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교린관계 없는 나라의 국민은 송환하지 않아
하멜 13여년만에 탈출… 일본 데지마서 1년여 체류

   
 
 

일본 나가사키의 데지마. 목판화

 
 
조선에서의 탈출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 총독은 하멜 일행에게 물었다. 그들은 모두 쉰 네 개의 질문에 답했다.

문: 어디에서 좌초되었으며, 사람들은 몇 명이었고, 대포는 몇 문이 있었나?  
답: 조선의 제주도라는 곳이며 64명이었고, 대포는 30문이었다.
문: 배에 싣고 있던 짐은 어떤 것이고, 그 짐들은 어디로 가져가려고 했나?
답: 우리는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려고 했고, 사슴가죽과 설탕, 명반과 다른 물품을 실었다. 
문: 중국이나 다른 나라의 전선을 나포하거나 중국 해안을 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는가? 
답: 우리는 곧장 일본으로 가라는 것 외에는 어떠한 명령도 받지 않았다.

문: 기독교인이나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가?
답: 회사의 근무자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 조선에서 기독교인이나 다른 외국인을 본적이 있는가?
답: 네덜란인 벨테브레(박연)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는 1627년 배를 타고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려고 했으나 폭풍우를 만나 해안에 표류했는데 물을 구하려고 상륙했다가 3명이 붙잡혔으며, 일행 중 2명은 청나라 사람들이 쳐들어왔을 때 싸우다 죽었다.

문: 조선의 무기와 전쟁도구는 어떠하며, 성이나 방어시설은 있는가?
답: 무기는 소총, 도끼, 활과 화살, 작은 대포들도 약간 가지고 있고, 높은 산 위에는 성이 몇 개 있는데 그곳은 전쟁 때 피난하는 곳이며, 3년 동안 먹을 식량을 항상 비축하고 있다.
문: 은광이나 다른 채광 장소는 있는가?
답: 은광이 몇 개 있고, 왕은 그 은광에서 1/4을 가져가며 다른 채광 장소는 듣지 못했다. 
문: 어디에서 탈출을 했고, 여기까지 시간은 얼마나 걸렸나?
답: 전라도 여수 좌수영에서 탈출했고, 거기에 5명, 순천에 3명이 살고 있었다. 고토(五島)에 도착하는데 3일, 고토에서 4일간 머물렀고, 고토에서 여기까지 모두 9일이 걸렸고, 여수에서 나가사키까지는 대략 50마일 정도이다.  

1666년, 하멜은 13년 20일 동안 감옥 같은 조선의 생활을, 슬픔과 고통에서 해방시켜준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다해야 할지 몰랐다. 구사일생으로 고토(五島)에 표류해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한 하멜 일행은 아직도 조선에 남아 있는 8명의 동료들을 위해 전능하신 신이 도와주기를 빌고 빌었다. 1667년 하멜일행은 나가사키 데지마에 1년 남짓 더 체류하다가 바타비아로 떠날 수 있었고, 그곳에서 네덜란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조선의 잔류인원 7명 또한 1668년 8월 나가사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본의 쇄국과 네덜란드
처음 포르투갈인들이 일본 다네가(種子島)에 표착해 조총과 탄약 제조법을 전한 것은 1543년이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1510년 인도의 고아를 식민지로 만들고, 1516년에는 중국의 마카오를 점령해 극동 진출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이들 포르투갈인들의 일본 내항이 빈번하면서 1549년(天文 18년)에 이르면, 가톨릭교의 일파인 그리스도교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F. Xavier)가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쳤던 사쓰마(薩摩) 출신 사무라이 야지로를 앞세워 포교를 위해 일본에 왔다.

자비에르는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오우치(大友) 씨의 보호를 받으며 포교에 나섰고, 많은 사제자와 수도사들이 뒤따라 입국하여 일본의 지방 세력가인 다이묘(大名)와 손을 잡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려고 힘썼다. 특히 서부의 다이묘(大名)들은 포르투갈인들로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총과 무역상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영지(領地)에서 포교를 허락하고 지원을 하였다.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다이묘도 있었다. 당시 이들 신도들을 가리켜 '切支丹' 즉 '기리시탄(吉利支丹)'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에 전파된 그리스도교는 막부의 권력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막부는 겨우 확립되고 있는 봉건질서를 어지럽히는 그리스도교를 의심하기는 했으나 무역에 대해서는 보다 관대했다.

1609년에 네덜란드가, 1613년에 영국이 무역 허가권을 얻어 히라도(平戶)에 상관(商館)을 개설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들 포르투갈인과 조금 나중에 온 스페인인들을 '난반(南蠻)'이라고 부른다. '난반(南蠻)'이란 '남쪽에서 온 외국인'이라는 뜻으로, 후에 온 네덜란드인이나 영국인을 부를 때 사용하는 '고모(紅毛)'와는 구분하여 불렀다.

막부체제가 안정되면서 모든 유럽선의 내항을 히라도와 나가사키로 제한하였다. 그리스도교 포교 금지, 외국 무역선에 대한 제재를 하다가 1633년에는 장군의 명령서(奉書)를 지참하지 않은 일본 배까지 외국도항을 금지시켰고, 5년 이상 외국에 체류한 일본인의 귀국도 금지했다. 일본 사람들이라도 그리스도교도일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내린 조치였다. 1

635년 막부는 다시 일본인의 귀국 및 외국도항을 엄금함과 동시에 이의 금령을 어겼을 때 사형에 처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때 포르투갈인들은 히라도에서 데지마로 옮겨져 거주지를 떠나지 못하게 했으며, 데지마를 출입하는 사람들도 제한했다.

1637년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이 돼 일으킨 시마바라 반란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배후에 포르투갈이 원조하고 있다고 생각한 막부는 1939년 포르투갈 배의 내항을 전면 금지하였다. 그리스도교의 포교활동이 결국 포르투갈의 침략을 유발할지 모른다는 확신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포르투갈과의 국교 단절 후 무역 창구를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로 제한하였고 무역 상대도 중국, 네덜란드에 국한시켰다. 일본의 포르투갈과의 외교 단절은 네덜란드의 음모라는 흉흉한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실제로 막부가 네덜란드를 편애한 것은 네덜란드인들이 포교 허가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위험성을 막부에게 강조하여 위기의식을 자극한 때문이었다.

단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저지른 음모였다. 네덜란드의 독점 상태는 1853년 페리 내항까지 약 215년 간 지속되었다.   

이것으로 일본의 쇄국정책은 완성되었지만 그래도 일본에는 4개의 무역 창구가 남아 있었다. 나가사키는 네덜란드와 중국(청), 쓰시마(對馬島)는 한반도 조선, 사쓰마(薩摩)는 오키나와(琉球), 마쓰마에(松前)는 산단(山丹, 청나라 흑룡강 유역)과 교역하여 큰 이익을 남겼다. 특히 조선과 류쿠(琉球)는 도쿠가와家 쇼군이 교체될 때마다 축하사절을 보내었고, 막부 또한 이들을 정중히 대우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막대한 재정 부담으로 큰 고충을 겪어야만 했다.       

   
 
 

기타가와 우타마로 남국의 미인. 목판화

 
 
문화 접경 지역, 데지마(出島)
하멜에게 조선은 감옥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은 책봉과 교역관계를 유지했던 중국, 일본과는 달리, 조선의 안위를 위해 교린 관계가 없는 나라의 서양인들을 송환하지 않는 원칙이 있었다. 동인도 회사의 명령을 수행하던 하멜에게 조선의 표착은 커다란 충격과 좌절을 안겨주었다.

하멜은 1627년 제주도에 표착하여 조선인이 된 벨테브레(박연)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여자와 결혼하여 조선의 관리로 사는 것이 두려웠다. 생존의 공포 위에 인종, 언어, 종교, 생활 습속이라는 높고 높은 문화의 장벽이 더 둘러쳐졌다. 적어도 동인도 회사의 상업 거점이랄 수 있는 상관(商館), 즉 요새가 있는 바타비아, 젤란디아, 나가사키는 언제나 그들만의 네덜란드가 있었고, 그곳에서는 언제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그렇지만 조선은 기약할 수 없는 미지의 땅으로서 적어도 자신들의 식민지가 되기까지는 귀화(歸化)의 기회는 있되 귀국(歸國)의 보장은 없었다.
하멜이 그토록 염원하던 나가사키 데지마. 일본의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통로인 데지마(出島)는 나가사키에 있는 약 5000여 평에 달하는 인공섬이다.

그리스도교의 포교가 두려운 막부는 1639년 일본에서 모든 포르투갈의 배를 쫓아내고, 2년 뒤인 1641년, 히라도(平戶)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商館)을 데지마로 옮기도록 하였다, 섬에 다리 하나를 만들고는 출입사무소를 개설해 일본인과의 교류를 엄격하게 통제했다.

데지마 주위는 사방으로 담장을 둘렀는데 일종의 격리된 장소를 만들었다. 이곳에 올 수 있는 사람은 지정된 상인과 창녀였다. 특히 네덜란드인들이 일본인 창녀들과 눈이 맞으면 장기 체류도 가능 했으나, 사랑이 끝나고 나가사키로 돌아갈 때는 반출품에 대한 검색이 매우 심했다.

문화에는 장벽과 만남이 동시에 존재한다. 문화의 장벽은 시간이 갈수록 만남에 의해 서로 동화되거나 거부되기도 하지만 아예 혼합되기도 한다. 일본의 개국시 서양문화에 대한 충격의 완충작용에는 이 나가사키를 통한 동서 문화 교류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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