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 29. 제주도시대(3)

제목 미상의 에스키스



   
 
  ▲ 제목 미상의 에스키스  
 
이중섭이 1951년 서귀포에 피난 와서 그린 것이다. 정부의 강제징용으로 한라산에 끌려간 도민들의 잣담 쌓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잣담이란 당시 정부가 한라산 사람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중산간에 설치했던 돌담이다. 부역하는 도민들의 지친 모습을 주제로 했다. 제주 4·3에 대한 이중섭의 심중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다.



   
 
  ▲ 「섶섬이 보이는 풍경」 합판위에 유채. 41*71cm. 1951년  
 


「섶섬이 보이는 풍경」



왼쪽에 있는 그림 「섶섬이 보이는 풍경」을 보자. 화면 한가운데 바닷가 언덕이 그려져 있고 이 언덕 위에 작은 집이 한 채 그려져 있는데 그 명암이 제법 뚜렷하다. 나는 서귀포에 와본 적이 없는 친구에게 이 그림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는 “화가가 바닷가에서 2∼300 m가량 떨어진 곳에서 그린 것 같다.”고 했다.

그 친구가 얼마 전 제주도에 왔다. 나는 그를 서귀포 허니문 하우스로 데려와 “이곳이 「섶섬이 보이는 풍경」에 그려진 바닷가 언덕이라고 가정했을 경우 화가가 이 그림을 그린 장소가 어디였을지 한번 알아 맞춰보라”고 했다. 그는 나의 예상대로 허니문 하우스 입구에서 정방폭포 쪽으로 가다가 오른쪽에 있는 언덕을 가리켰다. 허니문 하우스에서 2∼300 m 떨어진 그곳에서는 그림에 그려진 것과 비슷한 풍경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거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를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서귀동 이중섭 거주지 뒤 구 아카데미 극장 계단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닷가 언덕이 보이지 않았다. 1970년대에 세워진 건물들이 왼쪽 사진과 같이 중간에서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중섭미술관 옥상으로 친구를 데려갔다. “뭐? 이렇게 먼 곳에서 그렸다고?” 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사실 그 친구 말대로 바닷가까지의 거리가 그림에 그려진 것보다 훨씬 멀어 보였다.



바닷가까지의 거리



그렇지만 그림에 그려진 사물들은 이 ‘이중섭 거주지 뒤’에서 전부 다 찾아볼 수 있다. 그림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비스듬한 등성이 위에 그려져 있는데, 2002년 실제로 이 등성이에 축대를 쌓고 지은 건물이 지금의 이중섭미술관이다. 소나무 앞에 그려진 초가집도 미술관을 짓기 전까지만 해도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조되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또 그림 오른쪽에는 팽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두 그루가 마치 한 그루처럼 겹쳐져있다. 지금도 이중섭 거주지 밑에 가면 이렇게 생긴 두 그루의 팽나무를 실제로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이중섭 거주지 마당에서 팽나무 밑동까지는 내리막 비탈이었고 비탈 중간에는 돗통시가 있었다. 이 돗통시는 나중에 화장실로 개조되었는데 이를 2003년 서귀포시가 거주지 뒷마당으로 옮기고 그 자리를 흙으로 돋우어 마당과 평형이 되게 하는 바람에 뒤에 있던 팽나무 밑동과 청기와 지붕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청기와 집은 목욕탕 집이었는데 몇 년 전에 철거되었다.

그림에 그려진 사물과 실제의 풍경이 이렇게 일치하는데, 단 하나 일치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중섭 거주지에서 바닷가 언덕까지의 거리이다. 그림에 그려진 바닷가 언덕이 (지금 허니문 하우스가 있는 언덕일 경우에는 이중섭 거주지에서 1㎞가 되고) 소남머리일 경우에는 600m가 된다. 이중섭은 이 현실의 거리를 무시하고 투시원근법과 명암원근법을 써서 바닷가 언덕이 마치 2∼300m 거리에 있는 것처럼 변형시킨 것이다.



또 하나의 섬



왜 변형시켰을까? 괜히 보기 좋으라고 변형시킨 것이 아니다. “이중섭은 상징과 왜곡과 변형으로써 주제를 강조하는 화가”라고 나는 이 연재 초반에 여러 번 이야기했다.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변형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멀리 있는 바닷가 언덕 소남머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변형시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소남머리가 이 그림의 주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소남머리’란 지명은 ‘소나무가 있는 언덕’이란 뜻으로 붙여졌다는 설도 있고, ‘소의 머리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어떻든 이 소남머리는 4·3 당시 우리 군경이 무고한 우리 형제들을 잡아다가 즉결로 처형했던 장소이다.

보라! 형제가 피 흘린 곳, 저 삼각형 구도의 한복판에 그려진 소남머리를. 이 소남머리를 중심으로 한 방사선형 구도가 또한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소남머리에 초점을 맞춘 뒤 줌을 끌어당기면서 찍은 듯한 풍경이다. 이중섭은 왜 이렇게 소남머리를 주제로 삼았을까? 섬은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바닷가 언덕 소남머리에 얽힌 제주도민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이중섭의 가슴 속에 ‘또 하나의 섬’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리라.

이중섭, 그의 형도 해방 후 원산에서 북한 당국에 의해 처형되지 않았던가. 그는 죽은 형을 가슴에 묻고, 어머니와 생이별. 사선을 넘어 이 제주도에 피난 왔던 것이다. 그가 거주지 방 벽에 써 붙인 글을 보자.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이라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이어질 문장은 탄식과 원망의 목소리가 아닐까. 그런데, 이중섭은 의외로 “아름답도다. 여기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삶의 상징으로서 섶섬을 그렸지만, 그 섶섬과 마주하고 있는 사랑의 순교자로서 또한 소남머리를 그린 것이다.



2008년 4월 3일 서귀포시 서귀동 이중섭 거주지 뒤에 있는 구 아카데미 극장 계단 중간에서 찍은 사진이다. 섶섬과 마주한 바닷가 언덕 ‘소남머리’가 새로 지은 건물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는 이중섭 거주지 처마 끝과 마당이 조금 보인다. 팽나무는 이 이중섭 거주지 돌담 너머 낮은 곳(축대 아래)에 있는데, 2003년 이 집 마당이 높아져서 그 밑동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청기와 지붕도 마찬가지 이유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본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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