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한국 꽹과리의 명인 이광수
때로는 흐르는 강물처럼, 때로는 속까지 뒤집으며 하늘 향해 요동치는 파도처럼 소리친다. 꽹과리 소리하나에, 훑어내는 비나리에 그저 가슴이 열리고 닫힌다. 우리시대가 인정하는 꽹과리와 비나리의 명인 이광수. 그 작은 꽹과리의 육신은 그만의 타법 안에서 휘몰아치는 삶의 비애와 기쁨을 모아내는 소리를 낸다. 그냥 두드린다고 저런 천둥소리가 나오는가. 그게 꽹과리인가. 그가 '사물놀이' 탄생 30년을 맞아 그의 제자들로 구성된 민족음악원예술단을 이끌고 전국 소극장 투어에 나섰다. 그렇게 나선 길, 제주무대에 선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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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음악원 이사장 이광수 1952년 충남 예산 출생. 사물놀이 창립멤버. 대불대 전통연희학과 교수. 민족음악원 이사장. 남사당패를 이끌던 부친 이점식의 영향으로 여섯살부터 천부적인 예술적 끼를 발휘했다. 열네살부터 쇠로 한길을 가기 시작했다. 1962년 전국 농악경연대회에서 개인상 수상. 특히 축원덕담의 비나리는 그만의 감수성과 내면화로 청중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그의 스승은 학자로는 심우성, 사물로는 당대 최고의 쟁이들이었고 아버지의 친구들이었던 남사당패 남운용, 양도일, 송복산, 송순갑, 최주태 등이었다. | ||
# 소극장무대에서 객석과 에너지 교감
"너희들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다. 이건 기적과 같은 인연이다. 너희들은 죽어도 헤어지면 안된다." 그랬다. 당대의 명창이었던 박귀희와 김소희는 벅찬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말했었다. 1978년, 서울의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4명의 젊은 사내들이 처음 공연을 마친 날이었다. 민속학자 심우성이 붙여준 이름, '사물놀이'의 무대탄생 순간이었다.
"그랬을 때, 혜성처럼 나타난 것처럼 됐지만 실은 20년이란 세월이 있었던 거예요." 이광수, 김덕수나 최종실이나 죽은 김용배는 이미 사물놀이 시작 전부터 20여 년 사물놀이의 전신인 남사당패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운명처럼. 그들의 아버지들도 모두 그 길을 갔었다. 어느날 야외에서 했던 악기들을 좁은 공간으로 끌어들이면서 음악형태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날 이후, 이들은 '사물놀이'를 갖고 한바탕 세계를 순회하며 우리의 울림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했다. 1982년, 한국의 악기가 세계 타악기 목록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세계타악기협회가 주관한 미국 텍사스 달라스에서의 공연. 두드리는 것에 도사라는 사람들 2만명이 모인자리였다. 그때 뉴욕필의 모리슨이라는 사람은 "내가 진짜 위대한 음악을 오늘 봤다"고 박수를 쳤다. 그때 그들은 금탑을 수상했고, 사물놀이의 명성은 전세계로 퍼졌다.
도원결의로 뭉쳤던 이들 네명의 사나이들은 '김덕수패사물놀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다 80년대 중반 흩어졌고, 각기 대학강단에서 제자들을 길러내며 활동하고 있다.
어느덧 사물놀이 탄생 30년. 자신들의 색깔을 이번 기회에 보여주자고 했다. 이광수는 제자들을 데리고 소극장 투어공연에 나섰다. 국내 공연이 끝나면 일본, 미국 공연까지 잡혀있다. 그런데 왜 소극장일까? "처음 시작한 곳도 소극장이었어요. 좀 더 관객과 가까운 곳에서 교감을 느낄 수 있게 하기위한 것이지요. 최근엔 극장이 너무 대형화하다보니 큰 모니터를 설치 안한 곳은 먼 곳에서 얼굴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설까. 객석은 바로 무대 가까이서 그들의 폭풍우를 휘몰아치게 하는 신명에 곧 침몰했다. 특히 이광수의 카리스마는 내내 객석을 숨죽이듯 압도했다.
# 비나리, 깊은 울림과 비장미 객석 매료
비원을 담은 그의 비나리는 깊은 울림과 가락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살살 긁어낸다. 슬픔의 원형을 끌어내면서 비장미의 절정에 철렁 빠트린다. 1990년 광복 45주년 범민족음악회때 그는 이 비나리로 민족의 통일염원을 담아냈고, 객석을 사로잡았다.
"태초에는 무속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봐요. 비나리에는 유불선이 다 들어있지요." 제대로하려면 서너시간이 걸린다. 그는 내년쯤 비나리만 갖고 공연을 가질 생각이다.
꽹과리의 달인 이광수. 그는 한 길을 가면서 잠시 다른 길을 꿈꾸진 않았을까. 서양의 최고 음악가들과 교향악단과도 연주해봤다. 물론 한번 외도하는 기분으로. "스스로 진짜 후련하다는 맛, 환희를 맛볼 수는 없었어요. '우리끼리' 했을 때만큼 환희가 없었어요. 한 무대에서 했다는 것 이상의 만족감은 나오지 않았어요." 그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가능한 사물놀이란 한 작품만 갖고 갈고 닦아라." 그래야 명검이 되든지 명기가 된다. 이것저것 하는 척하다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그의 예인철학이다.
# 사물놀이는 우리 자연의 소리
"사물놀이는 광물성 동물성 식물성이 합해진 악기예요. 오묘한 오만가지 소리, 우리 자연의 소리잖아요. 하늘, 땅, 자연을 아끼는 민족으로서 원초적인 천지음양, 오행에 의해서 리듬이 만들어지죠." 허나 진짜 심오한 경지까지 가는데는 세월이 걸린다. 깊이 파고 들어서 몰입할 때 얻어지는 쾌감이기 때문이다.
"요즘엔 세계화다 하면서 국적없는 타악기들이 난무한다고 할까요. 모듬북이 유행된지 오래됐어요. 가락은 사물놀이 가락을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서양식 리듬을 두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일본북이나 중국북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거든요."
물론 세상이 변화했다. 허나 정신은 오히려 더 느슨해진 것이 아닐까. 아버지때는 이것이 없어지면 큰 맥이 없어진다했다. 그 가팔랐던 일제강점기, 일본사람들이 쇠붙이란 쇠붙이는 전부 공출하던 시절에도 그들은 사력을 다해 우리 소리를 지켜낸 예인들이다. "그때 숟가락 밥그릇까지 다 뺏어갔는데, 꽹과리. 징은 땅파고 묻어놨다가 해방되는 날 쳤다는 얘깁니다."
그의 아버지는 남사당패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징용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일본 순사들을 작신 두들겨패고 온 아버지는 그 길로 중국땅까지 도망갔다. "걸어서 걸어서 신의주를 거쳐서 중국땅을 밟은건데 열사흘이 걸렸다하고, 거기가서 남사당패들을 만났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해방 무렵 돌아 왔고, 충남 서해안 지역 내포지역 남사당패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무렵 아홉남매중 여섯 번째로 태어난 이광수. 아버지의 염원처럼 아기때부터 무동타며 비나리를 했다. 아버지가 꽹과리를 그의 손에 들려준 것은 여덟살 무렵. 시끄럽다고 소리 안나는 꽹과리를 줬다.
"꽹과리는 어려운 악기예요. 꽹과리 하나로만 독주를 했을때 시끄러운 악기죠. 시끄러운 악기를 듣기 좋은 소리로 아름답게 표현해 내는게 진짜 어려운 일이죠. 때문에 장고치는 사람이 더 괄괄하고 꽹과릴 누를 수가 없어해요. 꽹과린 소리는 크니까. 농악을 20∼30명이 하는데 꽹과리로 사인을 보내면 더 빨리 전달이 돼요. 꽹과리는 치면 머리로 전달이 되고, 북은 치면 가슴으로 전달이 되고 하늘과 땅이라 해요.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소리가 징소린데 그게 바로 중음이예요. 중도의 길이죠." 굿거리 한 장단은 하루 혹은 일년을 의미한다. 징이 일년을 치고 기다리고 있으면 북이 사계절을 잘라가는 것. 춘하추동 장고가 열두달을 만들고, 꽹과리가 앞서가면서 365일을 쪼개간다.
# 한국사람들 서양문화의 자발적 식민지로 살아
그는 한문에 밝다. 타고난 감수성 위에 탄탄한 이론은 70년대 전까지 걸립을 하던 남사당패시절의 '독공'덕이다. "어떤때는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한 집도 못하는 때도 있고. 그러면 그때 문패같은걸 보고 장구채로 땅바닥에 글을 쓰는 거예요. 문패랑 똑같이. 장구채가 조금씩 닳아지면서 짧아져요. 그러면 어른들이 깎아줘요."
전세계적으로 춤과 노래가 있고, 두드리는 것도 있고, 하늘까지 돌리는 민족으로는 우리밖에 없다는 이 꽹과리의 달인은 우리 전통문화를 살리는 길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무엇보다 사물놀이 지도자 양성이 시급하다고 본다. "동네아저씨들 데려다 하는데 두드리는 것만 심어주지요. 정신적인 것부터 가르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요. 아이들이 지치면 그걸 깔고 앉아요. 바이올린은 비싸니까 딱 위에 올려놓는데." 전국적으로 사물놀이 대회를 열때 보면 지도교사를 잘못만나 첫 단추를 잘 못 꿰었구나 아쉽단다.
그가 폐교를 이용해 민족음악원을 설립한 것도 그런 의미에서다. "한국사람들이 넋빠져서 살고 있어요. 서양문화의 자발적 식민지로서 살고 있어요. 일본시대때는 창씨개명을 안하려는 정신적인 의식이 강했었는데 요즘은 스스로 '부르스 리'라고 들어가는 입장이 돼버렸어요. 전통문화가 살아야 선진국대열에 나갈 수 있어요"
# 제주도 사물과 민요와의 만남 시도할만
그는 25년전부터 제주 무대에 섰으며, 제주도를 드나들었다. "전지역 사투리와 악센트가 다른만큼 멜로디가 달라요. 굿거리 장단이 평범하면서도 악센트의 사투리가 독특합니다." 금방 제주도 민요 한소절이 흘러나온다. 그는 제주도는 더 이상 아름답게 만들려고 하는 것보다 제주도의 맛을 버리지 않고 갔으면 한다. "대표적인 문화가 사물이니까 명맥을 잘 이어서 대물림해서 지금 걸어가는 길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는 그런 길이 됐으면 합니다." 이광수. 그는 제주 무속은 무속으로 지켜가고, 민요도 그렇게 지켜가면서 사물과 제주민요의 만남을 시도하면 좋을 것이라고 본다. 자연스럽게.
"제주도는 오래전부터 농사짓고 전복, 소라따며 삶을 영위했듯이 자연발생적인 노동요와 무속이 나온거예요. 민속경연에도 올해는 무속으로 해보고, 내년엔 민요로 하면서 토속을 지키면서도 박물관화가 안된 쪽으로 발전시켜서 제주도의 자랑거리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