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재일동포 대표 시인 김시종
"혼자만의 아침을/ 너는 바라서는 안된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 절대 어긋날 리 없는 지구의 회전만을/ 너는 믿을 일이다./ (생략)다다를 수 없는 곳에 지평이 있는게 아니다./ 네가 서 있는 그 지점이 지평이다./ 바야흐로 지평이다./머얼리 그림자를 떨구며/기우는 석양에는 작별을 말해야 한다./ 새로운 밤이 기다린다." (김시종 '자서'중). 시인은 한사코 4월의 제주땅을 밟을 수 없다했다. 어찌 대낮에 고개 들고 다닐 수 있느냐 했다. 죄인처럼. 시인은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시를 쓴다. 그 시는 거친 야생의 지대로 이끌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매혹당한다. 2007년 일본 NHK는 두시간짜리 다큐 '진혼의 여정'으로 시인 김시종을 집중 조명했다. 우리 굴절된 현대사의 상징, 재일 1세대 원로시인 김시종. 그를 만났다. 그가 사는 땅, 오사카에서.
김시종 시인은 1929년 함경도 원산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1949년 6월, 4·3의 소용돌이 속에 일본으로 건너가 1950년 오사카신문에 일본어 시 '꿈같은 일'을 발표하면서 시 창작 활동 전개. 1951년 오사카 재일 조선인문화협회에서 발간하는 종합지 「조선평론」에 참여. 1953년 시 동인지 「진달래」 창간 주도. 1955년 첫시집 「지평선」출간후 「일본풍토기1」, 장편 「니카타」, 「이카이노 시집」. 「광주시편」 「원야의 시」 「화석의 여름」, 평론집, 한국어번역본 시집 「경계의 시」. 일역으로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재역조선시집」 등. 1986년 수필집 「재일의 틈새에서」로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1991년 「원야의 시」로 오구마 히데오상 특별상 수상. 중·고 통합과정 학교인 코리아국제학원 이사장. 현재 일본어로 시 창작 및 비평, 강연활동 등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 일본에서 시 쓰고 살 수 있는 시인 김시종 
그는 시 쓰고 먹고 산다. 일본에서 시가 밥이 되는 시인은 두 사람이라고 한다. 일본 시인과 좋은 조건 하나도 없는 재일동포시인 김시종. 시집 1000부 팔리는 일이 거의 없는 일본에서 그의 시는 4000~5000부 팔린다. 일본 각 대학에서 그의 시를 놓고 박사학위 쓰는 이들만 열댓명. 거칠거칠한 일본어 시. 그런데도 낭송을 해달라는 요청이 많다. 지난 2007년 시인의 다큐 촬영 차 제주를 찾았던 NHK 프로듀서는 내게 김시종의 언어는 일본사람도, 누구도 모사할 수 없는 품격있는 언어라고 했었다.
오사카에서 만난 시인은 여전히 맑아보였으나 회복기의 건강이 염려스러웠다. 지난해 4월29일 사경을 헤맸었기 때문이다. 노시인의 담담한 한마디. "겉은 멀쩡허고 속은 많이 상한 능금과 같지." 1970년대와 80년대 일본 정규 고등학교 한국어 담당 교사로 2세들의 교육에 열정적이었던 시인. 지난해 그가 심혈을 기울여 세운 코리아국제학원은 그만의 오래된 꿈이었다. 시와 평론을 넘나드는 왕성한 집필, 민족교육, 강연 등으로 쉴 틈이 없던 육신. 결국 탈이 났다. 수술을 거절했더니 의사는 책임 못 진다고 절식을 한달 시켰고 이후 수혈을 22일간 했단다. 일본의 어느 신문사에서 그의 회고사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은 이도 있었다는 후문.
시인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방문 때 한국국적이 아닌 조선국적으로 행사에 초대됐던 유일한 인물. 한 예화.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바로 다음날, 조간인 아사히신문은 그를 강요하다시피 집으로 납치해서 글을 쓰게 했다. 하루 한끼의 끼니로 살아내야하던 재일의 젊은 시절, 영양실조로 결핵이라는 생애의 병을 얻었다는 시인. "일본에 와서 신장도 떼지 않았나. 늑골도 하나 떼 있고. 상처투성이지. 살아있는 게 용하지. 술 먹으면 안된다고 했는데 소주 한두잔 먹어버리니까 살았지." 그럼에도 얼마없어 새시집 「잃어버린 계절」이 나올 예정이란다.
그의 일본말 시는 그의 말대로 거칠거칠하다. 한번 읽어서 그만두는 작품과 몇 번이고 되풀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있다면 그의 시는 몇 번 읽어야 한다. 그 맛이 깊기 때문에. 그의 시를 한번 대하면 다른 일본말은 희미해 버린다. 다른 문장이 물 탄 것처럼. 어렵지만 다 박혀든다. 때문에 손을 놓을 수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왜일까. 거친 그의 시에 매료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시대가 상처난 모어의 저편으로 일본어로 시를 박는 시인의 눈빛이 짓누른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 '황민화교육' 받은 소년의 해방
"황민화 교육 받고서 해방을 두려워했던 내가, 과연 나에게 해방이 뭐냐? 해방돼서 얼마안돼 제나라의 사유, 역사, 말 일체 몰랐단 말이야. 조국에 기여하나 못했고, 며칠 안 돼 미군정이 되어 조선총독부 복귀령 내리고 민족반역자들이 돌아서지 않았나. 얼마없어 총독부 법률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어코 4·3이 일지 않았나. 내가 무슨 해방이 되었나. 해방이란 뭐냐. 자기의식을 만들어낸 것, 근저에 있는 게 일본 말이야. 그 일본말로 내가 가진 감성 모든 것을 끊어야한단 말이야. 한글로 '가'자 하나 쓰지 못했고, 북소학교 1주일에 한번 조선 교과 있었는데 누가 가르치냐. 학생으로부터 멸시받았어. 2학년 때 중일전쟁이 터졌는데, 일본사람들이 쓸데없는 조선말을 배워서 뭐하냐. 조선 교과서란 것은 언제 없어져도 이상치 않도록 없어졌다니까. 나는 제나라 없어질 때도 아무런 관여도 못했고, 돌아올 때도 아무런 관여를 못했단 말이야.
열일곱에 해방되어도 우리말로 글자 못썼었다니까. 해방될 때까지 우리나라 글이 비인간적 취급을 당하는 것을 내가 몰랐단 말이야. 그만큼 일본말이 뼛속에 사무치도록 스며있었지. 오감에. 언어란 것은 의식인데 내 갇혀있는 것은 순 일본식 감성이 오체에 담아있단 말이야. 표준어와는 아주 먼 방언만이 나의 모어지. 말하자면 나의 시는 일본어와의 갈등 속에서 태어난 것이고, 그래서 읽는 이들이 편할 리 없는 일본어 시인 셈이지. 일본말로 장성한 내가 그 일본말로 일본을 벗어나는 게 해방이지. 일본이 선진국이라지만 일본처럼 시를 멸시하는 나라는 없어. 일본서 문학이란 것은 사소설이지.
내게 우리말이란 것은 내가 일본말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해서 비춰보는 거울이야. 그러나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우리말로 어려울거야. 다른 나라말로는 옮길 수 없는 것이 시니까. 때문에 시란 것은 오염을 당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쓰고 있는 말의 깊은 순결성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시란 말이지. 내가 일본말을 보존하는 것같이 들리지만, 기형적인 일본말이야. 나의 언어는 날 그리 키워낸 일본말에 대한 복수야. 나는 그리 몇십년됐어. 그리 선언했어."
# 거칠거칠하고 불편한 일본어 시에 매료
스스로 '황국소년'으로 자랐다고 자조적으로 말하는 시인. 그의 내면은 철저히 일본어의 정서로 무장되었고, 일본어는 완고했다. 해방후 그야말로 '손톱으로 벽을 긁는 심정으로 제나라의 언어를 가나다부터 배우기 시작했다'는 시인. "사고의 선택이나 가치판단이 조선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일본어에서 분광되어 나오는, 빛을 비추면 프리즘이 색깔을 나누듯이 조선어가 건져진다." 그렇게 해방은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왔으나 그는 분명 조국의 앞날에 대해 고뇌하는 젊은이었고, 짓푸른 감성이 뼛속을 후리고 있었다.
해방 전 축항공사를 하던 아버지와 제주시 도두리 출신 어머니를 따라 제주에 온 것이 4살 때. 해방된 조국, 미군정시대, 4·3으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인은 결국 부모님을 제주에 남겨둔 채 일본으로 건너간 것.
"일본말하고 인연을 끊었는데 할 수없이 또 일본에서 자랐지 않았나. 의지로 끊어진 말을 다시 잇는다는 것이 어떤 뜻이냐?" 1949년 이후 지금까지 오사카 조선인 밀집지역 이카이노에 정착한 재일의 삶. 그 이카이노, "거기선 다들 목청을 돋우고/ 지방 사투리가 활개치고/밥사발에도 입이 달렸고" "슬픔 따윈 언제나 날려버리는 동네/밤눈에도 또렷이 드러나/만나지 못한 이에겐 보일 리 없는/머나먼 일본의 조선 동네"('보이지 않는 동네'중)이다.
그에겐 회상하기도 싫은 시가 있다. 그와 양석일 등이 주도해 창간한 시 전문 동인지 「진달래」. 거기 연재한 시를 모아 내려던 시집 「일본풍토기2」가 총련과의 갈등, 「진달래」의 해산 등으로 와중에 원고마저 사산돼버린 것. 오랜 세월 원고를 찾으러도 가지 않아 떠도는 시가 되어버렸다. 근데 그 시들을 일본 대학교수들이 최근 다 찾아냈단다. 지독했다. '진달래를 읽는 모임'이 일본 각처에 있어서 그것을 영인본으로 만들어냈다.
또 하나, 연작시집 「광주시편」. 1983년 12월 탄생과 함께 자취를 감춰야 했던 수난의 시집이다. 한때 일본 문단에서는 노벨상대상이라고 해서 극찬했던 이 시집은 고 김대중 대통령도 읽었다는 작품. 그러나 아직도 한국어번역이 이뤄지지 않아 아쉽다.
"전두환정권은 「광주시편」 출간 이듬해 정초, 일본천황폐하의 사과를 받아야하기 때문에 이 시집을 내선 안된다고 두차례나 찾았지요. 우리 겨레사에 좋지않은 일인데, 출판을 삼가달라고. 우리가 책임지고 서울서 출판해주겠다고. 초판 3000부 찍었는데 출판사에서 짐 풀지도 않고 책이 도로 왔지.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기자에 의해 그 사실이 보도됐지. 책이 나오고 3주만에 없어졌다고."
# 시는 시대 평가의 혁명이자 현실인식의 혁명
그는 '정감과 서정'에 오랫동안 천착했다. 서정이란 것은 자기 정감을 제대로 비평할 수 있는 것. "내 존재의 증명이 내 시인 것이지. 시는 시대 평가의 혁명, 현실인식의 혁명입니다. 그리 생각하든 안하든 그 사람의 시대 비평이 증명하는 것. 말하자면 사고방식을 혁신하기 위한 창조. 의식의 변혁을 일으키기 위한 창조지요. 서정이란 것은 정감하곤 다른거지. 서정은 그 사람의 사상이다. 그런걸 우리말로 풀어서 알려야 되겠는데…다 살아부런 게."
시인은 1998년 50년만에 고향 제주 땅을 처음 밟았고, 2004년에는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2007년 NHK다큐멘터리 제작 때는 4·3의 영령들을 위한 개인굿을 치르며 아파했던 시인. "4·3은 내게 있어서 너무나 엄정하고 너무나 설움도 깊습니다" 4·3에 이르면 시인의 눈빛이 붉어진다. 그만해야 한다.
지난 5일, 시인을 다시 제주공항에서 만났다. 원기를 회복한 시인이 고향 선친의 묘와 풍경, 사람들을 눈에 담고자 잠시 왔다가 떠날 때였다. 오사카에서의 만남 후 두달 만이었던가. 떠나는 시인의 눈에 시린 세월이 흘렀다. 십일월의 청초한 하늘 위로 의지와 사상을 놓지 않고 살았던 시인의 맑은 꿈이 피어올랐다. 정녕 그런꿈을 함께 꿔본다. "고국과 일본/나 사이에 얽힌/거리는 서로 똑같다면 좋겠지//사모와 견딤/사랑이 똑같다면/견뎌야만 하는 나라 또한/똑같은 거리에 있겠지"(김시종 '똑같다면'중. 유숙자 옮김)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