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랑도 명확한 위치 알수 없어 조선·중국 국경 인접한 곳 추정

   
 
 

대만 원주민의 사슴사냥. 대만역사언어 연구소장

 
 

가난은 도적을 만든다

해적(海賊)을 두고 '그들의 호소력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도 공포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있다'는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약한 자란 없는 자들이다. 없기 때문에 약한 것이고, 없을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기에 없게 된 것이다. 없는 자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도적질 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 준다. 착취·차별·멸시·빈곤·기아는 그 도적질의 원인이었다.   

해적의 이미지는 도적(盜賊)의 이미지와 별반 다르지가 않다. 도적이 주로 땅의 흉악범이라는 이미지로 귀착된다면, 해적은 바다의 흉악범으로서 거친 바다만큼이나 공포의 대상으로 남는다. 도적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18세기 호니골드 해적선단의 선장이었던 샘 벨러미의 말처럼 "귀족들은 법의 보호막 아래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하는 반면, 우리들은 자신의 용기를 방패로 하여 부자들을 약탈하는 것이다" 라고 하여 해적의 정당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또한 장길산과도 같이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의로운 도적(義賊)'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도적 행위라도 해당 사회로부터 사회적 정당성을 얻기는 매우 힘들다. 도적행위가 국가 법률로 정하는 범죄 행위라는 점에서, 특히 법률을 정한 해당 사회는 권력, 질서, 도덕의 유지라는 차원에서 이에 대한 어떠한 상황이나 정당성도 고려하거나 용납할 리가 없다.

그러나 법률이 강력한 만큼 도적의 발생에 대한 근본적인 예방 조치는 거의 모든 사회의 딜레마로 남았다. 도적의 발생 원인에 대한 예방책이 미약할수록 범죄의 생산은 증가한다. 빈곤을 조장하고 범죄를 방치하는 사회는 항시 진보된 사회를 꿈꾸게 만든다.  

토마스 모어(S.T. More, 1478~1535)는 도둑이 발생하는 사회적 배경을 "도둑질을 한 자에게 강력한 법률을 적용하여 사형제도를 도입한들 도둑은 줄어들지 않는다. 농사지을 땅이 없는 농민들과 일자리가 없는 시종들은 몇 명의 부자들이 경작지를 과점(寡占)했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적인 부랑자가 되어 최후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도둑질을 해서라도 목숨을 부지한다'고 했다.

15세기 양모(羊毛) 사업에 주력하여 농토를 목장으로 바꾸면서 토지를 독점했던 영국 사회를 풍자한 말이다. 확실히 동·서양을 막론하고 땅은 최후의 삶의 보루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관념을 갖고 있다. 봉건시대에 최소한이라도 경작할 땅이 없는 사람들은 유랑민이 되기 마련이며, 유랑민이란 머물 주거지도 먹을 양식도 부족하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을 것이며, 사회는 그들로부터 범죄의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땅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토적(土賊)이라고 했고, 바다에서 난을 일으키거나 약탈을 일삼는 사람들을 해적(海賊)이라고 병행하여 쓰고 있다.

다산 정약용은 역사 기술의 문목(問目)에 삼별초(三別抄)를 '해적고(海賊考)'에 분류하고, 이시애(李施愛, ? ~ 1467)와 이괄(李适, ? ~ 1624)은 '토적고(土賊考)'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별초는 고려 최씨 무신 정권의 군대로서 몽고 세력에 난을 일으켰다가 제주도에서 최후를 맞이한 군대였다.

이시애는 세조때 무관 출신이며 길주(吉州)의 호족으로서 북도(北道)의 인사(人事) 차별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이괄은 인조때 문장과 필법에 능한 무관으로서 인조반정 때 공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차별을 받자,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서인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한치윤(韓致奫)의「해동역사(海東繹史)」에도 삼별초의 수장(首將)이었던 김통정(金通精)을 해적(海賊)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들의 명칭이 땅과 바다라는 위치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흉악범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오늘날 삼별초가 항몽의 선봉장이 되어 구국의 항쟁을 벌인 것으로 신성시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와 같이 정사(正史)란 헤게모니를 갖는 사람들의 기록이며, 그들의 당위적인 시각이자 주장이라는 사실이 역력하다. 역사는 항상 승리자들의 기록이었다.

   
 
 

중국 동남해안의 해랑도

 
 
도망자들의 섬, 해랑도

해랑도(海浪島)는 해양도(海洋島)라고도 하며 조선 정부를 늘 곤란하게 만든 섬이었다. 명확하게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조선과 중국의 국경에 인접한 섬이라는 사실이외에는 확인할 길이 없는 곳이었다.

성종 23년(1492) 의금부에서 '평안도'와 '제주의 백성'들이 해랑도(海浪島)로 도망간 자가 많아서 관원을 보내어 체포해 오라고 아뢰자 상(임금)과 대신들은 해결책에 대해 논의를 했다. 대신들은 해랑도가 우리나라 땅이 아니라 중국 경내에 있는 듯하여 국경 문제가 발생할까 고심하였다.

즉 해랑도는 요동 지경에 있는 섬이지 우리나라 절도(絶島)는 아니며, 거리 또한 멀고 섬이 많아서 어느 섬이 해랑도인지 알지 못하는 것도 골칫거리였다. 어렴풋이 아는 사실이 있다면, 평안도 장연현(長淵縣)으로부터 표류하여 주야로 8일만에 해랑도에 이르렀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논의 결과 중국 요동에 외교문서(咨文)를 보내어 협의하여 해결하자고 일단락 지었다.

해랑도에는 물소가 살고 있는 것 같다. 1494년에 해랑도에 가서 물소를 잡아오는 자에게 엄한 중죄를 내릴 것을 공표하였으나 성종 25년(1494)에 의금부에서는 물소를 잡아온 범죄인을 체포했다고 보고하였다. 의금부에 의하면, '양인(良人) 장잉질동(張芿叱同) 등이 금령(禁令)을 어기고 해랑도에 들어가 물소 말린 고기(水牛脯) 2070첩(帖), 물소 가죽 101장(張), 곡물 80석을 취하여 실어온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 죄로 그들 중 주모자인 장잉질동(張芿叱同)은 교대시(絞待時)로 다스리라고 간언하고 있으나, 앞서 해랑도를 왕래했던 자의 형률이 '장(杖) 100대에 도(徒:징역) 3년으로 결정된 바가 있고, 어리석게도 무지(無知)한 백성이 막힘이 없는 물길의 국경을 넘었다하여 사형만은 감해주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부터 해랑도에서 물소를 잡아온 자는 사형을 받지 않게 되었다.   

교대시(絞待時)란 교수형에 해당하는 사형제도로서 하늘의 때를 기다려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때는 춘분(春分)으로부터 추분(秋分)을 말하는데, 사형은 만물이 자라는 이 시기를 피하여 추분 후부터 춘분 전에 집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십악대죄(十惡大罪)인 모반(謀反)·모대역(謀大逆)·모반(謀叛)·악역(惡逆)·
부도(不道)·대불경(大不敬)·불효(不孝)·불목(不睦)·불의(不義) 등은 때를 기다리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였다.

사형은 중죄인만큼 보다 더 신중을 기하기 위해 세번을 반복적으로 심리하여 죄를 확인하는 '삼복(三覆)'절차를 거쳐 집행하였다.

해랑도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형률 때문에 적어지고 아예 그곳으로 도망가서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다시 조정은 그곳의 도망자들을 어떻게 데려올 것인가라는 문제에 봉착했다. 중국 요동에 해랑도 수색에 관한 외교문서를 보냈으나 답신도 없자, 공문을 재발송하여 다시 답신이 없을 때에는 중국 황제에게 직접 요청을 해보자는 의견을 모았다.

연산군 4년(1498), 해랑도에 사는 조선 사람이 90여명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후 조정은 관압사(管押使) 이손(李蓀)을 요동으로 보냈다. 이손은 요동의 관원에게 말하기를 해랑도에 부역(賦役)을 피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간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 50여 가구나 된다고 하여 이들을 조선으로 데려가고자 요청을 했다.

그러나 해랑도 주변 도서는 중국에서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요주의 섬들이었다. "해랑도는 중국 금주(金州)·개주(蓋州) 2위(衛)에 속한 동·남해 72개의 섬 중에 있는데, 해랑도(海浪島)가 제일 커서 주위가 3백 여리나 되고, 관(關) 밖에 25위(衛)에는 강도, 살인, 강상(綱常)을 범한 중죄인들이 수없이 잠입하여 거의 1000여 호에 달하며, 그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노루·사슴·해양피(海洋皮)·어육(魚肉)을 팔고, 혹은 연해(沿海) 주민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있으며, 조선 사람도 자주 왕래하여 장사를 하는 이익으로 살고 있다"고 요동의 관원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다시 해랑도 사람들에 대한 수색 작전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1명의 초무사(招撫使)와 1명의 종사관을 파견할 예정이었으나, 이미 중국조정에 알려진 마당에 경솔하게 일을 처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파견 인원을 초무사 1인, 부사 1인, 종사관 6명, 왜(倭), 여진(女眞), 한학(漢學) 통역을 담당할 관리들과 군사들, 해랑도의 지리를 잘 아는 장사꾼을 데리고 가기로 결정하였다. 얼마 없어 중국황제로부터 해랑도를 수색해도 좋다는 칙서가 도착했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고침 : 2009년 1월 14일 수요일자 제37회 '질병과 문명'에 사용했던 '나병'이라는 용어를 '한센병'으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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