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우리문화를 지키는 사람들 <5> 고훈식 시인
제주정신으로 빚어낸 향토시 잇따라 출판
제주어 사라질까 노심초사…소임 다할 터

   
 
  ▲ 제주어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는 고훈식 시인.  
 
△ 제주어로 만든 시 150여편

(같은) 울내에서(울타리 안에서) 도웨멍(도우면서) 살젠허민/ 이녁 찌 고와사만이(선한마음 먹어야만)/ 궨당보다 더 가근허여진다/ 집줄을 노나 멍석을 꼬나/ 자릿도새기(어린돼지) 질루왕(키워서) 때도(내다팔때도)/ 이녁 일고찌 수눌음 허민(서로서로 도우면)/ 시상 지꺼지게(즐겁게) 살아진다 <시 '선린병작' 중에서>

'선린병작(善隣竝作)'은 다정한 이웃과 이익을 나눈다는 뜻이다. 제주도에선 말을 방목할 때 이웃의 도움이 필요했다. 밤바다 고기잡이를 갈 때는 부자지간의 동승은 피해야 하기에 병작의 의미가 깊었다. 이런 제주 정서를 제주어로 옮겨가는 시인이 있다. 바로 고훈식씨(62)가 그 주인공이다.

그에게 시는 희망이자 꿈이었다. 20대 혈기왕성한 청년시절, 그에게는 '평생 시인으로 살고 싶다'는 포부가 있었다. 그가 시인으로 첫 문을 두드린 건 지난 1991년 '표현문학'으로 등단이었다. 그때 나이가 45살이었으니 늦었다면 늦은 출발이었다.

등단 이후 시 작업은 급물살을 탔다. 동심을 주제로 한 「청동개구리와 황금두꺼비」, 사랑을 주제로 한 「아름다운 타인」, 바다를 주제로 한 「무명의 바다에 잠긴 돌」등 10여편의 시집을 연이어 출간했다.

그러던 중 지난 2006년 제주방문의 해에 제주어로 시집을 엮기 시작했다. 첫 시집은 「요(ㅇ+아래아 ‥)보록 소보록(알뜰살뜰)」이다. 제주어로 빚어낸 제주인의 인심과 삶의 모습이 소복이 담겨있다.

고 시인은 "제주어가 사라지는 것이 마음 아팠다. 나 또한 제주도 방언시를 쓰긴 하지만, 막상 요긴한 곳에 찾아 쓰려니까 기억에서 까맣게 지워져 버린 사투리가 너무 많이 쓰면서도 가슴이 아팠다"며 "사라져가는 제주어를 다시 건져낼 요량으로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제주어 첫 시집에 이어 지난 2007년에는 「어글락다글락(울퉁불퉁)」을, 지난 7월에는 세 번째 시집 「할타간다 할타온다(핥고 또 핥는다)」를 잇따라 세상에 내놓았다. 제주어 시집 3편에 담긴 제주어 시는 대략 150여편에 이른다.

   
 
  ▲ 고훈식씨가 발행한 책들. 앞줄이 제주어 시집 3권이다.  
 
△ 제주는 언어의 보물섬

그는 제주어 시에 제주말씨의 표기나 어원을 풀어쓰면서 새삼 제주가 '언어의 보물섬'이 아닌가하는 도달점에 다다랐다.

예를 들면 이렇다. 흐랑흐랑, 과짝과짝, 꽝꽝, 민질민질, 비작비작, 푸달푸달, 와들랑와들랑, 와작착와작착, 보들랑보들랑 등 동작과 상태를 겸한 음절의 반복에 그 야릇함이 절묘하게 묻어난다는 것이다. 단어를 들으면 눈앞에 그림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또 제주사람들만이 썼던 물건 하나하나에는 고유명사가 존재하는 것도 하나의 특이성으로 꼽았다. 해녀들이 물질할 때 사용했던 '테왁'은 제주어 '튼다(물위에 뜨는 것)'와 '박'의 줄임말로 '물위에 뜨게 하는 박'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 시인은 이런 제주어가 혹여나 사라져 버릴까 마음이 편치 않다. 그는 "요즘은 중년층인 40대도 표준어를 주로 쓰고, 말꼬리에만 제주어를 쓸 정도"라며 "인디언보호구역에 사는 인디언처럼 제주어 또한 '옛 것'이 돼 그런 상황이 벌어질까 두렵다"고 말했다.

△ 제주정신 담은 산문 쓸 터

그가 앞으로 할 일은 많다. 내년에는 제주도 정신과 정서를 바탕에 깔고 산문을 발표할 계획을 갖고 있다. '조냥 정신', '나냥으로', '놈의 대동', '궁퉁', '출륙금지' 등 각박한 환경 탓에 빚어진 속담과 멋진 공연을 보면서도 별 반응이 없는 표정이나 박수 안치기로 소문난 심리적 배경도 글로 풀어볼 생각이다.

고 시인은 "제주속담에 '말은 요구리 똥은 싸구리'처럼 능력이 이뿐이니 어쩌겠느냐"며 "제주도 지질이나 역사, 신화, 전설과 풍습을 글로 옮겨 쓰는데도 수많은 세월이 걸릴 터, 제주어도 쓰기에 따라 소중한 문화가 된다는 사실에 스토리텔링으로도 마음을 주고받으면 제주도에서 사는 보람이 커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제주에서 내려져오는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든 '백록담'처럼, 제주의 이야기가 담겨진 제주어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문화는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에 제주어를 널리 알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점차 사라져가는 제주어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시인으로서 소임을 다하는 그는 제주어의 파수꾼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가 있어 제주가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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