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잠녀를 만나다 독도잠녀 7- 고순자 할머니
“바다가 옆에 있어야 잠녀지…. 험한 일 마다 않고 바다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그걸 인정해 주는 사람 하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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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를 떠나면 잠녀도 없는 것"이라는 고순자 할머니 최근 모습 | ||
# 독도의 영원한 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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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원한 독도사람 최종덕 추모회에서도 인정한 독도의 영원한 잠녀 고순자 할머니의 독도 생활 모습. | ||
구좌읍 행원리 출신의 고 할머니는 당시 여성들이 그랬듯이 어머니로부터 바다를 배웠고 습관처럼 물질을 했다. 그런 고 할머니였지만 독도 생활동안은 ‘머구리’ 작업을 했다.
‘머구리’란 두꺼운 가죽 작업복과 묵직한 청동 투구에 20kg의 납덩어리까지, 50㎏이 넘는 장비를 짊어지고 바다를 누비는 ‘심해 잠수부’를 일컫는 말이다. 한 번 들어가면 문어, 해삼, 멍게를 따러 몇 시간이고 바닷 속에서 작업해야 하는 고된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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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서도에서 독도 수비 활동을 하던 전경대원들과. | ||
40살에 시작한 독도 머구리 작업은 쉽지 않았다. 머구리 작업을 하던 잠녀들이 계속해 바뀌는 동안에도 꾸준히 독도에 남았던 고 할머니는 최씨가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2년 정도 섬을 지키다 귀향했다.
고 할머니는 “어른이 없어서인지 이런 저런 말이 많았다”며 “일이 힘든 건 참을 수 있어도 사람에 치이는 건 참기 어렵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머구리 작업은 그냥 물질 보다 수입이 나았다. 해산물을 채취하고 팔아서 받은 돈 중 이른바 ‘시고미’(양식 비용 등 제 비용)로 40% 정도를 떼 주고 나면 나머지는 제 몫이 됐다.
# 바다 없이는 잠녀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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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이 귀한 독도에서 물골까지 물을 이고 나르는 일은 빼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 ||
고 할머니는 “여름이면 깔따구떼 때문에 살지 못해, 작업도 힘들어 누구 하나 발을 붙이려고 하지 않았다”며 “그렇게 사람을 바꿔가며 10년 넘게 바다에 들었다”고 말했다.
물이 귀한 탓에 물골에서 몇 번이고 물을 져 나르고, 갈매기알도 수없이 삶아 먹었다. “먹을 것이 없기도 했지만 한 번에 5개 이상은 먹을 수도 없었다”며 “그때야 먹고 살려고 했지 지금은 큰 돈을 준다고 해도 못할 일”이라고 고개를 절래 절레 흔들었다.
그런 고생에도 고 할머니는 ‘잠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더 힘들어했다. 물질로 먹고 살았지만 당시 행원어촌계에서 한 가구당 계원 1명만을 인정했던 탓에 잠녀였지만 잠녀가 아닌 상황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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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천이던 갈매기 알을 삶아먹는 모습. | ||
그래도 이내 얼마 전 다녀왔던 독도 이야기에 힘을 낸다. “누가 알아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살았던 사람도 있다는 건 기억해줘야 한다”는 고 할머니의 눈가가 반짝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