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해양문화읽기] "땅의 문명 실어 나른 뱃길에 관심 가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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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초 한국 오끼나와 일본 지도. 고베시립박물관 소장 | |
배, 문화의 전령
배는 문명을 실어 나르는 수단이다. 단지 바다를 건너기 위한 도구로서만 배를 설명할 수는 없다. 비록 작은 한 척의 배가 생필품을 싣고 오고 가더라도, 그것으로 우리는 서로 다른 문명의 교호관계를 설명할 수 있고, 문화의 같음과 다름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배에 실어온 외부 문명의 결과들은 그리 쉽사리 단기간에 정착되지는 않는다. 한 문명이 다른 지역에 정착하려면 그곳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투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투쟁은 먼저 그 지역의 가치관, 관습들과 충돌을 일으키며 변형되면서 정착하거나 소멸되기도 한다.
극단적으로 문화의 이입이 전쟁과도 같은 외부의 힘에 의해 일어나더라도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말처럼 '가치와 제도의 전파는 외부의 힘으로 강요한다고 한순간에 이뤄지지 않으며, 그런 가치와 제도를 받아들일 수 있고, 거기에 적응 할 수 있는 내부적인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잊어버린다. 거시적으로 보면, 문화야말로 물과 같이 흐르고, 섞이고, 다시 흘러가는 것을, 또한 자신의 문화가 무엇이 왜 다른지를. 그러나 지구상의 물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 물이 한 덩어리처럼 대륙과 섬을 포개고 있다는 것 때문에 장구(長久)한 시간의 얼굴을 가진 땅의 문명과 사람의 이야기가 바다를 통해 세계로 전달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로 여겨진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은 굴곡진 땅의 길이 아니라 땅의 문명을 실어 나르던 뱃길이다. 그 뱃길은 서로의 땀 냄새를 교환했던 교역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왔고, 혹은 정벌과 침략으로 얼룩졌던 전쟁의 이름으로 남았다.
다시 그 뱃길은 돛이 부러지고 키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목숨을 하늘에 맡긴 표류의 역사로 새겨졌다. 그러나 이 뱃길은 거리를 불문하고 육로처럼 걷거나 수레를 밀고, 말을 타는 곳과 같이 다양한 이동수단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오로지 배라는 항해의 수단으로만 물길을 넘을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다.
1845년 영국 군함 사마랑(Samarang)호의 제주도 출현으로 조선의 조정이 떠들썩했던 일이나, 같은 해 라파엘(Raphael)호를 타고 표착했던 김대건 신부가 한라산을 기억하는 것도, 1653년 제주도(濟州島) 대정현(大靜縣) 차귀진(遮歸鎭) 아래 대야수(大也水) 연변에 표착한 하멜(Hamel. H) 일행의 낯선 땅의 공포도 모두가 배를 타고 물길을 넘어온 까닭이었다.
제주의 하늘을 연 고(高), 량(梁), 부(夫)의 배필(配匹)인 일본국 삼공주 또한 배의 이형(異形)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무상자를 타고 바다를 건넌 것도 물길의 소통이었다. 결국 배는 모든 이국 문화를 실어 나르는 소통의 수단으로서 그 배의 움직임은 바로 문화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이며 종착이다. 배는 물길을 통해 마치 꿀벌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문명의 주춧돌을 날라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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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3년 부산항의 하역작업. 가톨릭출판사 | ||
배, 생존을 위한 출발
배의 유래를「회남자(淮南子)」에서는 '구멍 난 나무가 뜨는 것을 보고 배를 만들 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다른 문헌에도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배를 만들었다'고하는 사실로 미루어 배의 발명이 물에 뜨는 나무토막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원래 배의 처음 형태는 몸이 들어가도록 나무를 파내어 만든 통나무배(獨木舟) 형태였다.
상형자인 '주(舟)'는 '배'라는 뜻이다. 이 글자는 선체가 휘어져 있고 가로목(橫木)을 걸친 배의 모습을 본뜬 것인데 글자 양 끝에 튀어나온 부분은 뱃머리(船首)와 뱃고물(船尾)의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주역(周易)」「계사전(繫辭傳)」에 '옛날 황제(黃帝)와 요순(堯舜)이 나무를 쪼개서 배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서 노를 만들었다. 배와 노의 이로움으로 소통되지 않는 곳을 건너서 먼 곳에 이르러 천하를 이롭게 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보다 정교하게 자연 상태를 넘어서는 배를 만들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배와 노의 발명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나무토막, 바가지, 짚더미 등의 원시적인 형태의 배들은 오로지 물 흐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노의 발명으로 배가 물길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일이 가능해졌고, 이제 사람들은 식량을 얻기 위해 점점 물 밖으로 멀리 갈 수 있게 되었고, 항해의 방향을 결정할 수도 제어할 수도 있게 되었다. 처음 강물을 건너기 위해 사용되었던 배가 바다를 항해하기까지는 무수히 목숨 건 시행착오가 있어야만 했다. 바다는 강에 비해 광대무변했고 파도가 거칠었다.
이런 조건은 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배와 항해술이 발달하기까지는 오히려 섬은 물로 막힌 감옥과 다름없었다. 섬 근해 어로작업 중 해류에 쓸려가는 해상사고가 빈번해지면서 물길의 흐름과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인구가 불어나면서 섬이 갖는 생산력의 한계는 생존의 불안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부득불 섬의 부족한 먹을거리를 위해서 섬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물마루를 넘어야만 했다. 그 대가(對價)가 무엇이 되었든 가만히 섬에 갇혀서 죽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제주의 해양활동과 관련된 기록 중 중요한 문헌은 중국「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동이전(東夷傳)'이다. 이 '동이전(東夷傳) 한(韓)조' 말미에 "주호(州胡)가 마한(馬韓)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에 있다. 그 사람들은 조금 키가 작고 말도 한족(韓族)과 같지 않다.
그들은 모두 선비족처럼 머리를 삭발했으며, 옷은 가죽으로 해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옷은 윗옷만 있고, 아래옷은 없기 때문에 거의 나체와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중(韓中)과 교역을 한다."고 하였다.
사실 주호(州胡)에 대한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호(州胡)가 제주도라고 추정한 것은 일본인학자 白鳥庫吉의 「아시아 북방족의 변발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시작되었고, 이병도(李丙燾) 등 많은 학자들이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북한학자 리지린은 주호(州胡)가 제주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고조선 연구」에서 "白鳥庫吉은 주호(州胡)를, 제주도에 선비족이나 오환족이 해상으로 이동해 와서 거주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들의 두발 양식, 가죽 의복, 그리고 목축을 하였다는 사실이 선비나 오환의 생활풍습과 일치한다는 것을 근거로 주호(州胡)를 선비나 오환인이라고 논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제주도에 선비나 오환의 문화유물과 풍습이 어떤 형식이라도 잔존해야 한다…
실제 3세기에는 선비나 오환족이 제주도에까지 이동해 왔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없으며 그들은 아직 요서(遼東)지역 오지(奧地)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주호(州胡)가 소와 돼지를 잘 쳤다는 것을 보면 왜(倭) 계통은 아니고, 북방 계통 종족임을 추단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서해의 큰 섬을 제주도로만 볼 것이 아니라 묘도(廟島) 열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고 있다.(리지린;1989)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는 마한의 초기 위치를 금강 유역, 후기 마한은 그 이남으로 추정하고 있고, 특히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甕棺墓) 축조 집단이 마한 세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3세기경 마한의 서쪽 큰 섬 주호(州胡)는 제주도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李淸圭;1999)
위의 결론대로 주호(州胡)가 제주도라면 교역 상대국인 한중(韓中)이 어디냐는 것이 문제다. 3세기경 한반도 나라들 간 교역 상대국은 삼한(三韓)과 왜(倭), 낙랑과 대방이었다. 이 국가들의 교역은 서해와 남해 연안의 해상을 끼고 이루어졌고 변한(弁韓)에서 나는 철 무역을 하기 위해 빈번하게 움직였다.
당시 이런 한반도의 정황으로 볼 때 한(韓)나라 중 제주도의 교역 상대국은 경상남도 해안에 자리한 변한(弁韓)이거나 신라시대 제주 교통의 요충지였던 탐진(耽津)의 위치로 볼 때 그 한(韓)나라가 마한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제주에서 한(韓)지역으로 교역을 하기 위해 이동한 배는 어떤 배일까? 현재 제주에는 '테우'라고 부르는 뗏목배가 남아 있다. 배의 원시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제주의 '테우'는 섬과 가까운 연안어로(漁撈)를 위해 사용되었던 배이다.
그러나 이 '테우'로 장거리 항해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적어도 교역할 물건을 싣고 가기에는 선적(船積)공간이 물이 넘쳐서 부적당하며, 부등변 사각형의 배 형태로는 장거리 운항 시 해류에 밀려 표류할 가능성이 배우 높기 때문이다. 특히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초기에 제주의 토산품이나 교역품이라고 할 수 있는 말과 소, 쇠고기, 말린 말고기, 가죽, 해산물 등으로 볼 때 더구나 '테우'는 교역선으로 적합하지가 않다.
제주문화연구소장· 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