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인의 표착지 쿠로시오 해류 영향
제주 탈출 위해 일부러 표류 택하기도

   
 
 

중국 광동선 모형. 천주해외교통사 박물관 소장

 
 

바다를 개척하는 돛

새가 되어 하늘에 올라 한라산을 중심점으로 하여 동서남북으로 눈을 돌려보면 동아시아의 넓은 바다가 거대한 평원처럼 보일 것이다. 중국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류큐열도 안에 갇힌 이 바다를 평원으로 생각하여 배를 말처럼 몰았던 해양인들의 우여곡절은 아마도 역사의 기록이 미진할 정도일 것이다.

삶을 위해 죽음을 담보로 바다를 건넜던 사람들. 그 목적과 지위는 달랐을지라도 바다를 건널 때는 항상 한 마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언제나 삶의 뒤에는 죽음이 바짝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주도는 고대로부터 바다의 중간 기착지로서 지리상의 호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섬으로서, 혹은 쿠로시오 해류의 경유지로서 돛과 키가 부러졌을 때 표착지(漂着地)의 역할을 많이 했다. 제주도에 표착했던 배들은 주변국이 말해주는 것처럼 일본과 중국, 혹은 중국과 류큐, 서양 상관(商館)과 일본을 잇는 다양한 항로를 이용했던 배들이었다.

시대가 바뀌고 체제가 달라도 근대 이전까지는 이의 관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제주도 해양민 또한 이와 반대로 그들 나라의 표착민이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해양문화를 설명할 때 종종 해류(海流)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한다. 아니 절대적으로 해류(海流)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간과하는 것은 바로 바람을 이용할 수 있었던 시대에는 상대적으로 해류의 중요성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

돛의 발명은 해류에 의존했던 원시 항해의 소극성을 줄였다. 노의 시대는 돛의 시대에 의해 마감되었고, 돛의 시대가 열리면서 보다 더 먼 거리를 항해할 수 있었다.

이런 이점 때문에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무역을 위해서는 배의 크기 또한 대형화 되었다. 바람을 이용한 항해는 해류를 거스르며 항해할 수 있는 기회를 확장시켜 준 것이다. 바람의 동력을 이용했을 때 해류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바람을 기다려야하는 불편함과 계절풍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을 뿐이다. 그러나 해류에 의존하는 것은 바람의 동력을 상실했을 표류와 같은 경우였다.

돛은 범선의 생명으로서 항해 속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바람 방향의 적응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돛의 모양도 중요했다. 우리의 배와는 달리 서양의 돛에는 삼각돛과 사각돛이 있다. 삼각돛은 이슬람문명으로부터 유럽에 건너와 정착했고, 사각돛은 북유럽 범선들이  선호했다.

사각돛의 종류 또한 직사각형, 정사각형, 사다리꼴 모양이 있다. 15세기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쟁탈의 각축을 벌이는 동안 범선들은 삼각돛과 사각돛을 동시에 활용하여 한 가지 돛의 한계를 극복했다. 삼각돛은 방향이 자주 바뀌는 바람에 유리하고, 사각돛은 순풍에 적합하기 때문에 장거리 항해에서는 이 두 가지 돛의 장점이 필요했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바타비아호처럼 주돛은 사각돛(四角帆)의 돛대 3개이며, 보조 돛으로 삼각돛(三角帆)이 사용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쿠로시오 해류도. 고유봉외, 1998

 
 
해류에 운명을 맡기는 표류(漂流)

돛과 키가 말짱하면 해류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해류를 항해의 조건에 더욱 유리하도록 이용할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큰 배라도 배의 핵심구조이자 운항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돛과 키가 없을 때는 망망대해의 물결에 떠다니는 나뭇잎에 불과하다. 표류(漂流)란 무방비 상태로 바다 위를 떠서 흘러 다니는 것이다.

표류의 순간부터 사람들은 바다의 개척자가 아니라 바다에 운명을 맡긴 자연 상태의 순응자가 된다. 그리고 당장 물 부족과 식량 부족에 의한 생존의 위기와 싸워야 하고 갑작스럽게 바다에서 솟구치는 거대한 물고기의 공격도 피해야 한다.

아름답게 반짝이던 햇살도 온몸으로 달려들어 갈증을 불러오고, 밤이 되면 낮은 기온 때문에 추위에 떨기를 반복해야 한다. 표류에 방해가 되는 물건들은 버려야 하고, 설령 사람이 배안에서 병사하면 슬픔이 복받치더라도 남은 생존자를 위해서 그 동료를 바다에 버려야만 했다.

물론 이런 행위는 유교 국가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이들이 후일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이런 행위에 대해 죄를 받기도 하는데 이런 행위를 정당방위라는 말 대신 인륜으로 단죄(斷罪)하기 때문에 생존자들은 그 죄를 면하기 위해 서로 적당히 말을 맞추기도 하였다. 또한 고향에 돌아보니 자신의 헛묘를 만들고 장사지낸 경우도 있었다.

표류는 바다와 관계와 깊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류는 공무(公務)를 수행하기 위해 해협을 건너다가 발생할 수도, 연안에서 고기를 잡다가 조난을 당하거나, 상선(商船)을 운행하다가도 큰 바람을 만나 돛과 키가 부러져 이름 모를 섬에 다다를 수도 있다.

현재 기록상으로 전해오는 수천 건의 표류들은 그나마 송환된 경우이거나 확인된 것이지만, 기록에도 없는 표류자들은 그 수가 어찌 세월에 비례하지 않으랴. 적어도 조선의 외교적 영역이 미치는 곳에 표류했을 경우 수개월 혹은 수년의 지나더라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모르는 곳에 표착한 사람들은 그곳에서 살해됐거나 그 곳의 원주민으로 동화(同化)될 수밖에 없었다.

제주인의 표착지는 쿠로시오(黑潮) 해류와 관계가 깊다. 쿠로시오 해류는 북적도류(北赤道流)에서 발원하여 필리핀 르존도 해역을 시발로 대만, 류큐(琉球)열도 서쪽 끝  이시가키시마(石垣島)사이를 거쳐 동중국해의 대륙붕사면을 따라 작은 규모로 사행운동(蛇行運動)을 하면서 북동쪽으로 흘러든다.

이 해류는 다시 가고시마현 야쿠시마(鹿兒島縣 屋久島) 서쪽 약 185㎞부근에서 동쪽 혹은 동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도가라 해협을 거쳐 일본 태평양 연안으로 흘러가는 고온고염(高溫高鹽)한 대해류(大海流)이다. 동중국해에서의 이 해류의 표면 흐름은 1~3노트이다.

1월~3월에 평균 1.0~1.7노트이고, 7~9월에는 1.8~2.9노트인데 여름철에 보다 빠른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이 쿠로시오의 분파인 대마난류(對馬暖流)는 큐슈 서쪽을 따라 북상하면서 동중국해로부터 동쪽으로 확장하는 중국대륙연안수와 혼합되면서, 일본 고토(五島)와 제주도 사이를 통해 대한해협·동서수도(東西水道)를 지나 한국 동해로 유입되는 해류이다.

그리고 황해난류(黃海暖流)는 제주도 서쪽 또는 제주도 남서 해역에서 출현하는 대마난류수(對馬暖流水)로부터 황해에 유입되는 난류를 뜻한다. 이 난류는 겨울철에 제주도 서쪽 해역에 넓게 분포하는 대마난류로부터 분리하여 황해의 중앙부를 거쳐 중국 산동반도를 향하는 흐름을 취하지만, 여름철에는 제주도 남서 해역에서 추자도와 소흑산도 부근 해역을 거쳐, 대흑산도 주변을 지나 한국 서해 연안해역을 따라 북상한다.

이와 같이 반년(半年)을 주기로 황해난류의 흐름 경로가 바뀌는 것은 황해난류가 겨울철과 여름철의 계절풍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라고 한다(노홍길외, 1998). 한 예로 18세기 문헌「탐라문견록(耽羅聞見錄)」에 기록된 표착지들을 보면 이 쿠로시오 해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알 수 있다.

이 문헌에 의하면, 표류지점은 거의가 제주도와 추자도, 화탈도 등 제주도 근해였고, 표착지는 안남(安南, 베트남), 대만, 일본 열도(翠芳島, 薩摩 屋鳩島, 五島 手羅島, 梁九島, 筑前州神功浦), 대마도, 琉球(류큐), 조선(加羅島)이었다.

또한 이 해류와 관련하여 타국의 배가 제주에 표착한 경우를「지영록(知瀛錄)」을 통해서 상고(詳考)하면, 중국 남경, 복건성, 향산도(香山島, 홍콩), 광동성, 강남성, 안남(베트남), 절강성, 일본, 대마도, 네덜란드(하멜, 일본행) 국적의 배들이었다.   
 
가작표인(假作漂人), 고표(故漂) 

표류의 역사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용어가 하나 있다. 거짓으로 꾸민 표류인이라는 뜻으로 '가작표인(假作漂人)'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즉 이것을 '고표(故漂)'라고도 하는데 '고의로 표류(漂流)한다'는 뜻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스스로 표류를 자청한다는 말인가.

실제로 조선의 섬사람들이 이 고의적인 표류의 주인공들이었다. 이들은 표류자들을 후하게 대우한다는 것을 알고, 차라리 섬에서 사는 것보다 목숨을 바쳐 표류했다가 돌아오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생각하여 '가짜 표류자'가 된 것이다.

실제로 정약용은, "순조 9년과 순조 14년에 섬 백성이 거의 다 흩어졌는데 그 약삭빠른 자는 조각배에다 부모와 처자를 싣고서 표류당한 사람으로 거짓 꾸며서 일본에 들어가 손님으로 접대 받고 구제하는 양식을 받았는데, 송환되어 돌아오는 동안에 문득 보리가 익어 마침내 열 식구가 온전하게 된 자가 많았다.

그런데 이런 길이 한 번 열리면, 뜻밖의 걱정이 끝이 없게 된다."라고 하면서, 이런 문제가 섬 백성을 약탈하는 탐욕스런 섬의 현령(縣令)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연행사(燕行使) 서경순(徐慶淳, 1804~ ?)도, 철종 6년(1855) 11월 21일에 제주사람들이 배를 타고 미역을 따다가 5일 만에 풍랑을 만나 강남에 표류했다가 제주로 귀향하고자 했으나 비적(匪賊) 때문에 시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서 문답하였다. 서경순(徐慶淳)은 표류와 관련해서 말하기를 "제주사람들이 풍랑에 표류하게 되면, 그 이익이 미역 따는 것보다 몇 갑절이나 된다.

10여 년 전에 제주 사람 고(高)가란 자가 처음 강남에 표류하여 관(館)에 있을 때는 후하게 먹이고 올 적에는 수레를 태워주어, 제집에 돌아오니 은자(銀子)가 자루에 남아있어서 1, 2년을 살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것을 기화(奇貨)로 그 뒤부터는 일부러 조그마한 배를 타고 큰 바다에 떠서 표류되기를 무릇 5차례나 있었으므로 제주목사가 그 속셈을 알고 법에 의거해서 다스린다고 하였다.

" 제주사람들이 가짜 표류의 삶을 택한 것은 본질적으로 섬의 삶이 노예의 삶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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