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침·뜸 명인 구당 김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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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당(灸堂) 김남수는 1915년 전남 장성군 출생. 열한살때부터 부친으로부터 의학과 침구학을 전수받았다. 1943년 서울에서 남수침술원을 개원,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 베이징침구골상학원 객좌교수(93년), 경희대체육대학원 강사(96년), 대한침구사협회 입법추진위원장(96년), 정통침뜸연구소 원장(98년), 녹색대학원 석좌교수(2000년) 등을 거쳤다. 남수침술원 원장·뜸사랑회장·뜸사랑봉사단 단장·정통침뜸교육원장·정통침뜸연구소 이사장·효행봉사단 회장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 「뜸의 이론과 실제」 「생활침뜸의학」 「나는 침과 뜸으로 승부한다」 「평생 건강을 위한 침뜸이야기」 등과 10여권의 교재가 있다. | ||
# 김남수 신드롬에서 '거리의 침뜸전도사'로
침 한통 쑥 한줌이면 세계 어디를 가나 자신만만하다는 사람. 침구사 구당 김남수.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로 그는 뿌리치기 바쁘다. "제발 뜸자리 하나 표시해 주세요." 제주도 어느 식당에 들어섰을 때였다. 김남수 신드롬에 온 나라가 들썩였다. KBS가 지난 추석특집 '생로병사의 비밀'편에 '구당 김남수선생 침뜸 이야기'를 내보내자 소문은 더 발을 달고 나간 것. 각종 인터뷰와 방송에서도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구당의 침과 뜸의 효험을 보여준 방송이 나가자 강화 쑥이 다 동이 났다. 12년 전 발간된 그의 저서 「나는 침뜸으로 승부한다」는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뜸자리잡기 행사를 펼치자 3000여명이 몰려들어 난리가 났다. 특히 가장 놀랐던 것은 화상침. "화상을 입은 지 한 달이 되는 환자가 찾아왔어요. 침치료를 했더니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흰쥐를 통해 임상실험도 했지요." 그가 개발한 무극보양뜸은 구당 침뜸의 핵심으로 8개 경혈(여성은 13자리)에 쑥을 쌀알 반톨 크기로 매일 한자리에 3~5장씩 뜸을 뜨는 뜸법인 생활양생법이란다.
그의 호 구당은 '뜸집'이라는 뜻. 그의 침뜸시술은 '생로병사…'이전에도 이미 나라 안팎에 두루 알려진 일. "김영삼 전 대통령도 '침한번 집'이라며 소문을 확인시켰고, 정·재계 인사들이 구당의 치료를 받았다. 침뜸 받고 그를 칭송하는 시인 김지하, 작가 조정래, 송해씨를 비롯한 유명인들, 그를 경험한 사람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수영선수 박태환도 발바닥 티눈을 그의 시술로 제거했다. 70여년 동안 구당 선생이 치료한, 수십만명에 이르는 임상사례에 중국 중의학계는 구당 선생을 '현존하는 세계 최고 유일의 신침'이라고 주저없이 명명했다한다.
그런 그가 '거리의 우리문화운동가'가 되어 제주도에 왔다. 어째서 100세를 바라보는 그에게 사람들이 매달리는 것이며, 어째서 그를 구당이 되게 하였으며, 거리의 운동가가 된 것인가.
# "침구사 제도 부활해 치료받을 권리 보장을"
화려한 조명만큼 시련은 이어진다. 자격증이 문제. 일제강점기 때, 침사는 있어도 뜸자격증은 없었다. 방송후 개원한의사협회에서는 그가 '구(灸·뜸)사' 자격증 없이 '침(鍼)사' 자격증만으로 불법 뜸치료 행위를 했다며 고발했고, 결국 의료법 위반으로 10월 1일부터 11월15일까지 자격정지 처분을 받은 것. 이어 '침뜸 치료를 받기 원하는 환자들의 모임'은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는 침구사 제도를 부활해 환자들의 치료받을 권리를 보장하라"고 주장한다. 기자회견에서 구당은 당국의 자격정지 처분이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구사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면 우리나라에 뜸을 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1943년 침술원을 연 이후 지금까지 65년 동안 자격정지를 받기는 처음이죠. 이미 유럽에서는 대안의학으로서 침과 뜸이 연구되고 있지요." 구당은 광복 이전에 침구사 자격증을 땄다. 현재 살아 있는 침구사는 100명 정도지만 거의가 노쇠해서 직접 시술하지는 못하는 실정이란다.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전승되어온 전통의술의 기본은 흔히 '일구이침삼약(一灸二鍼三藥)'. 뜸이 첫째, 침이 둘째, 그래도 다스려지지 않을 때만 약을 썼다는 의미다. 상식으로 통용되던 이 '일구'와 '이침'이 광복 후엔 '삼약'에 밀려 수난을 당했지요."
1951년 우리나라 국민의료법이 공포될 때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는 의료업자로, 접골 침술 구술 안마술사는 의료유사업자로 나누어져 자격시험 규정이 1960년에 생기긴 했으나 한번도 시행되지 못한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료법을 개정하면서 의료유사업자 규정을 완전 삭제해버린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는 해방 후 정식 침구사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지만 미국은 1975년에 침구면허가 생겼다.
"서구는 대체의학, 서양의학 통합의학으로 가고 있지 않아요? 보건복지부도 답답한데 답이 안나오는 것이지요. 제도화 해야 하는데 시간만 끌고 있지요." 그에게서 배운 뜸사랑 봉사회원들은 5000명 정도. "뜸사랑은 배워서 남주자. 봉사하자는 단체죠. 요즘은 만성질환이 많은데 전부 아픈 사람들이 치료하러 왔다가 배우고 치료해요. 똑같이 일해요. 붕어빵처럼."
# 침통하나 쑥뜸 한줌 전통의학 자긍심
"부모가 침뜸을 알면 좋지요. 가족끼리 정도 더 생겨납니다. 옛날에 어렸을 때 떴던 사람이 오래 살아요. 젖먹이는 목 뒤에 있는 신주혈 한군데만 뜸을 떠주면 잘 자고 잘 놀아요. 밤만되면 보채며 우는 야명증도 신주에 뜸 몇장 뜨면 신기하게 딱 그쳐요." 그는 자녀들은 물론 손자들이 어렸을 때부터 침을 놓고 뜸을 떠왔다. 태어나 열흘에서 닷새, 가장 빨리 뜬 손자는 이틀만에 떴는데 감기한번 없이 잘 자란다. "우리의 전통의학은 문화였습니다. 우리 문화는 돈벌이가 아니었습니다. 옛날에 의사가 있었습니까? 민간에서 그냥 고쳤죠." 대체의학? 서양에서는 우리 것을 쓸 때 대체라는 말을 쓰는데 우리는 우리 것을 놓고 대체라는 말을 쓰면 안된단다. "의료인의 첫째 목적은 병고치는 것 아닙니까. 의사가 침을 놓아 치료하면 무기징역 한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가지요" 단호하다. 그의 아들 딸도 그에게서 침구를 배웠다.
"서양의학이 발달해도 장비가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침통 하나만 갖고 가면 세계 어디를 갈 수 있어요.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두 팔이 없어도 조금 위에다 아래에다 꼽아라. 입만 가지고도 할 수 있어요. 부작용이 없기 때문에. 첫째 법을 만들때 부작용 때문이라지만 잘못되면 처벌하는 법만 만들면 되요. 돈이 없거나 마음이 못났거나 가난하거나 어떠한 사람도 아무한테라도 다 할 수 있어요. 좋은 의학이니까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 하자는 거지요. 뜸사랑도 지금 65세이상 생보 대상자들 15만명에게 봉사하고 있어요. 제주도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특구를 만들어야해요. 침뜸으로 건강 찾을 수 있고, 이 아름다운 자연도 즐기고 간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의 평생 꿈은 우리나라에서 침구사 자격제도를 부활하고 침구교육이 이뤄져 아픈 사람없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늙어서 중요한 건 남의 신세 안지고 사는 것이예요. 노인들을 돌보는 뜸사랑도 그래서 만들었죠."
# 열한살때부터 시작, 고 장준하선생과 인연도
구당은 고 장준하 선생이 당시 실족, 죽음을 맞았다는 기사를 읽고 놀랐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지금도 의문이다. 그에게서 디스크치료를 받으며 효험을 얻던 중이었다. "나처럼 홍릉에 살고 있었지요. 생활이 곤란해도 신세질려고 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산에서 실종돼 죽었다는데 이상했죠. 침을 맞고 많이 좋아졌으나 산에 갈 정도는 아니었어요. 어떻든 조금이라도 나았을까? 의문사조사관들이 찾아와서 물어보고 그래요. 조사관들이 가져온 것은 뜸자리에 무슨 주사라도 논 자리가 아닌가 해서 갖고 와서 의심했는데 뜸자리예요. 그건 오래되어도 희미한 자리가 남아요. "
그가 침뜸의 치유학을 믿게 된 것은 열한살 어린 시절, 선친으로 부터였다. 부친은 동네 의사였다. "노인들이 와서 치료하고 간다든가하면, 아, 나도 저렇게 늙었을 때 어떻게 할까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거든요." 그는 적당히 먹어야 산다며 가리는 음식도 없다. 반드시 소식하지도 않는다. 아침 여섯시, 점심 열두시, 저녁은 여섯시. 식사시간만은 정확하다. 스스로 '뜸'뜨면서 10여분 토막잠을 자는 것이 건강비결이라면 그럴 것이다.
산전수전 겪어오는 동안 그도 한때 하루 세갑이상 담배도 피웠었다. "눈만 뜨면 물고 있는거죠. 가계가 술은 안먹었지만." 잔병치레를 하던 약골이었다는 그는 스물한 살 때까지 두드러기가 나서 그것을 없애려고 별 노력을 다 했고, 뜸을 뜨면서 많이 없어졌단다. "나는 음료수 하나도 약이라곤 전혀 안먹습니다. 한약? 보약 안먹고 죽은 사람은 없지만 밥 안먹으면 죽어요. 생명있는 것은 다 먹어야 살아요. 병이란 결국 균형이 무너져 생기기 때문에 무너진 흔적이 몸 어딘가에 반드시 있게 마련이죠. 침은 기운을 움직이고, 뜸은 피를 움직이게 합니다."
잘 말린 쑥과 선향으로 불을 붙여주기만 하면 끝인 쑥뜸. 그러나 그 뜸자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아프던 사람이 '허리가 펴진다'는 말을 들을 때 이보다 행복할 수 없다는 사람. 뜸을 매일하면 피로를 모른다는 사람. 구당 김남수.
"아흔살 넘은 노인에게 무슨 욕심이 있겠어요. 다만 수천년 이어져온 우리 침뜸의 맥이 끊기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예요."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