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유배인 김정
「풍토록」 제주 문화·풍속·기후 담겨
김정, 제주로 유배후 사약받아 숨져

   
 
 

풍토록에 나오는 돌담과 귤.

 
 

 

제주에서 사약 받은 김정

"골육(骨肉)이 멀리 격리되고 친지의 소식도 아득한데, 옛날 함께 놀던 이로써 벌써 죽은 이가 많으니 하늘가에 붙인 외로운 이 몸이 얼마나 더 세상 변고(變故)를 맛볼 것인가. 삶과 죽음을 늘 먹던 마음으로 태연히 순리(順理)로 받아들이려고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문득 생각이 이에 미치면 또한 처량한 느낌이 없지 않구나."

이 글은 김정(金淨, 1486~1521)이 지은 「풍토록(風土錄)」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는 죽음을 앞둔 자의 스산한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이「풍토록(風土錄)」은 유배인이 쓴 최초의 제주풍토에 관한 글로써 당시 제주를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풍토(風土)라는 말은 '지방의 기후와 토지의 상태' 혹은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간생활 전체'를 지칭한다. 김정의 「풍토록(風土錄)」은 제주의 문화와 풍속, 기후 등을 유려한 필치로 수필처럼 서술한 글이다. 

김정의 자는 원충(元沖), 호는 충암(沖庵), 혹은 고봉(孤峰)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김정은 어린 나이에 대학(大學)등을 외웠고, 14세에 별시·초시(別試初試)에 수석으로 합격 했으나 스스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복시(覆試)에 응시하지 않았다.

과거의 문장은 배울 것이 못된다고 하여 주야로 성인들의 언행을 본받고자 노력하였다. 1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2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중종 10년(1515)에 순창군수(淳昌郡守)로 있을 때 중종의 첫 왕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의 복위(復位)를 청했다가 의금부에 투옥되었고 보은으로 도배(徒配)되었다.

중종 12년(1517)에 사면되어 부제학(副提學)에 발탁되었을 때 임명을 받은 것이 놀랍고 두려워서 사퇴할 것을 결심했으나 조광조(趙光祖)가 국사(國事)에 협력해달라고 글을 보내어 간곡하게 권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그 후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로 재직하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해를 입었다.

기묘년, 사화가 있기 전 여름, 김정은 형조판서를 사직하기 위해 글을 올렸다.
"젖비린내 나는 어린 아이로서 육경(六卿:육조판서)의 무거운 직책을 담당하게 된다면, 어찌 조정을 수치스럽게 하고 욕되게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김정은 '폐단을 개혁하고 교화를 일으켜 사업과 공적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라면 힘써 노력하였다.

더욱이 군자를 불러 나오게 하고 소인을 물리치는데 마음을 썼으나 건의와 시설을 행함에 있어서 서슬이 드러나고 갑작스러운 확장을 꾀하여 너무 서두르는 결함도 있었다. 이런 김정의 행동은 배척당한 묵은 대신들의 원한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가 변을 당한 것은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부당하게 참여한 정국공신(靖國功臣, 쿠데타에 도움이 된 공신)을 삭제한 까닭이었다'. 라고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전한다.

묘사화(己卯士禍)의 죄인이 된 김정은 자신의 감시인이었던 금산 군수 정웅(鄭熊)의 배려로 2일간 유배지를 벗어나 보은(報恩)에 살고 있는 어버이의 문병(問病)을 다녀 온 것이 문제가 되어 다시 사형에 처해졌으나, 보은에 다녀온 연유에 대해 자신의 옷을 세 번이나 찢어 상소를 올렸고,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의 도움으로 겨우 사형은 면하여 진도로 이배(移配)됐다가 1520년 8월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 되었다.

김정의 적거지는 성내(제주시) 가락천의 동쪽 해안이었던 금강사(金剛寺)라는 작은 서당이었다. 이듬해 조정의 대신들은 김정의 배소이탈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어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간언하자 중종은 이를 물리치지 못하고 그에게 사약(死藥)을 내렸다. 1521년 10월 17일, 향년 36세의 창창한 나이였다.

   
 
 

제주성내 오현로. 제주상공회의소 자료.

 
 
사회적 희생양, 사화(士禍)

사화(士禍)란 '선비들이 화(禍)를 당했다'는 뜻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란 기묘년(1419) 11월에 심정(沈貞),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 훈구재상(勳舊宰相)이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 젊은 선비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모함 사건을 말한다.  

연산군의 문란한 정치를 참다못한 중종은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오르자 과거 정치의 쇄신을 위해 연산군 때 쫓겨난 신진사류(新進士類)를 등용하여 대의명분을 세우고자 성리학을 장려하였다. 이 때 등용된 사람이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김종직(金宗直)의 수제자인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서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중종10년(1515) 조광조는 성균관 유생(儒生) 200여명의 연명(連名)과 이조판서 안당(安塘)이 천거로 곧바로 종6품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 후 중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1518년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여 요직에 두루 배치하였고 조광조 자신은 38세에 대사헌(大司憲)이라는 관직에 올랐다.

성리학을 중시하여 고려시대부터 전통으로 내려온 사장(詞章:詩文)의 학문을 배척하였기 때문에 남곤(南袞), 이행(李荇) 등 사장파(詞章派)와 제도, 풍속, 습관마저 고치려고 하는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훈구대신인 정광필(鄭光弼)과도 대립하게 되었다.

또한 조광조는 중종반정 때 공신으로 인정받은 관리들 가운데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을 공신에서 제외시켰다. 이에 위기를 느낀 훈구대신들은 조광조 일파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였고, 이들의 행동은 후일 젊은 선비들이 화를 당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李弘植, 1985)

특히 조광조에게 불만이 많았던 심정(沈貞), 남곤(南袞) 등은 훈구대신인 홍경주(洪景舟)의 딸이 중종의 희빈(熙嬪)인 사실을 악용하여 '조광조가 공신들을 제거한 후 왕이 되려고 한다'고 헛소문을 퍼뜨렸고, 궁궐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을 써 개미가 갉아먹게 하여 하늘이 조광조의 반역을 알려준 것이라고 중종에게 보였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파자(破字)로 '走+肖=趙'라고 하여, 조광조(趙光祖)가 '爲王' 즉 '왕이 된다'는 내용이다. 이 모함사건으로 조광조는 사약을 받고 죽고, 김정 등 많은 관리들은 유배되었다가 사형되거나 자결하였다. 이들 모두가 30대라는 젊은 나이였다.

공동체는 종종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겉으로는 이 희생양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변신하기 때문에 매우 정치적인 습성을 띠는 것이다. 희생양은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표적이다. 희생양은 공동체나 집단의 위기 상황에 필요하게 되며, 권력 집단의 존속을 위해서 조작되는 것이다.

기묘사화는 비리와 부정에 얼룩진 훈구대신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려는 속셈에서 '왕위 찬탈'의 대역죄로 모함을 하여 개혁파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위기를 중지시키고, 공동체를 자기파멸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그 공동체의 분노와 원한 모두를 희생양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폭력의 광기들은 공동체의 한 구성원(희생양)에게로 수렴되는데, 사람들은 그를(희생양) 자신들이 직면한 무질서한 사태의 유일한 원인으로 간주한다. 그는 격리되며, 결국에는 모두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공동체 전체는 그 반대라고 믿는다…이 희생양은 집단 전체의 적이 되며, 이리하여 맨 끝에 가서는 집단은 다시 화해한다." 라고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말한다.   
       
개혁은 늘 보수로부터 저지를 당한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 대한 조광조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매우 놀랍다.

"조광조 등 사림이 언관(言官)으로 있을 때는 탄핵과 논박을 날카롭게 해 조정대신들이 지방(州縣)을 범할 수 없었고, 지방관들도 스스로 거두어 쓰니 백성을 침탈하는 병폐가 없어지고 조정에서도 뇌물을 쓰는 자들도 없어졌다. 그런데 사화(士禍)를 당해 이런 풍조가 무너지자 조정은 다시 뇌물이 횡행하고, 지방 군현(郡縣)도 그 바람을 타 어지럽게 되었다."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건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으나 훈구파들의 모함으로 그 꿈은 좌절되었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 이래, 크고 작은 사화는 조선의 수많은 인재들을 희생시켰다. 개혁은 언제나 보수로부터 저지를 당한다.

보수의 창고(倉庫)가 이권(利權)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방어하고 뭉친다. 보수는 자신들의 영화(榮華)의 구축선(構築線)이며, 개혁에 대한 저지선이다. 보수의 종말은 항상 부패로 끝난다. 부패는 보수라는 철옹성의 균열이며, 부패의 끝은 개혁의 시작이다.

부패와 비리로 점철되었던 훈구파의 집권은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면, 사림파에게로 권력이 이양된다. 당시 개혁파였던 사림파가 유교의 사상과 그 학통(學統)을 바탕으로 조직을 규합하여 정치세력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뭉쳤던 하나 또한 내부에서 다시 분열된다는 것을 역사는 가감(加減) 없이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어떤 사회 상태의 수준은 그 국가의 목적으로부터 쉽게 알 수 있다. 국가의 목적이란 삶의 평화와 안전 외에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어 생활하며 법이 침해되지 않고 준수되는 국가가 가장 좋은 국가이다. 소요, 전쟁, 법에 대한 경멸이나 위반을 신민(臣民)들의 사악함 탓으로 돌릴 수 없으며, 그것들은 국가의 가장 나쁜 상태에서 연유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시민권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은 만들어져야 한다."라고.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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