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선'이라 불리는 서양배의 항해목적 식민지 개척

   
 
 

서귀포시 산방산 용머리 해안의 하멜호

 
 

 

 

 

 

1995년 복원된 네덜란드의 바타비아호  자료 루츠붕크

 
 

제주 뱃길의 공포, 여
제주의 해안은 멀리 남태평양을 건너오는 물결로 온종일 하얗게 부서진다. 남방의 꽃과 향기를 머금은 듯 바람의 냄새마저 상서롭다. 바람코지(바람이 강하게 부는 곶) 빌레왓(돌밭)에 시간의 지층을 쌓아온 땅의 기억은, 섬사람들의 몸의 기억으로 남겨졌다.

제주도의 화산 활동은 제3기 말인 플라이오세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산 활동은 현무암의 유출 →조면암질 안산암 또는 조면암 분출 →화산쇄설물 분출 등 4회의 윤회 과정을 거쳐 지금의 고구마 모양의 섬으로 완성되었다. 화강암을 기반으로 하는 대륙판 위에 화산암이 분출하여 만들어진 제주도는 현무암이 지표면의 90% 이상을 덮고 있다.

또한 이 현무암층은 바다로 흘러들어 해저의 암괴를 형성하며 수많은 암초들을 바다에 숨겨 놓았다. 현무암의 해안이 섬을 파도로부터 방어하듯 바다로 흐르다 멈추어 섰다. 검은 돌은 파란 물결과 흰 파도에 의해 윤기를 내며 더욱 검어지고, 물기를 머금은 돌은 반사판처럼 태양에 의해 눈부시게 빛난다. 해안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채워졌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부분일 뿐이다.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는 것, 우리 인생에서는 비일비재하게 겪는 일인데 제주해안 지형이 꼭 그것을 닮았다. 물이 막아선 곳, 바로 보이지 않는 바다 밑 제주의 뱃길이 언제나 무섭다.

제주의 해안 지형은 '여'가 발달해 있다. '여'란 조수 간만의 차이에 따라 크고 작게 드러나는 일종의 암초로서 썰물에는 작은 섬같이 보인다.

이 여들은 조간대(潮間帶)에 발달해 있어서 큰 파도를 막아주고, 포구를 이루게 하며 해산물과 해초들을 자라게 하는 바당밭이다. 그러나 바다의 조건이, 밀물에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세지면 여들은 바다에 숨어 보이지 않아 항해하는 배나 표착한 배들에게는 금새 불안한 지뢰밭이 된다. 험한 바다를 구사일생으로 건너왔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는 것이 제주 해안의 공포다.  

복원선 바타비아호를 재현한 하멜호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앞 용머리 해안에는 2003년 8월에 만들어진 네덜란드 상선 하멜호가 재현되어 있다. 이 배는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의 표착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멜이 타고 왔던 스페르웨르호(Sperwer)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바타비아호와 같은 류의 갈레온선(Galeone)일 것이라는 추측에서였다.

이 바타비아호 재현선은 길이 36.6, 넓이 7.8, 갑판까지의 높이 11, 돛대 32이며 실제 바타비아호보다 조금 축소하여 재현되었다. 실제 크기의 바타비아 복원선은 네덜란드 렐리스타트에 있는 바타비아 조선소에서 건조되어 1995년에 진수되었다.

바타비아란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다른 이름으로 네덜란드동인도 회사가 자리하던 곳이다. 동인도회사란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약 200년 동안 동인도와 유럽의 무역을 주도하고, 동양의 식민지 경영에 이바지했던 유럽 제국의 회사들을 공동으로 부르던 이름이었다.

동인도라는 말은 지리상의 발견 이후 유럽인들이 부르던 말로 콜럼버스가 원인 제공자였다.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이 소문으로만 듣던 인도라고 생각한 나머지, 유럽인들은 인도로 오인한 쪽을 '서인도'라 했고, 옛날부터 알려진 아시아의 인도를 '동인도'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동인도는 현재의 인도(印度)보다도 훨씬 넓은 지역으로, 동남아시아 일대를 포괄하고 있다. 1602년, 네덜란드는 세계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연합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비슷한 시기 세계 최초의 증권 거래소가 암스테르담에 세워졌고, 영국 은행보다 100년을 앞서 암스테르담에 은행을 세웠다. 1670년 '바다의 마부(馬夫)'라 부르는 네덜란드인들이 해상을 걸쳐 운송한 물량은 영국, 독일, 프랑스의 운송량을 합한 것보다도 많았다.

바타비아호는 무척 아름다운 배였다. 이 갈레온선은 17세기초 유럽의 해양강국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제치고 떠오르는 나라 네덜란드의 커다란 자부심이었다. 특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배들은 당시 유럽에서 건조된 배들 가운데 안정성과 재원에 있어서 최신예 화물선이자 여객선이었다. 이 갈레온선은 이후 200년간 범선 건조의 모델이 되었다.

갈레온선(Galeone)은 카라케선(Karacke)의 개량형이었다. 카라케(Karacke)라는 명칭의 어원은 상선(商船)을 뜻하는 아라비어어 '카라키르(Qaraqir)'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원래 카라케선(Karacke)은 상갑판 구조물인 선루(船樓)가 높은 것이 특징이며, 외양이 둔중해 보이는 3돛대 범선이었다.

그러나 갈레온선(Galeone)은 선폭에 비해 선체의 길이가 더욱 길어졌고, 상갑판 선실의 높이는 상대적으로 낮게 만들어졌다. 갈레온선은 이런 둔중한 카라케선의 결함을 발전시킨 배였다.

바타비아호는 길이 45m, 폭 10.5m, 돛대 55m 크기로 1628년에 건조되었다. 배수량은 1200t, 적재량은 550t, 주돛대는 3개이며, 주철제대포 21~24문, 청동제 대포 8문으로 무장되었다. 이 배는 선원, 수병 194명, 승객 138명 등 모두 332명을 태우고 같은 해 10월 암스테르담을 출발하여 바타비아로 향했다.

이 배에는 인도에서 거래할 12개 상자에 금화, 은화, 순금 항아리, 은제 침대 다리, 화가 루벤스가 위탁한 포도주잔, 각종 보석을 담았고, 사치품으로 모자, 모직물, 구두, 도자기, 염료(染料) 등과 바타비아 총독이 주문한 선박 재료, 각종 건축 재료를 싣고 있었다. 선적한 화물의 가치는 약 30만 굴덴. 1굴덴은 오늘날 100센트(cent)에 해당하며 우리 돈으로 치면 3억6000만원 정도의 값어치이다.

바타비아호의 호송 선단은 7척이었으나 아프리카 희망봉을 지나면서 폭풍을 만나 호송 선단을 모두 잃자, 바타비아호는 단독으로 항해하여 인도양을 건넜지만 1629년 6월 4일 새벽 오스트레일리아 서해안 압롤로스 제도에서 좌초되고 말았다. 이 좌초로 인해 40명이 그 자리에서 익사했고, 생존자 292명은 두 곳의 작은 섬에 상륙했다.

곧바로 바타비아호에 동승했던 함대 사령관 프란시스코 펠제르트는 선장 아리안 야콥스를 의심하여 체포하였다. 배에 실은 보물을 탈취하기 위해 고의 좌초를 시켰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펠제르트 사령관은 많은 생존자들의 구조가 급했다. 그는 생존자들을 작은 섬에 남겨두고 46명만 두돛의 보조선에 태운 채 1000해리(Seemeile, 1해리:1852㎞)나 떨어진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그러나 그가 떠나자 남겨진 생존자들 사이에선 소수의 선원과 수병으로 조직된 새로운 권력자 무리가 생겨났다. 이 무리는 먼저 식량을 축낸다고 생각되는 어린이와 견습생들을 차례로 살육했고 여성들을 능욕하였다. 그 소수의 권력자 무리로부터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던 생존자들은 한 달이 지난 7월 7일, 약속을 지키려고 돌아온 펠제르트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짧은 기간 살해된 사람은 모두 124명, 관련된 살인자 7명은 현장에서 즉시 교수형에 처해졌다. 1629년 12월 5일, 펠제르트는 74명의 생존자와 남겨진 화물을 싣고 네델란드로 돌아왔다.

바타비아호 생존자들의 이야기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제국의 과도한 정복욕에는 생각치도 못할 위험이 내부에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바타비아호의 비극적 사건은 극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돌변하고, 폭력을 왜 행사하는지 인간의 야만성에 경종을 울리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윌리엄 골딩의 소설「파리대왕」은 바로 이 바타비아호의 비극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라고 한다.(Luts Bunk, 2006)

식민지 개척 위해 수많은 하멜 있었다 
하멜의 제주 표착은 조선의 전모를 서양에 알리는 직접적인 기회가 되었다. 하멜은 풍문으로만 듣던 미지의 땅 껠빠에르츠(Quelpaerts,켈파트:제주도)에 자신이 표착함으로써 죽을 위기를 넘겼지만, 서양에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와 문화·생활·풍속을 알려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개인의 '기구한 운명'을 넘어서, 역사는 그에게 '문명을 연결하는 기회'를 안겨주어 오늘날 한국과 네덜란드의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자가 되었다.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리는 서양배들의 항해 목적은 사실상 식민지 개척이었다. 식민지 개척은 자국에 번영을 가져오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돈을 벌려는 자들로 갑판을 채웠다. 공격과 방어를 위해 대포를 싣고 바다의 유목민이 되어 전 세계의 창고를 뒤졌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문명을 훔치고, 파괴했으며 총독부를 두어 식민지로 삼았다.

이 서양인들의 항해는 바다를 끼고 사는 원주민에게 엄청난 고난을 안겨주었다. 이런 그들은 개척자가 아니라 분명 침략자였고 식민지 경영에 돈줄을 대는 제국의 하수인이었다. 이들의 역사는 침략과 지배의 반복이었다. 역사에서 그들이 보여준 것처럼 힘의 균형이 있을 때 자신들의 교류 방법은 달라진다.

강한 나라와는 거래를 하지만 약한 나라에서는 침략과 살육과 지배가 이어진다. 국가와 자본이 결탁한 그들의 제국주의의 밤은 19세기까지 아시아에 그 족적을 남겼다.

제주문화연구소장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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