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제주돌문화공원 총괄기획 백운철

 "환경을 우선하는 돌문화공원과 돌에 대한 완벽한 이해력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 사람은 멕시코출신 건축의 거장 리카르도 레고레타였다. "돌문화공원에서 태고적 문명 세계를 연상했다"고 한 사람은 중국의 세계적인 작가 위화였다. 생전의 미술사가 최순우도 추상미에 감탄한 그 제주의 돌이다. 어느 밝은 망막엔 삶의 쓸쓸함과, 황량함이, 돌산을 일구거나 돌밭의 삶을 살다간 제주인의 정신과 미덕과 지혜까지 들어온다. 둥근 바농오름이나 달덩이도 풍덩 잠기게하는 하늘연못 앞에선 누구도 탄성을 지르게 되는 곳, 그 곳은 참 많은 제주도를 품고 있다. 제주돌문화공원 총괄기획팀장 백운철. 무려 100만평의 황무지에서 제주의 속살을 먼저 느끼고, 몸으로 이곳의 바람과 이곳의 온갖 곡절까지 발견했던 사람이다.

   
 
 

 백운철은

 1944년 제주출생. 제주돌문화공원 총괄기획. 1966년 서울예술대학 연극연출과 졸업. 1971년  탐라목석원 개원(전신은 목물원). 1972년 조록형상목 20점 제주도기념물 25호로 지정. 1988년 프랑스 파리 '영실'사진 초대전. 1994년 파리 콜베르갤러리에서 108인 현대사진대전에 돌사진 출품.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진국에 흑백사진 200점 소장. 1999년 1월 조천읍 교래리 산119번지 100만평 부지에 제주돌문화공원을 20년간 조성키 위해 구 북제주군과 탐라목석원 협약 체결. 2000년 1월 30여년간 수집한 자연석, 민속품 1만4000여점 무상기증. 2001년 9월 프랑스 문화부 문화재관리국 연간지 '기념비적인 것 2001'에 목석원 선정. 2008년 3월 탐라목석원 지상전시물 일체, 제주돌문화공원에 무상기증. 저서로 흑백사진집 「영실」 「토우」 「목석원에서 만난 사람들」 등 10여권.

 
 
그는 그 곳의 다섯 평 콘테이너같은 공간에 산다. 평생 자유인이었던 그가 행정과 결합해 돌문화공원을 조성하는 동안 그렇게 살고자 한 삶이다. 그는 간혹 행정과 사소한 것들, 시시한 것들과 싸운다. 억새를 비네 마네, 돌멩이를 치웠네 말았네, 풀 한포기 나무 한포기를 두고 싸운다. 결국 대지의 편이다. 개장 3년째. 돌문화공원은 민과 제주도가 합작품으로 빚어내고 있는 제주도의 작품이다. 뼛속까지 제주의 돌에 빠진 사람, 탐라목석원 백운철 원장이 민이다. 그는 요즘 다음 단계로 돌문화공원의 핵심사업이자 그의 40여년 사유의 결실이라는 설문대할망 전시관에 매달리고 있다. 그는 왜 이토록 끈질기게 여기에 매달리는가. 설화속의 설문대할망 짝사랑에 목메이는가. 그를 만났다.

# 설문대 할망 전시관이 핵심사업

키 큰 자랑을 하던 신화속의 창조여신 설문대할망. 그녀는 밑이 터진 물인줄도 모르고 물장올에 빠져죽었다고도 전한다. 여신은 태평양을 떠다니고 있고, 태양을 향해 누워 있을 터이다. 음양의 법칙인고로. 그 바다위 설문대할망을 안아다 초지에 눕혀놓는다. 외곽선만 그려서. 몸은 용암이 흘렀던 지하 깊은데로 누이고, 한라산 실루엣을 닮은 그녀의 머리는 자연 한라를 향해 펄럭이고, 다리는 서쪽으로 뻗게 되리라. 지상에서 돌문화공원 전통초가를 본 이들이 그녀의 귀로 들어가 심장에 이른다. 거기엔 제주에서 탄생된 문화의 원류가 보일 것이다. 조선시대 '탐라순력도'를 중심으로 제주도가 배태한 문화예술이, 제주 작가들의 예술혼을 상상하게 하는 작품들을. 두 발엔 각각 남성과 여성의 문화를 담게 될 것이다.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설문대할망에 꽂혀 해마다 5월15일이면 그녀를 위한 제까지 지내는 사람 백운철, 이것은 그의 상상력이 이룩한 돌문화공원 내 설문대할망전시관에 대한 조감도이다. 지하 2만평. 설문대할망 와상은 대지 속으로 숨는다. 이 꿈을 품고있던 세월? 40년이란다. "맨처음 목물원을 만들고 연극하면서부터 설문대할망 얘기를 들었지요. 아파서 어머니와 함께 간 영실에서는 오백장군의 실루엣을 보면서 오백장군을 세우리란 꿈을 꾸게된 것이죠. 목석원도 그렇게 연출한 것이고, 다음 단계는 돌문화공원이었죠. 제주도 전체가 우리것이 없어져가고 망가져가니까. 설문대할망을 크게 키워서 한 그릇에 담고 싶다는 구상을 하게된 겁니다."

앞으로 10여년 걸릴지도 모를 설문대할망 전시관은 20세기까지 제주도 사람들의 문학 미술 민속 등 모든 분야 예술을 시대별로 보여주게 된다는 것. "제주의 이름있는 작가들 외에 무명의 작가들이 만든 민속작품도 전시되겠죠.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우리것이 다 산산히 흩어져버린다는 것은 우리의 혼도 뺏기는 것입니다. 이름없는 손들이 빚어낸 민속품들인 궤, 정동벌립 같은 것들 모두가 훌륭한 우리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 돌 위에 피어난 제주사람들의 돌문화

창조신화의 하나인 설문대할망을 얘기하면 엄청나게 깊고 재미있는 행간의 흐름을 알 수 있다는 백운철. 그는 이 설문대할망 화소 중에서 모성애라는 것에 우선 초점을 둔다. "인류의 모성애는 공통적인 것이니까요. 남녀노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외국인들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호감을 갖습니다." 창조적인 열정하나로 일궈온 그의 거침없는 확신이다.

백운철. 드라마같은 그의 삶과 작업은 돌의 생이다. 돌탑을 쌓아서 형상화시키는 작업, 오백아들들의 슬픈 표정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었던 작업. 모성애를 흙으로 빚어서 구워낸 토우 작업. 이 세가지를 동시에 했고, 그것을 목석원에 담아내는 꿈을 꿨다. 허나 우리 민속과 문화를 한 그릇 안에 보여주어야 했다. 그 오랜 열망을 위해 그는 지난해 목석원의 전시물들도 돌문화공원으로 기증하기로 해 다시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금년말이면 그가 연출한 '갑돌이와 갑순이'앞에서 백년해로를 꿈꾸던 신혼부부들의 정원, '기념비적인 정원'이라며 외국인들이 찾던 목석원은 역사속으로 지워지게 된다. 목석원의 연출가로서 아쉬움은 없을까? 이 주인은 그런다. 목석원의 연출은 거기서 끝나야한다고. "목석원이 돌문화의 꽃이라면 꽃이 떨어져야 열매를 맺을 것 아닙니까. 돌문화라고 이름 하는 것은 돌 위에 피어난 모든 제주도사람들의 문화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2010년, 그의 설문대할망 전시관의 기본설계가 나온다. "기본 계획은 해놨지만 도에서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제주도민이 힘을 모아 하지 않으면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겠지요. 돌문화공원은 제주도의 본질적인 것을 우선 수집 전시하는 곳입니다. 제주학 연구소라는 것도 반드시 함께 키워나가야 합니다."

# 제주의 자연과 그를 키워준 세 여자

그를 키운 것은 팔할이 제주의 자연이지만, 그를 포기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게한 사람은 '그녀들', 세여자이다. "어떻게 저 많은 것이 나한테 왔으며, 내 눈에 띄었을까. 그때 어머니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죠." 여장부였던 어머니는 7년생 밖에 안된 과수원에 30평 창고를 지어주는 등 든든한 후원자였다. 돌수집을 한마디로 '미친짓'이라고 하던 시절. 그렇게 어머니는 그의 첫 번째 전시공간인 목물원의 문을 열기까지 언덕길의 마차를 밀어준 사람. 그 어머니가 쇠해질때 평생 미안해할만큼 그의 길을 내조해준 아내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를 정신적으로 이끌어 준 여신 설문대할망. 그녀의 힘은 엄청난 상상력을 주었단다. 이들이 없었다면 그는 목석원도 돌문화공원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란다.

우연인가. 돌과의 숙명적 만남. 70년대 초, 해안도로를 걸어서 두바퀴 돌았다. 돌의 산지를 알기 위해서였다.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면서 바라보던 제주해안은 너무너무 아름다웠다. 한숨이 나고, 눈물이 났다. "그 영적인 분위기와 어촌의 여, 용암이 흐르다 바다에 뻗은 돌하며 기가막힌 거예요. 제주도를 재발견하는, 깊이 깊이 인식하는 시간이 된거지요"

죽을뻔한 고비도 있었다. 법환리 바닷가를 천천히 돌 때였다, 돌의 두상 세 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등짐 지고 손에 안고 해녀들의 다니던 비탈길을 오를 때였다. "돌을 탁 떨어뜨리고 잡은 게 작은 소나무가지였어요. 만일 그때 소나무가 없었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죽거나 사고를 당했지요. 올라가서 담배한대 피면서 이 소나무가 왜 여기 있느냐. 그러면 소나무가 나를 살려줬는데 도대체 내 인생에서 역할이 뭐냐 생각했죠. 소나무한테 배운 인생. 그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수집한 겁니다."

그를 더 재촉한 것은 서울사람이 사과박스에 바닷가 돌을 담아 반출하던 장면. 왜 제주도의 중요한 것을 갖고 가나. 수집의 속도가 빨라졌다. 지금껏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는 것 하나. 돌을 팔라는, 돈의 유혹이 수십차례 오가기도 했다. 허나 1억이다, 10억이다 해도 전시물은 단 한점도 팔지 않았던 것.

# 제주의 독특한 색채와 질감에 일찍 눈 떠

돌의 영혼과 돌이 바라보는 시선을 응시하며 얼굴을 찾아낼 때, 그는 이미 종합연출가로서 제주도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제주 자연에 스스로 깊이 빠진 그는 누구보다 일찍 제주적인 질감과 색채를 찾아냈다. 또한 거기에 대한 확고한 심미안을 포기한 적 없다. 그의 눈은 까다롭다. 돌문화공원 전시관에 곳곳에 그렇게 고른 돌천, 송이 바닥재 등이 돋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제 그도 60을 훌쩍 넘겼다. 행정과 함께 가는 일이어서 부딪혀야 할 일도 많다. 그만하면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수없었으나 그는 여기에 생을 건다. 돌문화공원의 일부가 되어서. 그런데, 그만하면 잊으라하는데도 잊을 수 없는 사람. 돌문화공원 조성 당시 작고한 신철주군수다. 그가 평생 모든 돌과 민속품 등을 내놓겠다고하자 군유지를 제안했던 사람. 공복의 당연한 일 아닌가하자 그는 그런다. "누가 선뜻 100만평을 제의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코 쉬운 결단은 아니었겠죠. 처음부터 기획할 때 아무도 이해를 못했어요. 아무런 지분도 없이 협약할 때도 내 계획, 꿈을 최대한 반영시켜주는 조건 뿐이었습니다."

당시 황무지를 밟으며 고동치는 심장을 눌렀던 때가 1998년. "이 100만평에 설문대할망을 살려넣자". 무지몽매한 개발의 위력으로 파헤쳐질 수도 있었던 야생의 대지는 그렇게 경계를 긋고 일단 살아났다. 비로소 공원의 황량한 곳에 매복되었던 돌과 나무들이 제 색깔을 드러내었다. 제주돌과 지질, 용암이 분출하던 순간의 제주의 탄생을 담아냈다. 쓰레기매립장은 벽천계류. 현대식 돌전시관이 되었다.

그의 남은 생, 여전히 설문대할망과 함께인가. 그 전시관 곁에 그의 처소가 될 작은 전통초가 하나 만들고, 설문대할망 전시관의 완성을 향해 가는 것 뿐이란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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