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잠녀를 만나다 독도잠녀 7- 고순자 할머니

“바다가 옆에 있어야 잠녀지…. 험한 일 마다 않고 바다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그걸 인정해 주는 사람 하나 없어”

   
 
  ▲ "바다를 떠나면 잠녀도 없는 것"이라는 고순자 할머니 최근 모습  
 
급히 방 한 켠으로 치운 수북한 약 봉지는 순탄치 않았던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 독도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칠순을 넘긴 노(老)잠녀의 목소리는 이내 30년 전으로 돌아갔다. 서랍 구석에 간직하던 사진을 하나하나 꺼내 기억하는 모습에서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 독도의 영원한 해녀

   
 
  ▲ 영원한 독도사람 최종덕 추모회에서도 인정한 독도의 영원한 잠녀 고순자 할머니의 독도 생활 모습.  
 
독도사람 최종덕 추모회가 만든 자료집 곳곳에 독도를 드나들었던 제주 잠녀에 대한 이야기가 정리돼 있다. 그 중 ‘독도의 영원한 해녀’라는 소제목과 함께 수록된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띈다. 1973년부터 1991년까지 18년 동안 독도 바다를 지켰던 독도 지킴이 고순자 할머니(74·제주시)다.

구좌읍 행원리 출신의 고 할머니는 당시 여성들이 그랬듯이 어머니로부터 바다를 배웠고 습관처럼 물질을 했다. 그런 고 할머니였지만 독도 생활동안은 ‘머구리’ 작업을 했다.

‘머구리’란 두꺼운 가죽 작업복과 묵직한 청동 투구에 20kg의 납덩어리까지, 50㎏이 넘는 장비를 짊어지고 바다를 누비는 ‘심해 잠수부’를 일컫는 말이다. 한 번 들어가면 문어, 해삼, 멍게를 따러 몇 시간이고 바닷 속에서 작업해야 하는 고된 직업이다.

   
 
  ▲ 당시 서도에서 독도 수비 활동을 하던 전경대원들과.  
 
전라도로 미역을 팔러 다니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던 고 할머니는 20살 나던 해 행원에서 처음 머구리 작업을 했다. 30살에 고향을 떠나 제주시에 정착한 고 할머니에게 어느날 최종덕씨가 찾아왔다. 머구리 작업을 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제주에 온 최씨가 수소문 끝에 고 할머니를 만났고 그렇게 시작한 독도 생활은 강산만 두 번 바뀔 때까지 계속됐다.

40살에 시작한 독도 머구리 작업은 쉽지 않았다. 머구리 작업을 하던 잠녀들이 계속해 바뀌는 동안에도 꾸준히 독도에 남았던 고 할머니는 최씨가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2년 정도 섬을 지키다 귀향했다.

고 할머니는 “어른이 없어서인지 이런 저런 말이 많았다”며 “일이 힘든 건 참을 수 있어도 사람에 치이는 건 참기 어렵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머구리 작업은 그냥 물질 보다 수입이 나았다. 해산물을 채취하고 팔아서 받은 돈 중 이른바 ‘시고미’(양식 비용 등 제 비용)로 40% 정도를 떼 주고 나면 나머지는 제 몫이 됐다.

# 바다 없이는 잠녀도 없어

   
 
  ▲ 물이 귀한 독도에서 물골까지 물을 이고 나르는 일은 빼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지금도 눈앞에 독도가 어른거린다. 직접 모래를 이고 날라 만든 계단이며 헬리콥터 계류장을 만들 때도 손을 도왔다. 지네바위·토끼바위·권총 바위 같은 지천이던 바위 이름도 생생하다. 여름 잠깐을 빼고 한달이면 20일을 독도 바다에서 살았다. 오전에 미역 작업을 하면 오후는 머구리질을 하고, 추워지거나 배에서 줄이라도 당겨주지 않으면 물 속에서 몇 시간이고 보내야 했다.

고 할머니는 “여름이면 깔따구떼 때문에 살지 못해, 작업도 힘들어 누구 하나 발을 붙이려고 하지 않았다”며 “그렇게 사람을 바꿔가며 10년 넘게 바다에 들었다”고 말했다.

물이 귀한 탓에 물골에서 몇 번이고 물을 져 나르고, 갈매기알도 수없이 삶아 먹었다. “먹을 것이 없기도 했지만 한 번에 5개 이상은 먹을 수도 없었다”며 “그때야 먹고 살려고 했지 지금은 큰 돈을 준다고 해도 못할 일”이라고 고개를 절래 절레 흔들었다.

그런 고생에도 고 할머니는 ‘잠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더 힘들어했다. 물질로 먹고 살았지만 당시 행원어촌계에서 한 가구당 계원 1명만을 인정했던 탓에 잠녀였지만 잠녀가 아닌 상황이 돼버렸다.

   
 
  ▲ 지천이던 갈매기 알을 삶아먹는 모습.  
 
고 할머니는 “물질이며 머구리며 죽을 고생을 다하며 살았지만 바다를 떠나니 잠녀는 없었다”며 “온 몸이 성한 데가 하나도 없는데 잠녀증 하나 받지 못해 늘그막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소연했다.

그래도 이내 얼마 전 다녀왔던 독도 이야기에 힘을 낸다. “누가 알아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살았던 사람도 있다는 건 기억해줘야 한다”는 고 할머니의 눈가가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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