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진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 갈등해결연구센터장/겸임교수. 갈등해결학 박사)

1991년, 화산섬 제주는 온통 들끓고 있었다. 정부 여당이 제주개발특별법을 일방적으로 추진한 탓이었다. 한 젊은이가 분신 항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12월18일 한밤 중에 특별법이 전격 통과돼버렸다. 도민들의 분노와 허탈감은 극에 달했다.
다음날, 제민일보에 특집 시리즈가 시작됐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라는 제목이었다. 7회에 걸쳐 연일 기사를 써내려간 양조훈 기자(현 제주 부지사)는 마지막 결론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특별법에 대한 도민 저항은 몇개의 법조문보다는 그동안의 개발정책에 대한 불신의 상징적 표현이었다. 따라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이런 불명예를 불식시키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제민일보 1991.12.27)

그후 18년 지나 또다른 태풍이 휘몰아쳤다. 도지사 소환운동이 일단락되고, 상처와 갈등만이 잔해처럼 남아 있다. 그런 제주에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라는 관점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김태환 지사, 양조훈 부지사, 그리고 제주 도정(道政)을 이끄는 이들의 '겸허한 자세'다. 18년 전 기사에서 강조됐던 것처럼 '겸허하게' 이번 사태의 교훈점을 찾고 도정의 대전환을 모색해야 할 때다.

이번 주민소환운동이 진정 과녁으로 삼은 것은 도지사란 사람이 아니라, 도정의 일방주의였다. 주민들 의사는 아랑곳 없이 일방적으로 중요 정책을 결정하고 밀어붙이기로 일관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주민소환' 카드가 나왔던 것이다. 일방통행식 도정에 대한 도민들의 준엄한 경고장이었다.

소환투표는 불성립됐지만, 그렇다고 해군기지, 영리병원, 내국인 카지노 등 그간 문제돼온 도의 주요 정책이 옳았음을 인정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투표 결과와 관계 없이 각 갈등의 쟁점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외에도 갈등 사안은 많다. 특별자치도란 위상 덕분에 중앙정부로부터 정책결정권을 이양받아 국내 처음 실시하는 정책이 많다. 대부분 도민들의 삶에 직결되는 갈등 꺼리들이다.

갈등을 푸는 데는 왕도가 없다. 관련 당사자들과 마주앉아 대화하고 쟁점을 하나하나 해소해나가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도의 의지와 도민들의 지혜가 모이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그런 전범을 만드는 일이 이미 시작됐다.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 논란을 해결하기 위한 TF팀이 그것이다. 도의 정책 담당자, 각 분야 전문가, 그리고 시민-환경단체 대표들이 모여 함께 타당성 검토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일종의 '정책 다이얼로그'다. 서구 행정에서 활용돼 효과가 입증된 시민참여형 정책결정 프로세스다.

다른 갈등 사안들도 그런 식으로 풀어가면 된다. 아울러, 보다 종합적인 접근도 필요하다. 도측과 업계 시민단체 등이 참여해 제주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일명 '제주비전 정책다이얼로그'를 추진하는 것이다. 제주의 정체성과 생태환경을 보전하면서 지역발전과 관광개발을 도모하는 종합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시민참여적 정책결정 방식이 바로 새로운 행정 패러다임인 '거버넌스'(Governance)의 요체다. 이를 통해 제주는 진정 '특별한' 자치도가 될 수 있다. 다른 지자체들이 따르고자 하는 자치행정의 멋진 전범을 만들어갈 수 있다. 이번 사태를 전화위복으로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동시에, 제주 공동체에 생긴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모두가 진정 승리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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