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여든일곱 석수(石手) 임영석
돌가루가 날렸다. 젊은 석공이 큰 암석을 들어 얹히자 노인은 가뿐하게 작은 돌을 돌틈에 끼워 넣는다. 돌은 아귀가 딱 맞게 들어앉는다. 화산섬 제주의 거대한 암석을 노인은 정과 망치 같은 연장으로 딱딱 쪼갠다. 돌의 결을 알고, 돌의 성질을 알기 때문이다. 지천으로 널려진 현무암. 바람도 휭휭 통과하는 제주돌. 그는 소년시절부터 석수가 되었다. 이제 황혼이 된 이 석수에게 물었다. 왜 돌을 선택했는가?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지. 노인의 목덜미에는 어른 주먹보다 큰 혹이 돌멩이처럼 박혀있다. 그것은 평생 거친 제주 돌과 생을 함께 한 증거물이다. 삶을 위해 돌을 선택했으나 제주돌을 사랑하게 된 사람. 임영석. 전라의 뱃길타고 물애기때 들어와 제주가 본적이 되어버린 사람. 여든일곱의 현역 '임석공'. 그의 돌과의 생을 만났다.
석수 임영석 뒷얘기 1923년생. 서해토건, 목석원 등에서 오래 일했다. 그는 스스로 고향이 처음 부모가 정착한 제주시 광양이라고 생각한다. 고향 나주엔 한번도 간 적이 없다. 개인사적으론 일제강점기와 4·3, 한국전쟁 때 참전, 사선을 넘는 등 한국현대사를 고스란히 살아냈다. 강철같은 체력을 가졌다고 군에서는 '토치카'란 별명까지 얻었다. 그는 일을 할 때 절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지금은 끊었으나 한때 담배 두갑 반을 피우고 끝나면 퇴근시간이 정확했단다. 일을 할 때 그는 흘러간 옛 노래를 잘 불렀다. 자신이 고생했기 때문에 불쌍한 사람이 보이면 서러워서 애써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그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들 하나를 위해 자신은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해야한다고 했다. 외아들이었던 그는 11명의 자녀를 뒀고 직계자손만 90명 정도. "서울사는 손자들이 명절때 오면 누구 손주인지 몰라. 누게고 허난 아무게 손지마씀그래."
# 잘 쌓은 돌담, 수백미터 줄 흔들어도 안 무너져 
"젊었을 때는 누구한테 떨어지지 않았어. 한 건설회사의 돌 일은 전부 그가 했다. "민속자연사박물관은 6년간 내가 돌 쌓은거여. 제주도 돌 내가 엄청나게 쌓았어. 건축도 다리공사도 거의 다. 다른 사람 기권한 것도 맡아서 했어."
칠십년 제주돌을 어루만진 석수 임영석. 그는 자신이 쌓은 돌담이 수십년 세월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해한다. "양쪽에서 줄을 맞춰서 돌을 쌓아야 곧게 쌓을 수 있어. 제대로만 돌담을 쌓으면 아무리 줄을 흔들어도 안 무너져. 안벌러져. 가운데를 잘 메우고, 차곡차곡 잘해서 제대로 탁탁 앉혀야지. 조금만 잘 못하면 나중에 무거운 것 올라가면 무너져버려. 돌을 잘 봐야해."
돈? 벌어봤다. "나도 벌기는 많이 벌었는데 아들 병원비로 많이 썼어." 그를 아는 이웃들은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돌일만큼은 '박사급'이라고 말한다. 평생 한우물 팠으니 그런 말 들을 만 했다. 밭돌담, 돌탑, 건축의 석재, 경치석 등등. '돌챙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비하하는 말인 것 같다는 그는 '임석공'이라면 기분좋단다. 임석공의 입을 빌려보자. 그는 돌을 한번 깨면 어떤 돌인지 안다.
그의 대표작들은 동부두 호안공사. 교량석축공사, 가마리·신산리 등 마을마다 하천공사, 집담, 밭담, 경치석, 자연사박물관의 외벽공사, 목석원, 돌문화공원의 돌탑 등 온갖 담 쌓기작업에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 없다. 일본까지 돌일 원정을 갔었다.
# 일제시대 비행장 노무자, 4·3, 한국전쟁 참전
흑룡만리라했던가. 멀리서 보면 꿈틀거리는 제주돌담의 길고 긴 행진. 지금은 많이 사라지고 있는 이 풍경의 안쪽엔 이름없이 사라져간 석수들이 있었다.
그의 삶, 제주돌을 닮았다. 울퉁불퉁, 매끄럽지 않은 돌멩이같은.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으나 고향을 제주로 알았다. 뗏마가 날라주던 시절, 가장 가까웠던 전라도 뱃길. 찢어지게 가난한 부모는 갓 태어난 외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 제주에서의 삶 역시 오지게 힘들었다. 부모는 한라산 나무를 등판으로 져 나르며 입에 풀칠을 했다. 그의 삶 역시 부모의 삶을 떠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정뜨르 비행장에 강제동원. 아버지 대신 열일곱 살 아들은 노무자가 됐다. "도라꾸로 흙 실어서 퍼 나르고. 함바 만들어서 거기서 재우고. 일본놈들한테 무지하게 고생당했어." 강제 징용 당하지 말라고 아버지는 외아들을 육지로 피난시켰다 "부산으로 건너가서는 일본인들 짐 싣고 풀고 하는 일이야." 떠돌다 돌아왔다. 얼마없어 4·3사건이 터졌다. 아버지는 외아들 목숨 부지하라고 다시 무조건 튀라 했다. 서울로 부산으로 부평초처럼 흘렀다. "안 돌아다닌데 없이 돌아다녔어." 잠잠했을까 싶어 제주에 돌아왔더니 얼마없어 한국전쟁. 1주일간 부산에서 총쏘는 법만 배우고 전방에 입대했다.
군에서도 아슬아슬한 순간이 이어졌다. "한때 중공군들한테 포위당했어. 쿵닥쿵닥 이젠 죽었구나. 총도 여기 맞았고. 열바늘은 꿰맸을거라."
# 돌담은 기초부터 잘 쌓아야 안무너져
7년의 군생활 후 돌아온 제주시 광양집에는 그새 아버님 세상 떠 없고, 어머니 뿐. 결혼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돌일을 했다. 돌은 돈이 됐다. 눈만 뜨면 재료가 돌로 된 섬, 저것만 잘 골라내고 다루면 가난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이 많잖아. 일하다보니 내 자신이 해야겠다하다보니 배워진거야." 돌은 밑천없이 할 수 있는 일. 아무리 잘해도 무형문화재가 되어볼 수도 없는 돌일 잡부지만. 스승도 없었다.
그는 제주돌을 구멍 숭숭 난 곰보돌이라고 부른다. "제주돌은 가볍고 육지돌은 무겁지. 화산이 폭발해서 가스가 들어간데는 구멍이 난거여." 경험에서 나온 그의 이론. 제주돌은 우둘투둘해서 잘 맞추니까 안 떨어진다. 허나 육지돌을 제주돌처럼 쌓으면 반드시 실패한다. "사람이 걸어다닐 때 미끄러지면 자빠지잖아요. 돌도 미끄럽지 않으니까 안 자빠지지."
무릇 기초가 튼튼해야 탈이 없는 법. 그는 돌담을 쌓을 때부터 불안한 것은 반드시 무너진다고 믿는다. 가장 중요한 돌쌓기 비법은 돌을 잘 들여다 봐야한다는 것. "푸석푸석한 땅이 있고, 딴딴한 땅이 있고 여러가지야. 터를 잘 못 고르면 돌을 잘 놓아도 맬라져버려. 요것은 어디다 갖다 놓으면 맞겠다하면 그리로 갖다 놓으면 탁 맞아야지. 모르는 사람은 여기 놓았다 저기 놓았다하면 시간만 가지. 가만히 머리를 써야해. 돌을 잘 들여다보면 맞게 돼 있어. 맨 아래는 큰 돌 놓고 양쪽에 놓으려면 똑같이 놓고. 우에 가서 좁히려면 밑에서부터 자근자근 넣어야해."
# 일본까지 가서 돌 작업…돌의 성격 잘 알아야
그는 제주도 돌의 성격에 관한한 '호랭이'다. "제주돌은 화산이 폭발할 때 생겨나서 근본이 달라. 구멍이 터졌지만. 일본은 육지 돌하고 똑같애. 일본에서 4개월 일하는데 일본인은 일본돈 3만원 주는데 우린 2만원만 줘. 제주돌은 어렵지 않아. 깨면 깨는대로 잘나가는 돌 있고 안 나가는 돌 있어. 길가에 쌓는 경치석은 브이자로 기본으로 쌓는 것인데 호랭이라." 그의 곁에서 돌심부름 하다가 선수가 된 제자들도 많다.
양쪽으로 쌓는 겹담은 밑에 큰돌과 작은 돌 구분없이 올라갈 수 있는 것이고, 한줄로 쌓는 외담은 약간 큰 돌이 밑에 가야한다. 쌓는 방식은 잔돌로만 쌓다가 큰돌을 얹어 놓는 방식도 있다. 그는 어떤 악조건에서라도 돌작업을 성공시킨다.
밭담은 자연석을 이용한다. 줄로 중심을 잡고 받침을 잘 쌓아야 허물어지지 않는다. 집담은 다듬기도 한다. 서로 물리기 때문에 하나라도 빼내도 허물어지지 않아야한다. 건물을 지을 때도 주춧돌이 중요하듯 제주의 돌담 역시 굽돌이 가장 중요한 대목. 집담은 자연석 그대로 쌓는 밭담과 달리 조금씩 다듬기 때문에 서로 물리며 삼각 형태를 이뤄야하는 것이 기술이다. 제주도는 솜땅이어서 돌탑 쌓을 때도 조심해야 한다. "원체 돌은 크고 하니까 벌어져. 싹 무너지게해서 땅을 파내고 해야돼. 돌탑도 큰 놈은 오래 걸리고 작은 놈은 이삼일이면 끝나."
# 제주현무암 자체가 멋…돌 일은 힘 아닌 기술
"제주현무암 자체가 보물이야. 터덜터덜한 것이 멋인데, 어떤 곳은 그것을 자꾸 다듬어서 탑을 쌓다보니 제주돌 맛을 몰라. 관광객이 사진 찍어도 제주돌을 찍지 안그래?" 제주돌의 자연미가 없으면 죽은 돌이라는 임석공. "반지르르하게 만든 돌담은 보기가 싫어. 제주돌은 엉성하니까 엉글엉글하게 쌓아야 이쁘고 제주도 돌이 이렇구나하지. 곱닥한 것은 필요없어. 그대로 쌓아야 밖에서보면 짐승형태도 보이고."
포클레인이 나와도 장비를 이용해 거대한 암석에 밧줄을 묶는 법, 쇠사슬로 묶는 법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지금도 나이 들어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일의 요령을 알아서다. "기술로 해야돼. 힘으로는 안되니까 중요한 작업을 할 때는 밧줄을 돌에 묶어서 해야지." 그의 암석 작업은 남들 하는 것 한 배 반이면 빨리 끝난다.
"재미붙여서 일을 하다보니까 일을 하는 것이지." 젊어서 그의 팔 힘을 당할 이 없었던 그도 이젠 세월에 약해졌다. 이젠 무거운 돌은 들지 못하고 기술을 가르친다. "돌일하면 몸이 지치고 힘들죠. 나한테 돌일 배운 사람들 욕도 많이 들었어. 고씨라는 사람도 잡부로 따라다니다 욕도 많이 듣고 이젠 거꾸로 나보다 더 잘해." 그가 씨익 웃는다. 그가 평생 쌓은 돌을 합하면 얼마나 될까?
# 축항공사때 목덜미에 어른주먹 보다 큰 혹 박혀
두 사나이가 '영차 영차' 박자 맞추며 양 목덜미에 거대한 돌을 걸고 옮겨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쇠의 멍에처럼. 1960년대 제주항 축항 공사때는 큰 암석을 사용했다. 거기엔 작은 돌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일. 포클레인같은 거대 기계가 없던 시절, 몸이 곧 포클레인 역할을 해야 했다. 목덜미에 난 큰 혹은 그 시절 튀어나온 것. "목돌을 자꾸 하다보니까 이런 혹이 나온거야." 그 젊은 '돌챙이'의 모습이 앞에 스친다. 삶을 위해서 그 일을 하던. 축항작업은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기게했다. 그가 5m 높이에서 떨어져 다리 부상을 얻은 자국을 보인다. 그는 요즘도 돌일을 한다. 제주돌문화공원에서 젊은 석수들이 큰 암석을 드는 것을 보고 부럽기도 하고, 괜히 미안해 하면서. 젊어서 그도 그랬다. 그러나 지금도 돌에 관한한 그는 스승이다. 그는 말없는 돌과 정면으로 대화한다. 제주돌을 보배라 부르는 임석공. 점점 현대화에 밀려 사라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돌은 쇠처럼 단단한 것도 있고, 연하지만 단단한 성질도 있었다. 사람도 이와같으리. 어쩌면 돌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은 인생의 참맛을 느끼는 것과 같은지 모른다. 사랑하려면, 돌의 성질부터 잘 알고 다스릴 줄 알아야 하니까.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