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해양문화읽기] 4. 포작인의 삶-2
포작인의 삶 안소희作

도망은 최소한의 저항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계급간의 대립은 있어왔다. 사회구성체 자체가 계급의 공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한 사회구성체 내에서 피지배 계급의 삶을 결정하는 제도는 곧 계급의 통제장치가 되기 때문에 계급의 이해 대립은 커져간다.
설령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잠재하게 되며, 적어도 어떤 기폭점이 있기까지는 폭풍 전야와도 같은 고요한 바다와 같다. 민중의 저항이라는 형태가 반란(叛亂)이 되었든, 도망(逃亡)이 되었든, 그것은 억압 받는 자들의 사회적 표현이었다. 그들의 이런 표현은 한 사회, 혹은 한 왕조의 통치적 모순에 대한 지배계급의 불길한 징후인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이런 민중의 저항은 매우 자발적이고, 단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런 저항이 특히 지속되지 못하고 단기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그들이 지배계급에 대해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기에는 임매뉴엘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의 지적처럼, '정치적·경제적·이데올로기적인 힘이 너무나 약하며 그들의 반란은 기껏해야 부분적인 효과만을 거두었을 뿐이고 전 세계 지배층이 누린 가장 큰 이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반란의 불연속성' 때문이었다.
적어도 봉건사회에서는 반체제 운동이 조직적이지 않고 자발적이지만 억압에 대해 즉흥성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시대 민중 저항의 성격이 피역(避役), 도망(逃亡), 도적(盜賊), 항쟁(抗爭)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삶이 불안정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경제적인 삶이 불안전하다는 것은, 조선시대의 여러 제도적인 과도한 수탈에 그 원인이 있었다. 부세(賦稅), 요역(役) 등의 제도적 수탈을 제외하고도 한양의 관리와 지방 수령의 비리, 목사(牧使) 수령(守令) 등 지방 관리의 비행(非行), 지방 토호들의 관권을 빙자한 수탈 횡포는 군현(郡縣)의 삶을 악화시켰다.
민심이 동요할수록 조정은 분대어사(分臺御使), 순무어사(巡撫御使), 별견어사(別遣御使), 감진어사(監賑御使) 등을 파견하여 지방 군현의 불안한 요소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 어사들은 지방관들의 현정(賢政)이나 치적(治積), 부정부패를 조사하고, 해방(海防) 상황의 점검, 시취(試取), 진상사역(進上私役)외 사역(私役)의 금지, 군기(軍器) 검열, 한라산 제사(祭祀), 국마(國馬)점검 및 사마(私馬) 상황의 보고, 농형(農形)의 상황 점검, 진휼의 공정성, 민폐(民弊)의 염찰(廉察), 포상(褒賜) 등의 내용을 보고하거나 부분적으로 조정·시행하였다.
조선후기가 되면 어사의 성격도 종합적인 점검의 목적보다는 한 가지의 목적을 위해 파견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영조 39년 10월 7일의 기록을 보면, 영조 때의 불안한 제주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고, 어사 파견의 목적도 종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조는 전 집의(前 執義) 이수봉(李壽鳳)을 위유어사(慰諭御使)로 삼아 15조목을 점검하라고 하명(下命)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13번째 조목은, 제주 해민(海民)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살필 수 있는 기록이다.
즉, '고기와 미역을 진상하는 일이 혼란하여, 산에 사는 백성에게까지 미치고, 모자(凉臺)의 징수가 바다백성에까지 미치고, 나리포(羅里浦;제주진휼용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 강진에 있다) 곡식이 한번 토호관속(土豪官屬)에게 들어가면 높이 쌓이지 않음이 없어 산백성 바다백성이 모두 근심에 잠기어 심지어 관가에서 골라서 올리다가 급기야 제주에서 배가 떠날 무렵(出浦) 나쁜 물품으로 바꾸어 보낸다는 소문의 실상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하고 있어, 지방 관리들의 비리와 그 방법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이를 뒷받침하듯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조선후기 제주의 「토지매매문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농민들은 빌려 먹은 환곡(還穀)의 원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 밭을 팔거나, 테우리(牧子)들은 동색마(同色馬)나 공마(貢馬)의 비용을 갚기 위해 논밭을 팔았다.
또 양민들은 연이은 흉년으로 당장 먹고 살기 힘들어 토지를 팔아 눈앞의 생계를 임시변통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토지가 없고, 오직 자신의 노동력만을 의지하며 거친 바다를 무대로 살고 있는 포작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포작인들의 사회·경제적인 처지
포작인들은 홀아비로 살다가 늙어 죽는 이가 많았다. 그만큼 진상하는 전복의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관리들의 사욕(私慾)까지 더하니, 관청의 공납(貢納)에는 늘 못 미치게 되었고, 포작인들의 책임량은 항상 부족하였다.
남은 전복으로 생계를 꾸리려고 했지만, 연간 책임량을 못 채우는 그들의 삶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한 포작인들은 진상선에 곁군(格軍)으로 동원되어 바다를 건너는 일을 병행해야만 했다.
포작인들의 잡역은 매우 위험 부담이 큰 사역(私役)으로서 표류나 익사를 감수해야 했다. 대개 제주의 여자들은 포작인의 아내가 되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나 처자가 있는 포작인들은 진상선의 사공으로 가는 중에도 제주에서 미역을 챙겨 와 양식을 사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작은 교역 행위라도 처자가 있는 포작인에게 매우 절실한 것이었다.
포작인에 대해서 유배인이나 목민관의 기록은 대체로 관점이 일치한다. 그들 외지인의 눈에 비친 포작인들의 삶은 수탈에 찌든 천민의 삶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숙종 때 제주목사였던 이형상은 포작인의 민폐(民弊)를 다음과 같이 장계(狀啓)로 올리고 있다.
"남편은 포작(鮑作)과 곁군(船格)을 겸하면서 많은 일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부인은 잠녀(潛女)로서 한 해 동안의 진상할 미역과 전복을 준비해야 하므로 그 어려움이 테우리보다 열배나 됩니다.
가령 그 일을 한 해 동안 모아보면, 포작으로서 바치는 값이 20필이 부족하지 않고, 잠녀가 바치는 값 또한 7~8필에 이릅니다.
한 가정의 부부가 바치는 것이 거의 30필에 이르니, 갯가 해민(海民)들은 죽기를 무릅쓰고라도 이를 피하려고 도망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중년 이상의 포작은 원래 많게는 300여명에 이르렀으나 혹 갇히고 곤장을 맞으면서도 책임에 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88명뿐인데다 그나마 상(喪)중이거나, 잡다한 탈이 생겨서 부역을 할 수 있는 숫자는 극히 적습니다…
대대로 뿌리를 박고 살아온 자를 빼고는 대개가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이들 80명이 한 해에 바쳐야 하는 전복은 거의 1만여첩에 이릅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이 놀랍고 가련하여 밤낮으로 생각해도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이형상의 이와 같은 장계는 70여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었다.
정조(正祖) 이산은「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제주의 포인(鮑人:포작인)과 선인(船人)이 편안히 지내어 직업을 잃거나 살 곳을 잃은 탄식이 없는가? " "제주에서 올라온 장계를 보니, 전복을 캐기 위하여 애쓰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마치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이 일은 익히 들어 매번 바로 잡고자 한 지 오래 되었다…
연례로 올리는 회전복(灰全鰒) 5508첩 18관(串) 가운데 우선 줄여 주었던 것과 아직 줄여주지 않은 것을 아울러 견감(견減)해 주라. 그리하여 섬백성의 폐단을 조금이나마 제거해 주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라. 이것은 대개 선왕께서 남기신 뜻이다." 라고 하교(下敎)하였다.
그러나 70여 년 전에 비해 진상 전복은 5000첩이 줄었으나, 정조의 말과 달리 포작인들의 삶은 결코 편안하지 못했다.
<제주문화연구소장· 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