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잠녀를 만나다-109.울릉도·독도의 제주잠녀들 4

▲ 하늘의 도움 없이는 쉽게 가슴을 내주지 않는 독도. 동도항에서 입도허가서를 쓰고 2시간에 뱃길을 달려 만난 독도는 강인한 생명력의 제주 잠녀와 닮았다.
물 귀한 곳…허벅 대신 양동이 지고 '물골' 의지하면서 살아
1950년대 초 독도 물질 시작 추정·민간의용수비대와 섬 지켜
강인한 생명력과 원시 순수함 공존 잠녀와 닮은 모습 인상적
제주 잠녀들이 처음 독도 땅을 밟은 시기는 1953년으로 추정된다.
1950년 한국 전쟁으로 혼란을 틈타 일본이 독도에 상륙하자 울릉도의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 독도 지킴이로 나섰던 때이기도 했다.
그렇게 외로운 섬에 발을 디딘 잠녀들은 아직도 그 곳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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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 잠녀들의 유일한 급수원이었던 물골에는 아직도 태극기가 걸려 있다. | ||
독도에 닿으려면 하늘의 도움이 필요하다. 파도가 있는 날에는 접안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울릉도에서 2시간을 달려와 독도를 밟아보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30분 정도 접안을 하고 독도를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다.
날씨 탓에 사전 계획을 세우지 못했지만 취재팀의 독도 상륙은 큰 무리 없이 이뤄졌다.
그래도 독도 취재를 위해서는 독도관리사무소로부터 체류 허가를 받는 등 여러 절차를 거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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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 여기저기에는 세월이 만든 해식동굴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 ||
독도에서 참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독도 지킴이로 알려진 김성도(70)·김신열(72)씨 부부다. 이들 부부의 주민등록상 주소는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리 63번지(서도)다. 1965년 3월 독도에 거주한 첫 주민이자 제주 잠녀와 남다른 인연을 이어온 최종덕씨와 함께 70년대부터 이곳에서 전복 등 수산물을 채취하며 살아왔다. 1987년 최씨가 지병으로 숨지자 김씨 부부는 1991년 주소지를 독도로 옮기고 이곳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다.
그렇게 독도를 지키는 김신열 할머니는 제주 출신이다. 월령리에서 태어나 부산으로 바깥물질을 나섰다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독도에 들어온 것이 삶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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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를 지키는 제주 잠녀 김신열 할머니(72). 지난 1970년대 초반 울릉도 물질을 나선뒤 지금의 남편 김성도씨(70)를 만나 독도 사람이 다 됐다. | ||
김 할머니가 울릉도에 온 것은 지난 1975년, 35살이 되던 해다. 그때만 해도 울릉도 도동에만 100명 남짓한 잠녀들이 모여 살았다. 돈을 좀 모으면 돌아가자 했던 것이 지금의 남편을 만나 정착하면서 유야무야 없던 일이 됐다.
"고향이 그립지 않냐"는 질문에 김 할머니는 "마음대로 할 수도 있고, 복잡하지도 않고 해서 독도에서 사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물이 부족해 목욕을 하는 것도 사치일 때도 있었다. "20일 넘게 머리도 못감고 살았지만 불편한 것은 몰랐다"는 김 할머니는 위성 TV에 담수화시설까지 갖춰진 지금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그렇다고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비온 날이 생일날이었다"며 농담처럼 던진 말 속에는 그간의 애환이 담겨있다. 담수화시설이 들어선 것이 이제 5년쯤 됐다. 그때까지 섬 반대편 끝의 샘물인 '물골'에서 물을 길어다 썼다.
김 할머니는 "어릴 때 '물허벅'을 지겹게 지고 다녔는데 이곳에서도 양동이를 지고 바위산을 넘어다녔다"고 말했다.
# “제주 잠녀 없이는 독도도 없다”
스스로를 ‘독도 사람’이라 부르는 남편 김성도씨는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위해 가장 큰 공헌을 한사람들은 제주잠녀”라고 강조했다.
사실 김씨는 18세부터 40년간 최종덕씨와 작업을 같이 했다. 최종덕씨는 1981년에 독도에 주거지를 옮기고 1987년까지 독도 바다에서 작업을 했다. 해녀들은 보통 독도에서 3~4개월을 지낸 후 울릉도에서 작업했다. 최씨가 혈압으로 유명을 달리한 이후 독도와 관련한 기억들은 모두 김씨의 몫이 됐다.
제주 잠녀들이 처음 독도 땅을 밟은 것은 1950년대 초로 추정된다.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독도 물질을 했던 몇 안남은 잠녀들의 말을 종합해볼 때 1953년 즈음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당시는 한국전쟁으로 우리나라가 혼란한 틈을 이용,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고자했던 일본의 움직임이 본격적일 때였다. 그 때 독도를 지키기 위해 나선 것이 독도민간의용수비대(1952~1956)다.
기억 속에서 처음 독도 물질에 나선 잠녀들은 미역 작업을 하는 와중에도 의병대와 함께 통나무들을 끌어다가 보초 초소 막사를 만들었다. 채취한 해산물을 산짐승과 바꿔먹기도 하고 가끔 오가는 일본 순시선으로부터 서로를 지키는 등 일종의 공동체 생활을 했다
쓸쓸한 바위섬인 독도에서 석달 정도의 삶을 견디는데 사람 목소리만큼 의지가 되는 것은 없었으리라.
# 힘들었던 기억…독도를 닮은 사람들
'독도는 우리 땅' 노래 때문인가 독도와 관련한 내용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문처럼 입에서 쏟아진다. 위치는 동경 131도 52부, 북위 37도14부, 울릉도에서는 92km, 일본 오키섬에서는 161km 떨어진 위치에 있다. 동도와 서도 두 개의 섬으로 구성됐다. 처음에는 하나의 섬이었지만 오랜 세월은 섬을 두 개로 만든 것도 모자라 크고 작은 바위섬과 해식동굴을 만들었다.
독도 바다는 울릉도 도동 어촌계에 속해있고 잠녀들은 잠수기선을 이용해 해산물 작업을 한다. 예전에는 시쳇말로 발에 치일 정도로 전복이며 소라가 많았지만 지금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렵다.
너무 맑아 깊이감을 잃어버린 바다는 고향을 떠나 외딴 섬에 정착한 제주 잠녀를 닮았다. 제주 여성 특유의 억척스러움과 순박함이 공존하는 모습이다. 얼핏 외로운 섬처럼 보이지만 독도경비대며 등대지기(동도)에 30년 넘게 정붙이고 살아온 김씨 부부에겐 누구보다 편안한 공간이 된다.
제주말을 잊은 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다. 지난 2006년 제주를 방문했었지만 그리운 느낌은 독도만 못하다. 물에 의지해 사는 법을 배웠던 탓에 물을 떠나지 못하는 일상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직접 채취한 해산물을 고향에서 찾아온 취재팀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는 거친 손이 왠지 눈에 밟힌다.
괭이갈매기의 배웅을 받으며 울릉도로 돌아오는 길, 누가 부르는 것도 아닌데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특별취재반=김대생 교육체육문화부장·고미 편집부 차장·해녀박물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