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3부>‘잠녀를 만나다’ 108. 울릉도·독도의 제주잠녀들(2)

   
 
  ▲ 촛대바위. 김화순 할머니는 아들이 탄 배가 저동항 인근 촛대바위 앞에서 넘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결국 두 아들은 싸늘한 주검이 돼서 돌아왔다.  
 
 물건 많다는 이유로 전국 바다 떠돌다 결국 울릉도로
 앞 바다에서 아들 잃어…물질도 올해가 마지막 
 
   
 
  ▲ 김화순 할머니  
 
 1.김화순 할머니
 
 "정말 제주에서 왔나? 밥은 먹었나?"
 울릉도 저동에서 만난 김화순 할머니(89)는 갑작스런 취재팀의 방문에 밥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혹시나 먼 곳까지 찾아온 고향사람들이 배를 굶고 다닐까 걱정이 됐나 보다.
 힘든 물질 생활 속에서도 아이들과 가족들을 굶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은 잠녀들의 큰 숙제였고 일종의 신념이었다. 밥 이야기가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다.  
 "이젠 생각도 나지 않는다"며 손사래치던 할머니의 이야기는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바로 앞바다에서 아들 2명을 보냈주"
 김 할머니의 바다는 처음부터 거칠었다. 제주시 한림읍 귀덕에서 태어나 19살 때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결혼 후 21살 때부터는 돈을 벌기 위해 부산, 남해, 군산 등을 돌며 전국 방방 곳곳 물질을 했다.   
 눈 감아도 그 바다속이 기억난다는 김 할머니는 물건이 있다는 바다엔 무조건 들어갔다. 울릉도에 들어온 것도 그 때문이다.
 특유의 성실함 때문인지 돈도 조금씩 쌓여갔다. 그러나 남편이 배를 구입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동서남북 안가본 곳 없이 다 돌아다녔다. 그때는 돈이 된다면 무조건 뛰어들었다"며 "하지만 팔자에 돈이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리 고생해도 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시련은 그뿐만이 아니였다.
 울릉도 들어온지 몇해 지나지 않아 아들 2명이 탄 배가 저동항 바로 앞에 있는 촛대바위 앞에서 넘어지는 것을 눈으로 봤다. 살아서 돌아올 것으로 믿었던 아들들은 주검이 돼 돌아왔다. 김 할머니의 생계를 이어주던 바다는 그렇게 아들 2명을 앗아갔다.
 김 할머니는 "촛대바위는 수심이 깊어 아들들이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다"며 "아들을 잃은 촛대바위 인근이 아직도 내가 물질하는 곳이다. 수십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들 생각이 난다"며 한숨을 내쉈다.
   
 
  ▲ 마당에 널린 미역  
 
 
 #"물질도 올해가 마지막"
 김 할머니의 바다이야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졌다. 물질을 할 때면 굽었던 허리가 쭉 펴지듯 물질 이야기에는 목소리를 높였다.
 물건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독도에 가서 물질도 했다. 독도에서의 물질은 힘들었지만 잡을 해산물이 많아 지친줄도 몰랐다. 
 김 할머니는 "예전 울릉도와 독도에는 해삼, 전복 등 물건이 많았지만 이젠 팔 물건이 없다"며 "남의 배를 타고 나가 작업 후에는 반씩 가져가니 남는 게 있겠냐"고 말했다.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김 할머니는 방안 안쪽에 조심스럽게 보관했던 감사장을 꺼냈다. 먼지가 쌓인 감사장에는 1982년 11월5일 물에 빠진 해양경찰의 시신을 찾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내용이 씌여 있었다.
 울릉도 바다를 아는 것은 잠녀들 뿐이었다. 해경의 협조요청으로 그 당시 김 할머니를 비롯한 해녀 5명은 함께 시신을 찾으러 나섰고 다음날 시신을 발견해 해경에 신고했다.
 감사장을 꼭 가슴에 품은 김 할머니는 "수고비 5만원과 내복도 받았다"며 "당시에는 큰 돈이었다"고 말했다. 
 이야기 도중 김 할머니는 물질도 올해가 마지막이라며 수차례 강조했다. 내년 아흔이라는 나이는 물질하기에는 어려운 나이였다.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여전히 바다가 자신의 삶의 터전임을 잊지 않았다. 이날도 마당 건조대에는 김 할머니가 물질해 갓 건져올린 싱싱한 돌미역이 한 가득 널려 미역 내음이 방안까지 가득 퍼졌다.
 김 할머니는 "물질을 그만두면 아들네 가서 살아야 하는데 아파트는 사람 구경도 못하고 도통 재미가 없다"며 "여기는 얼마나 좋냐. 사람도 지나다니고 인정도 많고, 여기가 재미있지"라며 멀리 보이는 촛대바위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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