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93세 현역 '통일시인' 이기형
그에게 통일이 아닌 시는 '헛 시'다. "대한민국사람에게 가장 큰 것이 통일이죠. 시는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명제에 대해 대답을 해줘야 해요." 아흔 셋. 우리문단의 최고령 현역시인. 손은 떨리지만 민족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시혼은 뜨겁다. 여리고 작은 체구, 절규하듯 쩌렁쩌렁한 목소리. 80년대 이후 민주화와 통일 희구의 현장에서 그의 목소리는 어김없다. 그 '님'을 위해서라면 신새벽 기차를 타는 것 쯤이랴. 통일 이외의 얘기는 헛소리! 시인은 참소리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이 시대 '통일시인' 이기형. 아직도 오지 않은 그 '님'을 기다리다 백발이 된 노시인. 오늘도 떨리는 손으로 시를 적는다. "통일이 되기까지는 죽지 않겠습니다. 아직은 하늘에 갈 때가 아닙니다."
1917년 함경남도 함주 출생. 함흥고보 졸업. 도쿄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 2년 수학. 1947년 「민주조선」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몽양 여운형 서거 이후 33년간 공적 활동 중단. 1980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재야 민주화 통일운동에 참여. 1989년 시집 「지리산」 필화사건으로 불구속 기소. 지은 책으로 시집 「망향」「설제」 「지리산」 「꽃섬」 「별꿈」 「산하단심」 「봄은 왜 오지 않는가」 「해연이 날아온다」 「절정의 노래」 등과 전기 「여운형 평전」 「도산 안창호」, 기행문 「시인의 고향」, 통일명시 100선 감상 「그날의 아름다운 만남」 등이 있다.
# 92세에 시집 「절정의 노래」펴내 
시인 이기형은
"그래요. 왜 이기형은 통일문제로만 연결시키는가 반문할거야. 그러나 서정시에도 통일을 넣어야만 살아날 수 있다고 봐요. 하지만 우리가 통일된 후에는 각자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노래해야 해요. 지금은 비상시기니까. 우리는 60년이상 허송세월했어요. 그보다 큰 민족적 손실이 어딨어요." 현대에 가장 절실한 문제에 대해 외면하고 통곡하지 않고는 시가 안된다는 노시인.
92세에 그는 열번째시집 「절정의 노래」를 냈다. 그의 시를 추린 독일어시집도 나왔다. "어느 정도는 내가 쓰고 싶은 데까지는 갔지만 계속 나와요. 골 속에 빙 돌아요. 영감이 떠오르면 잠자다가도 몇 자 적어놓고." 아내가 대필을 해주기도 했다. 아직도 명문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는 시인은 요즘 시를 너무 안읽는 풍토는 정치가 잘못돼서가 아닐까한다. "옛날 베렌스키라는 평론가는 '문학은 그 시대의 최고봉이다' 했어요. 저는 만해의 '님의 침묵' 소월의 '초혼'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임화의 '현해탄'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같은 그 시 정신을 높이 삽니다."
그의 시는 철저한 민족의식에서 출발한다. 열세살의 야학. 야학선생들은 다 독립투사였다. 선생들이 1929년 여승들만 있던 함흥의 큰 절에서 연설을 할 때였다. 우연히 소년 이기형에게 처음 대중 연설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그날. "우리가 애쓰게 농사를 지어서 일본놈들에게 빼앗기고 우리는 쭉정이만 먹는다." 소년의 발언은 겁이 없었다.
# 굴곡의 모순된 현대사 총 집결체 노시인
고향 함경북도. 그곳에 아내와 어린 아들, 딸을 두고 떠나왔다. 1950년 6월26일. 군인들 차에 올랐다. 달랑 와이셔츠 바람에.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남쪽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평양서 직장을 그만두고 글을 쓸 때였다. 가족에겐 한달만 기다리라 했다. "서울에 인민군이 들어온 것이 28일. 곧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어. 군인들 차는 폭탄 실은 차였어요. 가다가 차를 세우고 군인들과 마을로 뛰어들어갔어요. 순간 폭발했는데 1분만 늦어도 죽었지요." 아찔했다. 그리고는 돌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삶의 고개고개 도사린 죽음을 여러번 타넘었다. 시인의 삶은 분단민족의 굴곡진 모순만큼 가팔랐다.
두고온 6순의 딸을 극적으로 만난 것은 2005년. 민족작가대회 참석차 북에 갔을 때였다. 눈물로 껴안았다. 넉달 전 아내 죽은 것도 그때야 알았다. 북의 아내는 몽양 여운형의 육촌누이. 1944년 결혼 당시 주례는 몽양. 축사는 작가 임화, 김태준이 했었다. "임화는 프랑스 철학자의 말을 인용해 '허위는 복잡하고 진실은 단순하다'는 멋진 말을 했어요." 9순의 시인은 통곡하듯 그 아내를 위해 시를 썼다. '조국 해방 싸움에 생이별 36년만에/슬픈 사연 많은 삶을 접고/차마 감아지지 않는 눈을 감았다고/망백 나이 허망한 세상/그대 높은 혼령 앞에/구만리 장천을 바라 터지는 가슴/내 뭔 말 하리오' ('북쪽 아내에게'중)
북은 그리움으로 두었다. 1959년 그와 동시대 아픔을 겪었던 한 여인을 만났다. 시집으로 교감을 나누다 결혼했다. 구멍가게, 서울의 뒷골목에서 학원선생을 하며 은거. 분단된 조국에서는 시를 쓰지 않으리라. 오래 세상과 절필하기도 했다. "글은 현장속에서 나와요. 책상에서 어떻게 시가 나와요" 그를 두고 어느 비평가는 '우리 시대 최고의 실록 증언 시인'이라 했다. 그의 시는 통일에 대한 비나리이다. 서정성은 부족하지만 감정은 솟구치는 파도처럼 리듬을 탄다. 시대에 대한 열정으로 출렁거린다.
# 몽양 여운형 시인 임화 이광수 등 직접 만나
그는 살아있는 현대사이다. 김구, 정지용, 김남천, 안회남, 한설야, 이육사의 동생 이원조…. 교과서속 숱한 현대사의 이름들. 그들은 그가 직접 만난 이들이다. 몽양 여운형, 만해 한용운을 만나 조선독립 얘기를 들었고, 이광수를 만나 내선일체를 따졌다. 1938년 함흥고보 졸업시기, 민족의 지도자를 갈구하던 문청 이기형. 그는 직접 그들을 찾아나섰다. "이광수완 처음엔 '무정' '흙' '단종애사' 를 이틀동안 얘기하고 3일만에 정면충돌했어. 창씨개명 문제도 따졌지. 그가 나도 세상 살아보니 그렇지 않더라고 해. 민족개조론이라는 거 있잖아. 그런데. 집에 와서는 화가 나서 이광수 책들을 없애 버린거야." 임화도 몽양도 혈기왕성한 청년에게 애정을 줬다. "몽양도 점심을 많이 사줬고, 임화도 두 번 중국 요리를 사줬어요."
그의 정신적 스승이자 아버지는 몽양 여운형.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20세기 인물이라고 단언한다. "몽양 같은 분이 뛰어났으니까 본받아서 가야겠다 했고, 지금도 똑같지요." 몽양의 무엇이 그를 사로잡았을까. "포용력이요. 좌우 다 끌어들이면서도 합리적이고, 자기 생각, 색깔이 뚜렷했어요. 몽양은 역사와 민족의 선두주자예요. 민족자주정신에 투철한 정치인이었는데도 당시의 정치풍토로서는 그러한 몽양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못했지요. 인격자지요. 호방한 말소리와 인격으로 청중을 휘어잡았어요." 그는 일부에서 자신이 몽양의 비서로 소개되는데 비서직을 맡아본 적도 없고, 단지 그를 흠모해서 쫓아다녔을 뿐이란다. 그칠줄 모르는 몽양에 대한 사무침은 그가 쓴 「여운형평전」이 증거한다.
# 사력 다해 퉁소를 불던 아버지
아버지는 스물하나에 세상을 떴다. 그가 갓 두 살. 파리하고 놀던 때였다. 그 아버지는 죽어가면서 퉁소를 불었다. 사력을 다해. "연연절절 천년 한을 쏟아내는 저 퉁소소리/제 가슴은 찢어집니다/어머니는 귀띔해 주셨습니다/내 두살 때 아버님은 스물하나 앳된 꽃나이/이 세상 마지막 하직할제 사력을 다해 퉁소를 부르셨다고"('퉁소소리' 중). 그에게 살아갈 힘을 준 것은 아버지의 그 퉁소소리였을까. "농사짓다가 열병으로 돌아가셨는데 퉁소를 불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어머닌 열 여섯, 아버지는 열다섯에 결혼했는데 첫 아들이었죠. 나는 죽는다 저 어린 것도 못본다. 퉁소를 불면서 아이에게 힘을 주었을 거예요." 그는 아버지의 죽을 때의 힘을 자신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의지가 강하고 목표를 세우고 돌파하려고 해야해요.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는 돌파력이 내 인생관입니다. 고통을 낙천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말이예요."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 행로가 시를 쓰게 했고, 시는 그렇게 쓰여졌다. 때론 거칠지만.
스스로 진보적 민족주의자라는 노시인. 팔순의 나이에 가사일도하며 10여년간 손녀 둘을 돌보기도 했다. 맞벌이 아들부부를 위해서. 그러면서도 왕성하게 시를 쓰던 그의 건강비결은 뭘까. "부모가 날 잘 낳아줬고, 의지지요. 애들을 돌보기 전에는 물통 짊어지고 매일 등산했어요. 하루 종일 보모 역할을 하면서 이게 등산 효과랑 똑 같다고 봤어요."
시인은 텔레비전도 거의 안본다. 허송세월이란다. "부인이 이기주의라고 하지만 하나를 쟁취하기위해 술 담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지금도 글을 쓸 수 있는 것이지. 공연히 돈, 시간, 건강 나빠지는데 왜 해요? 나는 몸에도 맞지 않지만. 시쓰는데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것은 하지 않아요. 낙천적인 생각을 갖는게 중요해요. 너무 욕심부리면 안되지요."
# 제주4·3, 민족의 길 역사의 길 거슬러가면 안돼
그는 제주 4·3을 보는 인식이 깊다. "제주의 작가들한테는 최대의 소재야. 지금 4·3을 훼손하려고 뉴라이트들이 그거 가지고 할 말 없으면, 궁지에 몰리면 자꾸 '빨갱이' 하는데 근본적으로 잘못된거요. 민족의 길 역사의 길을 거슬러가면 안되지요." 그의 통일시는 한라산 구상나무에서 백두산 박달나무까지.
"우리 민족이 처해있는 현실이 올바른 현실이냐 잘못된 현실이냐해서 대처해야 하는 것이지. 친일 잔재를 청산해야 하는데 청산 못했거든요. 국가보안법도 친일잔재들이 만든 거잖아요. 평화를 바라지 않는 민중이 어디있겠어요." 노시인의 어조가 단호하다. "현 정권이 자꾸 대화를 통해서 통일에 대한 궤도 수정을 잘 해야만 해요. 지금까지 남북관계를 호전시켜 왔는데 그 기초위에 통일의 진보를 멈추지 말아야합니다."
노시인은 바로 며칠전 민족시인 신동엽 40주기를 위해 새벽 부여행 열차를 탔다. 돌아오는 길, 또 시가 터져나왔단다. 시 '왕도에 선비는 없었다'. 세상은 나를 끝장났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 몸은 쇠잔했으나 눈은 빛났다. '분단이 풀리지 않는 한/ 늙지도 죽지도 않겠다/ 통일시만 쓴다"('조국 시 사랑'중). 그의 다함없는 짝사랑, 그 '님'은 언제 그에게 안길 것인가.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