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인간'의 사진가 최민식

 그의 망막은 늘 인간의 시선에 꽂힌다. '종이거울속의 슬픈 얼굴', 가난의 뒷모습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사진 인생 50년. 렌즈 속 '인간'과 함께 시대를 살았다. 길고 우둘투둘한 여정. 첫번째 「인간」이 나오는데 걸린 세월 10년, 그 후의 시간 역시 모두 '인간'에 헌사했다. 흡사 교향곡 작곡가처럼. 그는 사람만이 희망임을 믿는다. 불멸의 사진 앞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생명력을 느끼고, 창작의 영감을 떠올리고, 사진의 진실을 느끼고, 역동성을 느낀다. 올해 82세. "기록사진은 세상을 향한 발언이며 외침이다. 가장 강력한 사진은 사람, 특히 얼굴을 찍는 것"이라는 사람. "사진이 쏟아진다한들 우리 삶을 모두 다 담아내랴. 사진 앞에 삶이 있다. 다만, 사진가는 사진으로 온전한 삶을 살아내려는 자여야한다."는 시대의 다큐 사진가 최민식. 그를 만났다. 비내리는 부산에서.

   
 
 

 대표적 인물 사진가 최민식

 1928년 황해도 연안출생. 한국의 대표적 인물 사진가. 1957년 일본 도쿄 중앙미술학원 졸업, 독학으로 '인간' 주제 사진 시작. 1962년 대만국제사진전에서 2점 입선 후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등 20여개국의 여러 사진공모전에서 220점 입상. 1967년 영국의 '사진연감'에 6점 수록 세계적 '스타사진가'로 선정된 후 독일 '국제사진연감', 일본 '세계사진연감' 등에 수록. 1968년 사진집 「인간」 제1집 후 「인간」 제13집까지 출간. 저서로 「리얼리즘사진의 사상」 「종이거울속의 슬픈 얼굴」 「사진이란 무엇인가」 「낮은데로 임한 사진」 등 40여권. 1970년부터 독일 등 7개국 개인초대전. 부산시문화상, 대한민국사진문화상, 부산방송문화대상, 동강사진상 미국사진협회상 우수상, 백조사진문화상 등. 2000년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 현재 부산대 인제대 등 출강.

 
 
# 전 작품 국가기록원에 기증, 민간 기증 제1호

사진가의 서재는 장서로 빼곡하다. 고전에서 신간까지 1만여권. 사진집만 1000권. "책을 읽으면 게으르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진다"는 '인간'의 사진가 최민식.  

그가 평생 찍은 필름은 50만커트. 지난해 그는 거기서 골라낸 사진작품 원판 15만커트와 국내·외 사진집, 연구책자 등 1만권의 장서, 카메라, 자서전 원고 등 관련자료 3만여점을 국가기록원에 기증, 민간 기증기록물 1호를 기록했다. "영광이죠. 선배들도 많은데. 국가기록원은 관리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요."

그가 응시한 얼굴들을 본다. 1957년 용산역 앞에서 만난 그 아이. 땅바닥에서 국수먹는 그 아이의 힘겨운 젓가락질을. 자갈치시장 아지매들을. 불우한 육신의 모습, 노점상 아주머니의 겁질린 얼굴, 선거벽보 앞에서 잠든 노숙자. 신문배달 소년, 등짐진 소녀의 뒷모습. 다른 장면도 있다. 노동자의 웃는 얼굴, 발랄한 얼굴들. 그의 사진 프레임의 주체들은 거리의 아픈 상처들이며 민주화를 향한 힘겨운 싸움이며, 주름진 노인네의 얼굴이다.

사진은 시대와 역사의 증인이다. 서민들의 삶을 통해 시대를 통렬히 비판하고 부조리를 비판하는 작가 최민식. "휴머니즘이죠. 가난하고 낮은 밑바닥 현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몸부림은 바로 인생 탐구와 직결되는 것이죠."

50년의 사진 인생. 그는 말한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시도 내려놓은 적이 없다고. 돈이 되는 사진에 대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항시 그 질문과 싸워왔기 때문이지요. 무엇이 휴머니즘이며 무엇이 진정 인간을 위한 정의인가를 깨닫기 위해 고민해야했지요."

 # 인류의 행복·평화 위한 사진

"선배들 사진과 비교하면 난 사진도 아냐. 부러울 정도예요. 난 이 안에서 맴도는데 저 사람들은 지구에서 놀거든요. 유니세프 지원받아가면서 아프리카쪽 난민들을 많이 찍어요. 그것을 전시, 신문, 출판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요. 보고 느껴라. 느끼는 것만 갖고 안된다. 나눔이다. 꺼내라. 우리는 도대체 그런 의식이 없어요. 우리는 아직 멀었어요. 모든 주제는 인류의 평화, 행복을 위해서 찍죠." 지구의 고통을 찍고 있는 사진가들이 그는 부럽다.

1957년부터 주로 부산의 얼굴들을 중심으로 찍어온 작가 최민식. 독일 중국 독일 인도 네팔 파키스탄 등 40여개국을 돌면서 찍은 작품들도 많다. "인도작품이 가장 많죠." 그의 생애의 꿈은 아프리카를 담는 일. 꿈을 이루기위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는 길이 쉽지는 않은 일. "유니세프 완장이 있어야 돼요. 우간다 국경 넘어가서 다른나라 난민들 찍어야하는데. 여러군데서 받은 상금을 좀 남기고 보태서 갈 생각이예요. 당국에선 연예인들만 상대하고 우린 안쳐다봐요. 반응이 없어요."

그가 대형 사진집을 다시 열었다. 아프리카의 난민들, 고통스런 얼굴들이 가득하다. 브라질 출신 살가드다. "체험이 중요해요. 살가드처럼 난민생활 한달씩 살면서 찍어야해요. 가난 속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찾는거지요. 휴머니즘, 인도주의, 박애주의, 사진속 이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하리라는 것, 금전이나 물품을 주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러한 아픔을 공감하는 데 인간의 아름다움이 있지 않느냐는거죠."

 # 운명을 결정해버린 사진집 「인간가족」

어려서 꿈은 화가였다. 고향은 황해도 연안. 전쟁후 이북으로 바뀐 곳. 소작농으로 입에 풀칠하던 일곱식구의 가난한 가족사. 아버지는 항상 어린 최민식에게 태어나자마자 받은 세례명 성빈센시오 성인의 정신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가라 말씀하셨다. 그 아버지는 열다섯살 아이의 손재주가 아깝다며 도회지로 나가라고 권유했다. 평남 진남포 미쓰비시 기능자 양성소를 거쳐 중학과정을 마쳤다. 이산가족된지 반백년.

이십대, 누구나처럼 운명은 순간이다. 사진이 그에게 온 것. 그림을 배우러 일본에 갔던 1955년. 2년여의 도쿄중앙미술학원 시절,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에 빠질 때였다. 헌책방 순례를 하던 그의 눈을 번쩍 뜨게한 책은 미국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기획한 사진집 「인간가족」. "200명이 찍은 이 책이 사로잡은 거지요. 신탁통치 반대 여고생들이 나온 한국장면, 유태인 잡아가는 장면 등 인간군상들이 리얼하죠. 충격을 받았지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는 유진 스미스. 강렬한 색조, 인간애로 일관해온 스미스의 위대한 작가정신은 매 순간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그렇게 불멸의 작품들을 만난다는 것만으로 저는 행운이죠." 그가 칼마이단스의 한국전 사진 '통곡'을 보여준다. "막 살아있어요. 한 장에서 느껴지는 전율이 있죠." 또다른 사진 한 장. "2차대전때 군인이 떠날 때 아이와 이별하는 모습이죠. '아빠 가지마' 속삭임이 들리지 않아요? 전쟁이 아니었으면 이런 사진이 안나와요." 그 작품들이 그에겐 스승이다. 그는 이 세계걸작을 한국에 소개하고 싶어 편집을 하고 책을 냈다. 사진 가운데 100여점을 추렸다. "책을 안읽는데 책이 팔리겠어요?" 1권 내고 끝냈다.

 # 군사독재시절 시달려…간첩신고만 100번

귀국해 정착한 제2의 고향 부산. 처절하게 비참한 전후 얼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렌즈는 열기를 뿜었다. 가난이 두렵지 않던 이 젊은 사진가는 어디든 달려나갔다. 어둠이 도사린 한국의 구석 구석을. 필름에 전부 쏟아붓다보면 쌀 떨어진 줄도 몰랐다.  

"진정한 사진은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는 연출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표정에 진실이 담겨야한다고 생각한다.

열정없이는 걸작을 만들수도 없고 리얼리즘 성취도 없다는 최민식. 사진가는 용감해야 하는 걸까. 어두운 사진만 찍는 이 작가에겐 에피소드가 많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시절, 혹독한 탄압이 이어졌다. "중앙정보부에 불려다니고, 잡으러 오고, 삼청교육대 명단에 오르고, 밤중에 1주일만 피해있으라고. 인원을 채웠으니 나오라고." 천기누설하려는 자를 막는 것처럼. 해외초청을 받아도 해외로 나갈 수가 없었다.

"여권이 안나와서 못 갔어요. 자꾸 창피하게 못 사는 것만 갖고 나간다고." 힘겨웠던 시절, 그의 작업을 지켜봐온 왜관 수도원에서 지원했다. 독일인 임 세바스틴 신부는 그의 사진집 「인간」의 4집부터 8집까지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줬다. 인간 4·5집은 판금. 신부에게 당국에서 전화가 왔다. 사진집이 너무 어둡다는 것. 신부의 답, "다음부터는 밝게 찍겠어요". 유목민처럼 전국을 떠돌며 사진을 찍는 동안 간첩신고를 당한 것만 100번 넘는다. 1967년에는 생포한 간첩의 소지품에 그의 사진집이 있어 곤욕을 치렀단다. 다큐 사진가 최민식. 그는 오로지 예술에 대한 오기 하나로 버텼다.

 # 제주도, 종합적인 것 사진으로 다 남겨야

그는 제주도가 너무나 사진소재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제주도의 종합적인 것들을 사진으로 재정립해야해요. 아주 오랫동안 그 지역의 선인들의 생활모습과 곳곳을 찾아보면 마을마다 특이한 풍속들이 많잖아요. 육지에서 볼 수 없는 모습들 말이죠. 제주에 오래 산 사람들만이 내면을 잘 들여다보고 포착할 수 있는 것들이 많죠." 제주에 닿을때마다 제주가 축복받았다는 생각이다. 너무나 깨끗하고 아름답다. 외국의 어느 섬에 간 느낌. 만농 홍정표 선생의 사진도 좋았다. 제주도가 이제 보존해야할 시점이란다.

언젠가 제주를 찾아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며 렌즈에 담아보고 싶다는 최민식. 제주도는 해녀들, 노인들, 참 이야기가 많은 곳이란다. "그게 다 기록이잖아요. 제주의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한다는 것, 더 사라지기전에 시간을 정해 하나하나 모아내야합니다."

그는 다시 태어난다해도 주저없이 이웃들의 삶을 찾아 카메라에 담겠다 했다. "학생들은 선생님은 이제 50년이상 찍었는데 다 지나간 일이라고 합니다. 가난의 모습은 엄연한 현실인데 혐오감을 준다고도 하지요. 그럴 때마다 포토샵은 기법일 뿐, 예술을 할 것인가 장난을 할 것인가 결정하라고 합니다."

사진가가 되려는 이에 하는 말씀. "우선 시간날 때마다 세계적 걸작들을 감상하라. 자기가 원하는 주제를 정해 그 길로 정진하라. 그저 열심히 찍는 길 뿐. 그러나 삶의 미묘함에 대한 관심, 삶의 과제에 대한 질문에 항상 목말라 있어야 한다. 우선 어떤 사진을 찍을 것인가 어떤 것을 찍는 것이 가치있는 것인가 등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한 작가정신, 즉 사상에서 사진이 나와야 한다."

다행히 그는 눈 밝고, 걸음이 재다. 누가 여든둘이라 하랴. "건강요? 걷는 것이 유일한 운동이죠. 사진가에겐 눈이 생명인데 하느님이 도와줬어요." 그는 오늘도 카메라를 둘러메고 어디론가 떠난다. 영락없이 청년의 폼이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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