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녀를 만나다-독도 해녀4…조천읍 고춘옥 할머니
남편 따라 울릉도에서 6년 생활…배 빌려 5년여간 독도 물질 
배운게 ‘물질’ 무허가 잠수어선까지 “안 해본 일없이 다 해봐”
발동선 7시간·험한 바다 날씨, 미역 시세 좋아 ‘뒷돈’ 공공연
독도 물질을 했던 고춘옥 할머니(71)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수소문 끝에 협재와 하도에서 독도 물질의 흔적을 모았지만 조천읍에서 우연히 만난 고 할머니는 생각지도 않았던 독도에서의 기억을 쏟아냈다.
행원 출신의 고 할머니가 조천에 시집왔다 울릉도로 흘러 들어가 독도 바다를 헤집은 것은 오직 하나 ‘물질을 잘했기 때문’이었다.
사소한 옛 추억 마냥 독도 물질 이야기를 뱉어내는 고 할머니의 표정은 그러나 복잡 미묘했다.
△“오징어 나면 개도 돈 물고 다닌다”
넓은 어장을 가진 행원 출신인 고 할머니는 16살 어린 나이에 물질을 시작했다. 그 때는 그것이 그리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고 할머니는 “그냥 다들 하니까 해야하는가 보다 했고, 하다보니 그게 업이 됐다”고 말했다. 배를 하던 남편이 사업에 실패한 뒤 가족 모두가 울릉도로 갔다. 오징어 시세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지만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바다 밖에 모르던 탓에 울릉도에서의 6년 역시 배를 임대해 바다에서 보냈다.
다른 잠녀 두명과 함께 독도에 들어간 것도 그때였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생계를 위해서 못할 것이 없었다. 차라리 더 젊었으면 일부러 독도까지 들어가지는 않았을 터다.
1년에 서너차례 5년 정도를 독도에서 물질을 했다. 다른 잠녀들처럼 미역 작업이 주였지만 고 할머니는 “무허가 머구리(잠수어선)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며 털어놨다.
당시 독도 바다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큼직한 문어가 스스로 바위 위까지 올라왔는가 하면 합자(홍합)는 그냥 둬서 썩을 정도로 지천이었다. 전복이며 소라까지 물건도 실했다.
가재바위라 부르는 넓은 바위에는 볕이 좋은 날 일광욕을 즐기는 물개들이 장관이었다.
고 할머니는 “이맘때면 갈매기알을 주으러 일부러 독도에 들어가기도 했다”며 “산비탈이나 절벽 틈을 뒤지는 게 쉽지 않았지만 계란보다 크고 맛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돈 됐던 ‘미역’에 독도 특수
한번 독도에 들어가면 꼬박 한 달은 아침저녁 바다를 마주하며 씨름을 했다.
‘울릉도 산 떨어지면 독도 산이 보이고, 독도 산이 떨어지면 울릉도 산이 보인다’고 할 정도로 배로 7시간 넘게 거리가 있는 데다 바다 날씨는 그다지 인심이 좋지 않았다.
겨울 소라 작업을 하고 난 뒤 판로가 생기기 전까지 망사리 채 바다에 담가 뒀다. 태풍이라도 지나가고 나면 산꼭대기에서 망사리를 찾았을 정도였다.
그래도 미역 시세가 좋아 독도 순경을 하기 위해 뒷돈까지 썼다는 얘기도 공공연했다.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해삼을 순경들이 잡은 토끼와 바꿔 먹기도 했다. 인적이 뜸한 곳이다 보니 멀리 배라도 보이면 소속을 확인하기 전 손부터 흔들었다.
일본 순시선 등에 잘 갖춰진 보급품을 보며 부러워했던 일이며 이런 저런 부식을 얻어 끼니를 해결했던 것도 꼭 어제 일 같다.
섬 인탓에 습도가 높아 뱃사람들은 아침저녁 술을 찾았다.
고 할머니는 “그래도 독도 바당은 물이 깊지 않고 여도 많아 작업하기에는 좋았다”며 “지금 다시 가라면 못 갈 것 같다”고 말했다.
한 두명 함께 작업했던 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던 고 할머니는 이내 자리를 정리했다. 아직 양식장 작업에 참여한다는 고 할머니가 바다를 지키는 ‘당번날’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