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녀를 만나다-독도잠녀 3…하도 조봉옥 임화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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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먹이 어린 아이까지 데리고 독도행…남편·아기업개 동반도 많아
갈매기알에 일본 순시선 건빵까지 얻어먹던 배고팠던 기억 ‘생생’
지금 행정구역상 같은 제주시지만 한림읍 협재리와는 반대편에 위치한 구좌읍 하도리 잠녀들 역시 ‘독도 물질’에 나섰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파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샛굴에서 가마니를 깔고 생활했던 것이며 독도수비대 등에 대한 기억은 유사하다.
처음에는 ‘따로’였지만 언제인가부터 같이 독도 바다를 헤집었다. 서로에 대한 기억은 곱지 않지만 독도라는 공통점에서 그녀들은 하나다.
△‘아기업개’까지 데리고 독도행
벌써 50년도 훨씬 지난 일이다. 하지만 54년 전 기억을 끄집어내는데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봉옥 할머니(81)와 임화순 할머니(79)는 흐릿한 기억을 서로 보태며 온전한 하나를 만들었다.
‘돈벌이가 좋다’는 말에 무작정 배에 몸을 실은 과정은 앞서 협재리 잠녀와 유사하다.
거의 미역 작업을 했다. 가족을 두고 혼자 독도로 향했던 협재 잠녀와 달리 하도 잠녀들은 아직 어린아이까지 동반한 채 독도행을 택했다.
한번 작업에 20~30일을 소요했으니 젖먹이 아기를 두고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기 업개를 구해 데리고 가거나 남편과 함께 독도에 들어가기도 했다.
조 할머니는 두 번이나 큰 딸을 데리고 독도로 갔다. 물질 자체가 낯선 어린 나이였지만 생계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조 할머니는 “내가 미역을 조물어(베어내) 올리면 딸은 기다리다 그것을 뭍까지 가져가곤 했다”며 “두번째 갔을 땐가는 (큰 딸이)서툴게 미역을 조물다 손을 다치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임 할머니 역시 당시 세 살이던 딸을 데리고 독도에 들어갔다. 물질을 하는 동안은 남편이 아이를 돌봤다.
협재 잠녀들이 ‘임순경’이라고 기억하던 이는 바로 조 할머니의 남편이다. 울릉도에서 순경 시험을 치른 뒤 독도에서 근무하면서 잠녀들이 오면 ‘동향’이라고 더 신경을 썼다.
△녹록치 않았던 작업…후회는 없어
처음에는 밥할 물까지 아껴야했던 독도 사정도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굴속에 가마니 몇장을 깔고 자갈을 치우며 자는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미역을 널어 말리던 가재섬은 파도가 조금만 높아도 애써 작업한 미역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불안한 마음에 자는 자리까지 내주며 미역을 말렸다.
보리 등 먹을 것을 가지고 가기는 하지만 한달 가까이 이어지는 작업에 이내 바닥을 들어낸다. 독도에서 작업할 잠녀를 모집하는 전주들이 ‘모자라면 더 가져다주마’약속을 해도 날씨를 이길 수는 없었다.
사람 손길이 뜸했던 시절이라 독도에서 소라는 흔했다. 바위 위에 널린 소라를 처음엔 빈 껍데기로 오해도 했다. 배고픔에 인근을 지나는 일본 경비선을 불러 건빵을 얻기도했다. 찐 감자를 먹는 것처럼 소라를 삶아 먹었고, 지천이던 갈매기알까지 삶아 먹다보니 이제는 삶은 계란은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냉이며 산나물이 많고 좋아 맨발로 섬을 뒤지고 다니기도 하고 7~8발씩 깊은 바다로 들어가 천초 작업을 해 제주까지 나와 팔기도 했다.
임 할머니는 “큰섬(울릉도)에서 사는 건 아주 호강일 정도였다”며 “너무 힘들어서 바당서 많이 울었주”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떻게 그랬는지 싶다. 그래도 그런 그녀들이 있어 지금 우리가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