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앞세워 세계 곳곳 식민지 건설
바람의 힘 빌린 선박 등장…수많은'디아스포라'생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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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의 네덜란드 요새 포트 젤란디아. | ||
하멜은 앞날이 캄캄했다.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아름다운 스페르웨르호가 눈앞에서 순식간에 파도의 먹이가 되는 것을 보니 더욱 겁이 났다. 그리고… 또, 여기는 어딘가? 시커먼 암초들이 파도가 칠 때마다 상어이빨처럼 으르렁거리며 드러났다가 금새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이름 모를 섬, 여태까지 이런 공포스러운 검은 섬의 풍경은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휘도는 물살에 떠밀려 점점 해안에서 멀어져가는 상품 꾸러미들을 보니, 돈벌이를 위해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일본 데시마 총독 코이젯(Coijet)의 얼굴이 떠올랐다. 물거품과 함께 가라앉는 동인도회사의 재산 때문에 정신이 아뜩했다. 하멜에게 회사의 상품은 조국 네덜란드와 같았다.
전쟁 없이 무역을 할 수 없다
1653년 하멜은 대정현 차귀진하 대야수연변(大靜縣遮歸鎭下大也水沿邊)에 표착했다.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 말하면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 해안이다. 정확한 난파 지점은 알 수 없지만 표착 구역은 거의 압축된 셈이다. 하멜의 표착 지점은 숙종 때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익태(李益泰, 1633~1704)의「지영록(知瀛錄)」<서양국표인기(西洋國漂人記)>에 실린 내용이다.
그「지영록(知瀛錄)」에는 일명 '하멜 표류기' 외에 효종 대에서 숙종 대에 이르기까지 제주도에 표착한 외국인들의 표류기록이 여럿 있다. 이는 제주도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국제무역항로의 길목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하멜의 난파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선의 관리들이 절해고도로 여겼던 제주도에 느닷없이 파란 눈의 서양인들이 큰 배에 대포를 싣고 수평선을 넘어 온 것은 조선에 세계정세가 어둡다고 예고한 사건이었고, 조선의 미래가 예측되는 순간이었다. 하멜 또한 네덜란드 상관(商館)이 있는 일본의 데시마에 못 가고, 말로만 듣던 켈파트(제주도)에 운 없이 난파한 것은 네덜란드 국익에 위배되는 일을 한 것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식민지 개척의 법적 권한을 동인도회사에 일임한 상태였다.
동인도회사는 전쟁 선포와 군사작전권, 아시아 군주들과의 조약체결, 식민지 요새와 상관 건설, 군인 충원 등의 국가적 권한을 부여받았고, 그 댓가로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패권(覇權)을 위한 전쟁의 자금을 대고 있었다. 동인도회사 설립의 궁극적 목적은 '적에게 타격을 가하여 제압하고, 조국의 안보에 이바지'하기 위해서였다.
동인도회사와 네덜란드의 관계는 국가가 자본을 대고, 다시 자본이 국가를 돕는 독점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활동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위한 침탈이었고, 세계열강의 재편에 끼어든 네덜란드 식민사(植民史) 그 자체였다.
아시아 식민지 초대 총독이자 동인도회사 제4대 총독 얀 피터스존 쿤(Jan Piterszoon Coen)은 자바에 식민지 기지를 건설한 인물이다. 그는 자바의 반탐과 마타람 두 왕국의 왕위 계승 분란을 미끼로 점차 침략의 고삐를 당겼다. 결국 네덜란드는 영국인과 반탐인을 자카르타에서 물리치고, 1616년에 자카르타를 바타비아로 명명할 수 있었다.
| '전쟁 없이 무역을 할 수 없으며, 무역 없이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쿤의 식민주의 관점은 그가 치른 전쟁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 전쟁에서 우리들은 반탐인과 영국인을 자카르타에서 몰아냈다. 우리들은 자바라는 토지에 발판과 주권을 획득하였다.
그들의 죄악은 처벌된 것이다… 네덜란드 국민의 명예와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지금은 누구나 다 우리들의 벗이 되기를 희망할 것이다. 오랜 대망(大望)의 근거지와 기항지(寄港地)는 우리들의 눈앞에 있다. 동인도에서 가장 풍요한 토지와 풍부한 바다는 이제 제군(諸君)의 것이다."
또한 쿤(Jan Piterszoon Coen)의 잔인한 행동은 자바의 섬들을 공격할 때 드러났다. 2500명의 반탐인들이 굶어 죽거나 칼에 찔려 죽었고, 3000명은 섬에서 쫓겨났다. 쿤은 그들의 빈자리를 식민지 경영에 탈 없는 착한 사람들로 채웠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17세기 중엽에 이르면, 폭력적인 점령으로 식민지를 차지하였고 그곳에 무역거래소(商館)를 개설하였다. 무역 거래소들은 1607년 시암의 아유티아, 1609년 일본의 히라도(平戶)와 1641년 데시마, 1624년 대만의 포트 젤란디아, 1936년에 베트남, 1644년 실론 등 약 20여 곳에 이르렀다.
포르모사, 美麗島, 아름답고 슬픈 섬 대만
1653년 6월 18일, 하멜은 갈레온선 스페르웨르호를 타고 인도 총독과 평의회의 명령으로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출발하여 대만으로 가고 있었다. 목적은 대만의 새 총독 코르넬리 케사르(Cornelis Caesar)경의 부임을 위한 항해였다. 한 달 뒤 대만에 도착하여 신임 총독과 화물을 내려주고는 다시 7월 30일, 대만의 총독과 평의회의 명령으로 일본 데시마로 출항하게 된 것이다.
7월 31일 저녁, 포르모사에서 폭풍을 만나 며칠을 중국 해변과 포르모사 해안 사이를 떠돌다가 8월16일에 이르러 제주도에서 난파를 당한 것이다.
원래 포르모사라는 말은 포르투갈 범선들이 바다를 지나면서 멀리 보이는 녹색의 대만 섬을 Ilha Formosa라 부른데서 유래한다. 즉 Ilha는 '섬',Formosa는 '아름다운'이라는 뜻으로, Ilha Formosa는 '아름다운 섬(美麗島)'을 지칭하는데 이것이 유럽인들이 대만을 Formosa라고 부르게 된 원인이었다.
하멜이 제주도에 난파되기 전 출항했던 대만은 1624년 네덜란드에 의해 점령된 땅이다. 네덜란드는 중국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미 기항지로 점령했던 중국의 팽호에서 물러나 중국의 영토가 아닌 대만을 점령한 것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자신들의 말로 'Tayouan' 이라고 부르는 곳에 식민지 요새를 건설했다.
'Tayouan' 은 한자로 '대원(大員)'으로 표기되는데, 지금의 대남(台南) 안평(安平)에 있었다. 대원(大員)은 가끔 '대원(台員)' 또는 '대만(台灣)'으로 표기되다가, 대만(台灣)이 대만 섬 전체를 부르는 명칭으로 굳어진 것이다. 네덜란드인들이 요새를 쌓은 대원은 원래 반도(半島)였다. 이 대원반도의 요새는 1627년 개축하면서 포트(Fort:堡) 젤란디아(Zeelandia·熱蘭遮)로 명명되었다.
또 1956년 네덜란드 정부는, 명나라 말엽 전쟁을 피해 바다를 건너온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프로방시아(Provintia:普羅文西) 라는 곳에 요새를 새롭게 세웠다. 1650년 네덜란드 통치 아래 놓였던 주민들의 인구는 315개 사(社)에 6만8657명이었고, 이는 당시 대만 원주민 인구의 40~50% 정도를 차지하는 수였다.
네덜란드가 한인(漢人)을 모집하여 농사를 짓게 한 후부터 대만의 한인은 크게 늘어났고, 1662년이 되면, 대만을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지로 삼고 있었던 한인 정성공(鄭成功)에 의해 네덜란드는 대만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대만 통치 39년만의 일이다. 그 후 네덜란드를 쫓아낸 정성공의 한인 정권은 그의 아들 정경(鄭經)과 손자 정극상(鄭克)에 의해 계승되다가 1683년 청나라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주완요,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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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멜의 모습. 강진 하멜기념관 2008 | ||
하멜은 세계의 네덜란드 식민지 디아스포라들을 이어주는 벌이다. 수많은 하멜들은 네덜란드와 동인도 회사의 이익과 식민지 경영을 위한 디아스포라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용어는 그리스 어의 '씨뿌리다(speiro)'와 '너머(dia)'라는 말의 합성어로, 이 말이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는 그리스 어에서는 '이주'와 '식민화'를 뜻했다.
그러나 이 말은 유대인, 아프리카인, 팔레스티나인,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강제이주의 슬픈 역사를 의미하므로, 이때에는 정신적인 상처(trauma)를 지닌 말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식민화나 피해자라는 의미보다는 외국에 살면서도 민족적인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했다.(주경철, 2008)
바람의 힘으로 운항하는 카라케선이나 겔리온선의 등장은 근육의 힘으로 움직이던 갤리선의 역사를 마감하면서, 많은 식민지의 디아스포라들을 탄생시킨 것이다. 사각돛과 삼각돛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겔리온선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은 바로 네덜란드였다. 하멜은 이런 겔리온선을 타고 식민지나 혹은 교역국 상관(商館)의 디아스포라들을 연결하는 구성원으로 일한 것이다.
그들은 한번 자신의 국가를 떠나면 해안에서 임무를 받고, 바다에서 자며, 항해를 하다가 또 다른 연안의 장소로 명령을 받고 이동하였다. 이들의 삶은 릴레이 경주와도 같았다. 꽃(장소)에서 꽃으로 왕래하며 꿀을 나르는 벌을 닮은 것이 그들이었다. 식민지 디아스포라들에게 배달부였던 하멜의 역할은 전지구적 식민지의 전조(前兆)였다. 하멜이 이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다가 제주에 난파된 것은 조국 네덜란드를 떠난 지 5년이 지난 해였다.
제주문화연구소장 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