예상 수확량을 미리 계산해두었다가 나중에 3대7제로 받아갔는데, 농사가 가장 잘 된 부분만을 표본으로 하여 낟알이 몇 개인지 일일이 세면서 조사하였기 때문에 공출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이중섭은 형 이중석이 해방직후 악질 친일파 지주 자본가로 재단되어 원산 내무서에 갇혔기 때문에 섣불리 이남으로 내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가는 형에게 더 큰 화가 미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중섭의 형은 한국전쟁 때 어디론가 끌려가서 처형당한다.

#까마귀로 상징 표현한 분노의 그림들

이중섭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중섭이' 해도 헤헤 웃었다고 한다. 또 나이가 열 살이나 아래인 김인호를 꼭 '인호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인호야'라고 불러 달라고 해도 그는 '그렇게 하면 재미가 없잖아'라고 했다고 한다. 도량을 넓혀 남을 대했던 것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고 불쾌감을 주지 않았으며 화를 내거나 증오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가 실은 무서운 분노자였고 증오자였다면 너무나 역설적인 이야기일까? 그는 1940년 동경유학시절에 「작품」이란 제목의 소 그림을 그려 일본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지 않았던가. 그 「작품」은 일본인 제국주의자들과 그에 협조하는 조선인 예술가들에게 소가 불알을 보여주며 '엿 먹어라!'고 욕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으니 그는 실로 무서운 분노자였고 증오자였던 것이다.

그가 원산에서 그리기 시작했다는 까마귀 그림들도 그런 분노의 그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시 말해서, 소련 공산주의자들과 그에 충성하는 김일성 도당, 즉 '달용이 같은 자들의 만행'에 분노하여 그린 그림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아쉽게도 당시 그가 원산에서 그린 까마귀 그림들은 지금 전해지는 게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그가 이남에 내려와서 그린 그림들의 대부분이 원산시대의 작품들을 패러디한 것이었고 그중에는 「달과 까마귀」라는 유명한 그림도 있어서 이와 똑같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 그림을 가지고 그의 원산시대 까마귀 그림들을 어느 정도까지는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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