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 25. 원산시대(7)
「아테네 학당」의 부분도 라파엘 1509~1510년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라
고은의 책에 의하면, 이중섭은 1946년 평양에서 열린 8·15 기념 미술전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아이를 그린 그림(제목 미상)을 출품했다고 한다. 그때 소련 화가와 평론가 몇 명이 와서 보고는 세잔, 브라크, 마티스, 피카소의 수준에 있는 그림이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또 원산 부민관에서 열린 원산미술가동맹전에도 출품했는데 세계의 미술을 오랫동안 감상하는 여행을 한 적이 있는 소련의 어떤 노부부가 와서 보고는 큰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북한 당국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라' '힘찬 노동자 민중을 그려라' '영웅적인 동지의 초상화를 그려라' 따위의 예술에 대한 저능아적인 간섭을 하면서부터 이중섭의 갈등은 커지기 시작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좀 골치 아픈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이중섭의 예술을 미학적으로 좀 더 심도 있게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예술과 기술
'art'의 어원은 라틴어 'ars'였고, 'ars'는 희랍어 'techne(테크네)'를 번역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테크네'가 영어 'technique'의 어원이었다고 하니 예술은 기술에 대한 고대 희랍인들의 개념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기는 장사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항해술, 언변으로 대중을 사로잡는 웅변술, 주먹이나 무기를 써서 상대를 제압하는 무술, 병든 사람을 낫게 하는 의술, 집을 짓는 건축술, 돌을 깎아 사람의 모양을 재현해내는 조각술, 평면 위에다 물감 등으로 사람이나 사물의 형상을 그려내는 회화의 기술. 이런 기술들을 고대 희랍에서는 '테크네'라고 불렀던 것이다. 테크네는 인간이 솜씨(skill)를 가지고 무언가를 제작 또는 생산해내는 활동을 의미했다. 지금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는 '기술'이나 '학문'은 물론이고 예술이라고 부르는 회화·조각·건축도 이 테크네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의아한 것은 지금 우리가 정작 예술이라고 부르는 시·음악·무용·연극 같은 인간 활동들은 (당시에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는데) 테크네라고 부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플라톤
당시의 희랍 철학자 플라톤은 테크네를 '획득적인 테크네'와 '생산적인 테크네'로 분류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장사술은 '이익'은 창출해내지만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는 않기 때문에 '획득적인 테크네'라고 했고, 반면에 가구를 만드는 목수나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기술은 자연에 없던 것을 새로이 만들어내기 때문에 '생산적인 테크네'라고 했던 것이다.
플라톤은 또 이 '생산적인 테크네'를 '실제적인 테크네'와 '모방적인 테크네'로 분류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건축가의 기술은 집이라고 하는 실제의 물건을 생산해내기 때문에 '실제적인 테크네'라고 했고, 화가의 기술은 실체가 아닌 이미지만을 생산해내기 때문에 '모방적인 테크네'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모방적인 테크네'를 '진정한 유사성의 모방'과 '외형적 유사성의 모방'으로 분류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목수의 설계도는 모델의 참된 크기·비례·색채 등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재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유사성(eikon)의 모방'이라고 했고, 화가가 그린 그림은 눈에 비춰지는 사물의 형상을 본뜬 것으로서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가짜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외형적 유사성(phantasma)의 모방'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플라톤이 회화나 조각을 '모방적'이라고 하면서 저급의 가치로 취급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이원적 세계관 때문이었다. 그는 이 세계를 이상계와 현실계로 나누어 생각했다. 이상계는 미(美) 혹은 미의 이데아가 존재하는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원형의 세계'이고, 현실계는 감각적이고 일회적이고 가변적이고 물리적인 세계로서 이상계의 '그림자 세계'로 보았다. 이상계를 모방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현상계의 사물들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림에 그려진 형상들은 모두 현실계의 모방, 즉 모방의 모방이므로 그는 그림을 현실계보다 한 단계 아래로 취급했고, 이상계보다는 두 단계 아래로 취급했던 것이다.
시·음악·무용·연극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대 희랍인들은 지금 우리가 당연히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시·음악·무용·연극을 테크네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러한 인간 활동들은 원시인들이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주술사를 중심으로 함께 외우던 주문이었고 노래였으며 춤이었다. 제식과 축제가 결합된 이러한 행위를 고대 희랍인들은 코레이아(choreia)라고 불렀다. 코레이아는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코레이아를 통해서 고대인들은 '신과 교감할 수 있는 신적인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신적인 상태를 고대 희랍어로 'enthousiasmos(엔토우지아스모스)'라고 했는데 이것이 '열광'이란 뜻을 지닌 영어 'enthusiasm'의 어원이었다고 한다. 제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신의 메시지를 전달받기 위해서 그들 역시 주술사처럼 신적인 상태, 즉 열광에 빠져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행해졌던 것이 이 시·음악·무용·연극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사람들을 신적(神的)인 상태로 인도하는 힘(예언력 혹은 영감)을 지닌 것이라고 그들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음악·무용·연극은 테크네보다 더 높은 정신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합리적 혹은 이성적인 활동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것이 지닌 정신성은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시·음악·무용·연극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있을 수 있다. 시를 읊는 시인을 보면 도저히 정상적인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다. 또 그 시를 듣는 청중 역시 시인과 마찬가지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플라톤도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시인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해악한 존재라고 하면서 시인 추방론을 역설했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나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시학(詩學)」은 비극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비극을 정의하기를 "운문을 매체로 하여 진지하고 엄숙한 인간의 행위를 극 혹은 공연의 양태로 모방한 것"이라고 했다. 역사나 철학도 당시에는 운문(verse)을 매체로 했으나 역사가 개별적인 사건을 다루고 철학이 진리를 다루는 데 비해 시는 '인간의 행위'를 다루었기 때문에 그것들과 구별되었던 것이다. '진지하고 엄숙한'것은 희극이 아닌 비극을 말한다. 만일 서술적으로 모방되었다면 서사시가 되겠지만 '극 혹은 공연의 양태로 모방'했기 때문에 비극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극을 사람들은 왜 좋아하는 것일까? 아리스토 텔레스는 "모방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우며, 모방의 인지는 즐겁다." "회화·조각·시 같은 모방작품은 그것의 모방대상이 즐거운 것이 아닐지라도 즐거운 것이 된다. 왜냐면 쾌(快)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모방대상이 아니라 모방과 모방대상이 일치하는 추론이기 때문이며 그 결과 우리는 뭔가를 배운다."고 했다. 모방에 대해 비난했던 플라톤과는 상당한 대조를 이룬다. 진정한 지식은 개별자가 아닌 보편자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플라톤과 일치하나 그 보편자가 (플라톤이 생각했던 것처럼 초월적 형상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개체(particular) 내에서 발견된다고 보는 것은 확실히 플라톤과 다른 점이었다.
위에 제시한 「아테네 학당」이란 작품은 16세기 초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이 그린 것으로서 플라톤과 아리스토의 형이상학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상계를 진정한 세계로 보았던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고, 모든 개별자들 가운데 보편자가 내재해 있다고 보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보편자를 플라톤처럼 파악할 경우 화가의 그림은 보편적인 실재와 단절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파악할 경우 화가는 보편적인 것을 추출하여 재생하는 존재가 된다. 플라톤에게서 완전히 무시당했던 예술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그 인식적 가치를 인정받을 가능성을 찾게 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테크네는 인간이 솜씨(skill)를 가지고 무언가를 제작 또는 생산해내는 활동을 의미한다고 했다. 여기에는 그것을 하기 위한 방법과 체계가 있고 그러한 체계적 지식은 경험과 기억에 의한 학습과 교육이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고유한 쾌(快)를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설명함으로써 시가 테크네에 속하는 것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이렇게 예술은 본원적인 것이면서도 그 미학적 가치를 인정받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예술'이란 개념이 이 지구상에 생겨난 것은 18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근·현대에 들어와 비로소 꽃을 피우기 시작한 예술은 한마디로 '자유' 그 자체이다. 이중섭의 예술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앞으로 더 따져보아야겠지만, 앞서 소련의 비평가가 이중섭의 작품을 세잔, 브라크, 마티스, 피카소의 수준에 있는 그림이라고 평한 것은 의미 있는 말이었다. 이중섭은 사물의 형상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집착을 버린 평온한 마음 상태에서 그의 눈이 바라본 것을, 다시 말해서 순간적인 그의 직관이 얻어낸 것을 단순하게 그려냈던 것이다. 이러한 이중섭에게 공산주의 북한 당국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라"고 한 것은 그를 죽이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하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