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잠녀를 만나다' -독도에 간 제주 잠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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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로 물질 갔던 해녀들. | ||
친척끼리 첫 독도 물질 “미역 조물지 못하면 식사 준비하며 생활”
오메기떡 등 ‘뇌물’까지 써가며 독도행…가마니에 몸 누이며 휴식
‘독도’얘기에 작은 방에 모여 앉은 잠녀들의 맘이 바빠진다.
기억을 끄집어내는 시간도 모자라 보인다. 누가 먼저랄 거 없이 ‘그 때’를 털어놓는다 또 빠진 기억을 찾아낸다 여념이 없다.
파도가 센 날이면 토굴에 모여 앉아 노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고 하지만 하나하나 꺼내놓는 기억의 단편에는 삶에 대한 의지와 고단함이 절절하다.
#“지금 생각해봐도…그런 고생은 없었주”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독도까지 가기는 했는데…” 김공자 할머니(67)가 계속 말을 이어간다.
당시 독도는 전역한 군인들이 지켰다. 나중에는 순경 교대식을 구경할 만큼 사람들이 오갔다. 그런 와중에 잠녀들은 눈에 띄는 존재였다.
김 할머니는 “군인인지 순경인지 다들 와서 물질하는 것을 구경할 정도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몇 장 안 되는 당시 사진 역시 섬에 들어왔던 경찰이 찍어줬다.
1959년 처음 들어갈 때가 두려웠지 이후 몇 년은 ‘때가 되면’독도를 찾았다.
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들어간 뒤 포항으로 옮겨가 다시 울릉도까지 배를 타고 갔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다시 배를 타면 꼬박 3~4일은 배 위에서 보냈다.
지금이야 고무옷이라도 있지 당시는 물적삼에 물소중기(소중이)가 전부였다. 차마 챙기지 못한 테왁은 양철깡통 같은 것으로 대신했다.
김 할머니는 “보통 11시간에서 12시간 목선 발동기를 타고 갔다”며 “힘들기는 했지만 비양도 하나에 잠녀들이 너무 많아 다른 선택은 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물이라면 이력이 날만도 한데 처음 들어가는 독도 바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발목을 잡곤 했다.
“물질을 잘 하면 잘 하는 대로 미역을 조물고, 못하는 사람은 미역을 말리거나 식사 준비를 하는 등 일을 나눴다”며 “그때는 어리고 해서 그냥 다른 사람을 따라 다니는 게 전부였다”는 김 할머니의 눈 앞에 어느새 독도가 어른거린다.
# ‘능력’없이는 갈 수 없는 곳
고정순 할머니(76)와 강정란 할머니(78)도 독도 물질에 대한 기억을 도왔다.
강 할머니는 독도 물질을 위해 “오메기 떡 등 뇌물까지 썼었다”고 말을 꺼냈다. “돈이 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앞다퉈 독도 물질을 원했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소위 모집책 격으로 사람들을 모아 독도까지 인솔하는 잠녀에게 잘 보여야만 가능했다.
3년 정도 독도물질을 했다는 강 할머니 역시 토굴에 가마니를 깔고 사는 사정은 여전했다.
하지만 처음 5명 정도였던 독도 잠녀는 많게는 45명까지 늘어났고 5명씩 조를 짜서 물질을 하는 등의 규칙도 정해졌다.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 출신 지역별로 다툼도 있었고, 간이화장실 용도의 항아리나 간이창고 같은 것도 생겼다.
강 할머니는 “독도에서건 울릉도에서건 물이 모자라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독도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물통이 있어 빨래에 목욕까지 해도 남을 정도로 물이 충분했다. 59년 독도에 갔던 잠녀들은 빗물까지 받아가며 생활했던 것에 비하면 크게 달라진 부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