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수군 대대적 개편… 성종 해양방위체제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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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능행도 호암미술관 소장. | |
시대에 따라 변하는 수군제도
배의 크기는 전선(戰船)인 경우 전투력과 상관이 깊고, 조운선(漕運船)은 세곡(稅穀)을 운반하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광해군 7년(1615), 전선의 크기를 3종류로 정하되 저판(底板)의 길이를 기준으로, 통제사나 수사(水使)가 타는 대선(大船)은 70척(尺), 중선(中船)은 55척(尺), 소선(小船)은 47.5~50척(尺)이었다가, 숙종 13년(1687)에 이르러 대선 72.5척(尺), 중선 60~65척, 소선 57.5~65척이었고, 정조대(1777~1800)는 대선이 90척, 소선 65~73척으로 커졌다.
선군(船軍)의 탑승 수는 대선 194명, 중선178명, 소선 164명이었다. 특히 작은 방선(防船)의 선군이 31~55명 정도, 병선의 선군이 17~30명과 비교할 때 배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배의 크기는 영조척으로 환산하여 1척(尺) 당 30.65㎝이다.
한 국가의 배의 숫자나 이를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은 국방의 기능과 정치권력의 보호 장치로 기능한다.
소위 군사력은 병력의 구성, 무기체계, 훈련수준, 실전 경험 등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수군은 조선초기부터 그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삼면으로 열린 조선의 바다는 늘 크고 작은 왜적들의 침략이 있었고, 국경선이 눈에 보이지 않는 만큼 해양방어의 필요성과 어려움을 동시에 겪었다. 수군은 해상에서 생활하면서 왜적과 전투를 벌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다른 병역(兵役)보다도 인기 없는 고역(苦役)으로 인식되어 기피의 대상이 되었지만 수군은 어느 병종(兵種)보다도 필요한 군사조직이기 때문에 조선정부는 이를 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소극적으로 왜구 침입에 맞섰던 태조(太祖)와는 달리, 태종조(太宗祖)에 이르면,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운 무장(武將)들이 주목을 받았다. 장수들은 패전을 하면 파직을 당하거나 귀양살이를 했고,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우면 전쟁영웅이 되었다. 태종은 무장들의 공과(功過)를 따지는 상벌제도를 강력히 시행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수군들은 국가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궁을 짓는 일, 성을 쌓는 일에 동원되면서 군역의 고역과 폐단이 뒤따랐다. 그는 병선의 편제조정과 조선술(造船術) 개발, 전투 무구(武具)의 개발, 훈련의 참관, 병선제도의 개선에 힘썼다. 병선의 숫자를 늘렸고, 군기수리를 지시하였으며, 수군의 군사명령의 이행 여부를 점검하기 위해 무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날씨 핑계로 해양방어를 게을리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영(水營)에 날씨기록부를 비치하였다. 군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군에게도 둔전(屯田)을 개간하게 하였고, 선군(船軍)으로 복무하다가 사망자가 발생하면 가족들에게 구휼하는 조처를 취하는 등 선군(船軍)의 생활보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태종의 수군에 대한 개혁적인 조치는 이후 세종조나 성종조의 발전된 수군조직으로 이행하는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세종 때에 수군에 대한 특기할 만한 성과는 수군에 대한 전국적인 개편이었다. 군비 강화를 위해 군선 개조, 시범 운영, 그리고 화약무기의 개발과 전담기구의 설치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수군의 규모는 5만402명이고, 병선은 10종류인데 모두 829척에 달했다.
세조 때에는 종래의 군사체제인 군익체제(軍翼體制)와 남방의 영진체제(營鎭體制)를 진관체제(鎭管體制)로 재편하였다. 진관체제(鎭管體制)란 요충지를 군사 거점으로 삼을 목적으로 '거진(巨鎭)'을 설치하여, 그 곳에 여러 진(鎭)들을 소속시켜 도(道)의 최고지휘관이었던 병사(兵使)가 지휘하는 지역방어체제이다.
수군도 이런 진관체제에 편입되어 해양방위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때의 수군은 배를 잘 다룰 줄 알아야 하고, 노를 저을 줄 알아야 하며, 병기를 사용하고, 연해(沿海) 지리에 밝으며, 조류에 관한 바닷물의 간조와 만조를 알고 화포를 잘 다루고, 수영에도 능해야 했다. 수군의 전투력 향상을 위해서 시사(試射)와 습전(習戰)을 시행하여 재능 있는 무사(武士)들을 수군으로 영입하기도 하였다.
성종대는 진관체제를 바탕으로 한 해양방위 체제가 완성된 시기로서 수군은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연산군대로 접어들면서 수군의 방위력이 쇠퇴해 갔다. 천호(千戶)와 만호(萬戶)들은 선상 생활을 하기보다는 연변수비에 치중하므로 수군은 언제나 배 위에 있게 조치하였다. 수군절도사 순력시 해로를 지나가도록 하여 군기를 확립하려 했으며, 기동력을 높이기 위해 소형군선을 제작하였고, 수군의 훈련을 강화하였지만 지휘관이 겸임하게 되면서 수군의 지휘체계는 점차 약화되었다.
중종대는 수군 정책이 소형군선제(小形軍船制)가 강화되면서 전술의 변화가 왔다. 소형군선제란 조선의 배가 왜선에 비해 선체가 크고 둔중하여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왜선을 추포하는데 어려움이 많아 소형쾌속선을 사용하자는 제도이다. 그러나 덩치가 큰 병선을 혁파하고 경쾌선을 만들었지만, 이 경쾌선 관리와 운용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왜선이 높고 커짐에 따라 정규전에도 불리하게 되면서 다시 대선(大船)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수군의 제도는 임진왜란기에 통제사를 설치하면서 다시 크게 변화했다. 진관체제의 '스스로 싸워 지킨다(自戰自守)' 는 원칙은 책임지역방어 개념이었지만, 임진왜란 초기 수평적 지휘권으로 인해 연합함대 구성과 지휘의 어려움이 뒤따르자 삼도수군통제사로 개편하였다. 이 통제사 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17세기에는 임진왜란 후 다시 정묘·병자호란으로 인해 조선의 인구 증가가 둔화되었고, 이상기후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저하, 관리들의 탐학(貪虐)에 의한 군정(軍政)의 모순이 더욱 심화되었다. 같은 시기 수군의 주목할 만한 변화는 습조(習操)였다. 습조(習操)란 수군의 전투연습과 군사조련(調練)을 말한다.
이 습조는 이순신에 의해 1593년부터 시행되었으나 수사(水使)가 주관하여 실시하는 습조는 정묘호란을 전후하여 실시되었다. 습조에는 통조(統操)와 합조(合操)가 있다. 통조는 통제사의 지휘아래 충청·전라·경상 삼도 수군이 모두 모여 훈련하는 것이며, 합조는 전라·경상 수군만 모여서 훈련하는 것을 말한다. 17세기 중엽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시기로서 명나라의 패잔 세력이 조선의 서해 연해에 자주 접근하였다. 이들 황당선(荒唐船)의 출현은 청나라와 긴장관계를 원치 않았던 조선 정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17세기 수군의 전력은 숙종 말기에도 임진왜란 말기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점점 쇠락하여 서양의 이양선(異樣船)은 고사하고 동양의 황당선(荒唐船)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해양방어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조선은 앞으로 닥쳐올 바다로부터의 거대한 도전에 대비할 수 없는 전조(前兆)의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18세기 영·정조 시대에는 수군과 관련된 갖가지 제도가 안정적으로 발전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해양방어진지의 통폐합이 추진되었는데 오랫동안 일본의 침략이 없었고, 일본과의 국교관계가 원만하여 전략적인 요충지를 제외한 해안진지들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 진지를 폐지하거나 조정하기에 이르렀다. 1764년 전라도 제주목 명월포에 만호진(萬戶鎭)이 신설된 것 말고는 수군 진영체제에 변화가 미약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불필요하게 확대되었던 수군의 조직이 정상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朝鮮時代水軍資料集1~5;2002)
굴욕을 되풀이 하지 말자
조선 영조 때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송규빈(宋奎斌,1696~1778)의「풍천유향(風泉遺響)」은 18세기 해이해진 조선 국방정책을 과감히 개선하고, 확고한 방어체제의 확립과 군사훈련을 강화할 것을 제시한 책이다. 그가 이와 같은 방략(方略)의 책자를 올리자 영조는 사슴 가죽을 하사하였다.
'풍천(風泉)'이란 '망국의 한을 읊은 「시경」匪風·下泉에서 따온 말'이고, '유향(遺響)'이란 '애처롭게 부르짖는다'는 뜻으로, 병자호란을 겪은 수모와 치욕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상징적 결의가 담겨있다. 송규빈은「풍천유향(風泉遺響)」가운데 '수군제도개선책(舟師正구)'에서 수전(水戰)에 관한 문제점과 개선책으로 수군요패기재요령(水兵腰牌), 출전장병서약식(誓師衆甘結式), 각 병기의 조작(配定遠近器械), 군령과 군법(約束軍令), 총론(總論) 등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특히 '출전장병서약식(誓師衆甘結式)'은 출정하는 군사들의 서약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다. 먼저 출정하는 날을 정하여 장병들을 교련장에 집합시킨 다음, 주장(主將)이 닭과 제수(祭需) 및 맹세문을 준비하고 지휘대에 진설하여 제를 지낸 다음, 망나니로 하여금 닭의 피를 내게 하여, 술병에 넣어 먼저 맹세한다.
"상벌이 공정하지 못하고 지휘통솔이 엄격하지 못하거나, 함부로 사람을 살상하고 재물을 탐하거나, 자기와 친한 사람에게 사정을 봐주고 병사들과 고락을 하지 않거나, 충심으로 국가에 보답하지 않을 경우 이 피와 같을 것이다"하고는 닭의 피를 마신다. 주장(主將)에 이어 본대(本隊)인 중군(中軍)의 각 전선에 소속된 장수와 초관(哨官) 등이 술잔을 올리며 맹세한다. 그런 다음 역시 닭의 피를 마신다. 이어 직급별로 차례로 나아가 이와 같이 행하고 담당구역으로 돌아간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