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민족생활의학자 해관 장두석

이쯤이면 그 삶을 '질풍노도'라고 해도 좋았다. 이 울퉁불퉁한 역사의 벌판을 거칠 것 없이 달려왔다. 통일운동가, 민주투사, 인권운동가, 농민·빈민운동가, 환경운동가, 민족생활의학자. 그를 부르는 이 수식어는 그의 이력을 뚫고 지난다. 분단시대의 상처를 안고 운동가의 삶에 뛰어들어 수차례 옥살이도 했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통일을 염원하며 하늘을 향해 제를 올렸다. 그는 또한 광주의 오월을 온 몸으로 겪고 당하고 체험하고 이겨냈다.

하얀 도포자락 휘날리며  어디서든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굽혀본 적 없다. 칠순에도 가는 곳마다 민족생활의학을 전파한다. 인생 70년의 만만치 않은 연대기를 이루는 드라마틱한 그의 삶을 두고 광주의 김준태 시인은 '역사의 인간'으로서 살아온 사람이라고 평했다. "관념적 인간이 아닌 구체적인 삶을 살기위해 언제 어디에서나 대상을 피하지 않고 그 대상과의 싸움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했다. 해관 장두석. 제주도는 한반도의 뿌리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그를 만났다.

   
 
 

 해관 장두석은 

 1938년 전남 화순군 이서면 학당마을 출생. 초등학교 2년중퇴. 사단법인 한민족 생활문화연구회 이사장, 민족생활의학회 회장, 민족생활학교 운영. 우리겨레하나되기 운동본부 공동대표, 민족문제연구소이사, 북녘동포돕기, 서울 광주 환경운동연합 등에 참여. 전국 20여 곳에 민족생활관을 열어 전통문화와 생활건강을 교육하고 있다. 저서로 「사람을 살리는 단식」 「민족생활의학」 「사람을 살리는 생채식」(정신세계사 간)「생활과 건강」. 지난해 12월 그동안 민주화와 농민 통일 건강 환경운동 등에서 함께 애써온 100명이 넘는 이들이 글로 십시일반 모아 칠순문집 「흰두루마기자락 휘날리며」를 펴냈다.

 
 
# 열네살에 민족경제학자 박현채와 만나

일제강점기, 일본 교사 앞에선 한 소년. "너 몇 살이냐?" 일본말로 해야했다. 소년은 절대 굽히지 않았다. 우리말로 "여덟살입니다." 급기야 약이 오른 일본 교사가 매를 들었다. 아이는 열일곱살 덩치 큰 형들 속에서 뽑힌 급장이었다. 마을에선 신동이라며 군수가 명주베를 선물로 집에 보내던 시절이었다.

얼마후 그 아이는 "일본놈들이 우리집 유기그릇을 몽땅 빼앗아가 총알 만들려고 한다"는 요지의 즉흥연설을 학교에서 하고, 매타작 당했다. 그리고 그 다음주 운동장 조회대에서 자신의 보자기를 불태워 자퇴선언을 해버렸다. 일본 패망 두달 앞둬서였다. 일제교육에 반기를 들고 교문을 나온 해관의 최종 학력은 초등2년 중퇴.

그의 고향은 병자호란때 그의 9대조 할아버지 학당공이 화순 일심리로부터 피난온 곳인 장학리 학당마을. "동학혁명 집안이제." 그는 어린시절부터 면암 최익현을 비롯, 조우식 등과 순창에서 의병운동을 했던 백부 학남으로부터 한문을 공부했다.

안경너머의 날카로운 눈매만큼 그의 강한 어투와 독설에 사람들은 가까이 가거나 멀리간다. 거기에 수긍하는 해관. "독선을 하되 합리적인 독선이라야제." 그를 말하며 누구는 '백척간두 진일보'라 했던가. 죽음의 문턱을 들락날락하다보면 두려울 게 없다. "목숨하나 바쳐불면 그만이지. 살기 아니면 죽기지. 죽음의 문 앞에 서보지 않으면 안되제. 그러면 절로 깨달아부러." 한국전쟁시기 소년 빨치산이 되어 백아산으로 들어갔을 때가 열네살이었다.

그 산에서 그는 인생의 스승을 만났다. 1995년 먼저 세상을 뜬 통일운동가이자 민족경제학자 박현채였다. 그는 욕보 선수라고 할 만큼 욕을 잘했으나 논리가 정연했고, 경제가 최우선 해결문제라고 했으며, 인간미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또한 "먹을거리가 가장 중요하다" "글을 알아야한다" "의로운 일을 보면 몸과 마음 아끼지 말고 참여해야 하고, 불의에는 절대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했다. 네 살 위 박현채를 친구이자 동지, 스승이상으로 따르며 '대장님'으로 불렀다. 후일 신협운동과 가톨릭농민운동을 통해 농촌과 도시서민경제 운동에 눈뜬 데는 그의 영향이 컸다.

그에게 인생의 길을 제시한 것은 그 산생활이었다. " 빨치산 생활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해방이후에 여순사건이나 제주4·3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양심적으로 생활하지 않을 수 없었어. 우리는 그 난을 피해서 산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고."

# 5·18민중항쟁 온몸으로 겪으며 질풍노도의 삶

이후, 노도같은 삶 한가운데를 수많은 스승들이 나타나고 떠나갔다. '장두령' '장두목' 별명과 함께. 월세방살이때는 탄허 스님, 문익환 목사, 함석헌 선생 등 현대사의 큰 어른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또한 해관은 죽암 조봉암 선생이 이승을 떠날때는 5일간을 상복입고 거리에 앉았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인내천 사상을 강조하던 원주의 무위당 장일순 선생도 그에게 영향을 준 이다. "근대선비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신채호 선생이지. 단재는 대철학자 언론인 대학자지." 그가 가장 아쉽게 보낸 그리운 사람은 시인 김남주. "김남주는 필봉의 혁명가이며 행동의 혁명가야. 시커먼 농민이야. 욕도 잘허고."

광주 5·18민중항쟁때는 1시간40분 동안의 최후진술을 통해 5·18의 정당성을 역설, 수사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5·18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그해 5월 26일 새벽, 홍남순 변호사 등 광주지역 대표적 민주인사들과 "계엄군은 더 이상 시내로 들어오지 마라!", "더이상 피를 흘려선 안된다!"며 '죽음의 행진'을 벌이다 상무대 군영창에 갇힌다. 이때 12년을 선고 받고 사면 석방됐다.

당시 고문으로 다리가 부러진 것은 공소장에 도장을 찍지 않은 대가였다. (왼쪽 다리가 부러져 깁스를 하는데 여기서 자연치료법을 응용한 단식요법을 하고 빨리 치료됐다.)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 죄인은 광주시민을 학살한 놈들 아니냐" 고 항의했다. "동학과 광주학생운동과 4·3과 5·18이 함께 발로된 것이지. 민중의 갸륵한 뜻이 분출된 것이지." 그의 목청이 높아진다. 이쯤에서 그가 터득한 40년 민족생활의학을 들어보자.

# 막히면 병이고 트이면 낫는다

"민족생활의학은 선현들의 지혜로 자연순환의 이치대로, 자연에 가깝게, 풍토합일로 살아가는 것이야. 이것이 최고의 생활법이고 학문적으로 말하면 의학인 것이야."

전국에 민족생활학교를 열고 있는 해관 장두석. 그의 민족생활의학은 어디서 출발했을까. 1953년 폐수종과 간질환이 악화되면서였다. 그때 옹성산 토굴에 들어가 다산선생 민간요법과 의약서등을 닳도록 읽으며 공부하고 단식과 생채식 등으로 완치하면서였다. 한마디로 자연의 이치를 따르면 치유된다는 것을 체험했다. 이후 양심수 구명운동 등에 참여하는 한편 전통의학과 동서고금 의서를 섭렵, 민족의학의 체계를 세워나갔던 것.

막히면 병이고 트이면 낫는다는 진리대로 그의 치료법의 일순위. "먹었으면 똥을 싸야 한다!" 물의 순환논리처럼. 순리에 역하면 병이 된다는 것. "햇빛 산소 물 소금 비타민C가 5대영양소야.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이 최고 건강법이여. 짜고 맵게. 자연을 따랐던 우리 조상들 지혜대로 살아라이거여." 식의주, 그에게 최고의 보약은 밥상이다. 민족생활학교에서 주장하는 건강계명은 많다. 어린이들이 한울님이고 희망이고 내일이다. 학교급식에도 부모들이 직접 개입하라. 물을 하루 2.5ℓ이상 마셔야 산소를 공급해줘 신진대사가 활성화된다. 암은 달래고 어루만지고 보듬고 가야할 동반자로 여겨라. 풍욕, 냉온욕으로 산소를 공급해주고 단식과 생식으로 쌓인 노폐물을 내보내고 체질을 개선하라. 누우면 죽고 움직이면 산다. 아이는 반드시 자연분만으로 낳아라 등이다.

그런데도 그는 거의 매일 막걸리를 마시고 담배 두갑을 피운다. 새벽 4시에 깨어나 30분씩 운동하고 냉온욕한다. 허나 아직까지 약을 먹어본 적은 없단다. 기인의 풍모인가. 거침없다. 그의 삶 앞에 또다른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쇠고기 파동은 '도를 넘어선 일!'이라고 말하는 해관. 최근 10대들의 촛불집회에 대한 해관의 생각. "지금 잘 나가고 있지. 애기들이 깨달아부니까. 10대들이 나라를 지킬 놈들이니까. 도를 넘었으니까 국민들이 깨달아분거여. 도를 깨닫게끔 만들어준거여."

# "제주도는 뿌리, 사람 사는 동네요"

비애와 고락을 나누며 다양한 삶을 살아온 해관 장두석. 그는 제주도의 땅과 기운이 각별하다고 생각한다. 제주도와의 첫 만남은 1950년대 초. 형의 모슬포 군생활 때부터. 그때 인상깊었던 것은 '통시'였다. "아주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었죠. 또 민가에서는 고구마 조 팥을 섞어 범벅을 만든 것으로 김치와 내놓았는데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것이 그렇게 인상깊어. 여기가 사람이 사는 동네요." 이후 수없이 '공부하러' 제주도에 왔다. 그 영향으로 제주민족생활관도 생겨났다. (본회: www. gungangi.co.kr)

"탐라국에 탁 버텨서 우리 국토를 보존하고 민족의 삶의 터전을 이뤄내는게 제주도인 것이요. 살면서 얼마나 고통스런 배고픈 생활을 했겠소. 외침에도 꿋꿋이 지켰소. 하늘과 땅과 사람, 천지인의 일체를 잘 이뤄낸 곳이 제주도라는 것이다. 그는 얼마전 제주돌문화공원에서 설문대할망대제를 집전했다.

"그러니까 설문대할망은 사실이다 아니다할 것 아니고 몇 천년동안 여기에 사신 민중들에 의해 구전돼왔다는 것은 큰 상징적 할머니고, 창조적 할머니라고 볼 수 있지요. 뭣이 옳다 그르다할 것없이. 창조신화가 제주를 지키는 큰 정신적 지주거든요. 나는 설문대할망이 거녀다 이런것 보다는 자식인 오백장군을 먹여살리고 그 자식들에 대한 모성애,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우리에게 주는 것이 많습니까. 지금 그런 것이 너무 없어지잖아요."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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