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산악인 박훈규

 그래도 그에게 산은 삶이다. 그래도 그에게 산은 밥이다. 산소다. 아니다. 보고 또 보고 싶은 연인이다. 모든 삶에는 예고가 없다. 그 순간도 그랬다. 푸른 청춘 위로 덮친 벼락같은 눈사태. 1979년 5월29일은 영광과 절망이 교차하던 날. 한국인 최초로 북미 최고봉 맥킨리에 올랐으나 그의 생을 극한의 눈보라가 강타한 그날이다. 하산길, '에베레스트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과 대원 하나가 숨을 멈췄고, 그는 기적적으로 언 숨을 쉬었다. 다음은 살아남은 자의 고통. 열개의 발가락과 일곱개의 손가락이 사라졌다. 사투,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온 그는 희망의 숨결을 토해냈다. 화마가 휩쓴 숲의 자리에 자라는 나무처럼. 그를 대하면 희망이란 이름이 떠오른다. 그날 이후, 산은 늘 그와 함께 산다. 소년의 설레던 첫 산이 그랬듯이. 영원한 산사나이. '한국 산악계의 전설' 박훈규 대장. 그를 만난다.

 # 6개월만에 4·3에 연루 아버지 행불

   
 
 

 산사나이 박훈규는

 1948년 제주시 출생. 제주적십자 안전대장, 제주산악회 회장 역임, 고상돈기념사업회 이사장. '하얀 사슴의 노래' 사진전. 1977년 전국 산악인들을 대상으로 추려 구성된 '77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여. 1979년 난이도가 가장 높다는 북미 최고봉 맥킨리 등정. 1999년 제주도내 후배 산악인들을 이끌고 8000m급 거봉 히말라야 초오유 등반, 남미 최고봉 아콩카쿠아봉(6959m) 등반, 유럽 최고봉 엘브르즈 등반,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894m) 등정. 그가 늘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말. "산에 뼈를 묻어서는 안된다. 산에서 할 첫째도 안전, 열 번까지 안전이다."

 
 
1948년 '4·3둥이' 박훈규. 그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부재는 그가 태어난지 6개월 만의 일. 할아버지 닮아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아서 이것 저것 만드는 것을 잘했다. 바다하고 가까워서 작살질도 잘했다. 그 아버지가 친구들한테 작살을 만들어준 것이 화근. "어쩌다 4·3에 연루된 아버지 친구들 족치니까 이것도 무기 아니냐. 누가 만들어줬냐고 잡아들인거죠." 어이없고 기막힌 죄명. 아버지는 실형 받고 육지 형무소로 갔으나 한국전쟁이 터졌고 행불. 그때 아버진 스물넷이었다.

 어머닌 그 동네를 떠나지 않았다. 용담2동 흥운마을. 아들 하나 안고 그냥 살암시난 살았다. 그 어머니, 그 시절 얘긴 꺼내지 않는다. 그 아들도 묻지 않는다. "4·3쪽을 가기 싫어. 차라리 무덤이나 있다면. 전혀 나완 무관하다고 생각드는 거라. 내 마음이 아직도 안 열리는 거야. 지금도 어떨 때는 막 답답하고. 4·3공원도 한번도 안갔어요. 고기잡는 작살을 만들었다고. 참 어이가 없지." 아차, 괜히 물었다. 이 거인 산사나이도 말을 잇지 못한다. 그냥 산으로 갈 것을.

 # 중학교 시절 한라산에 빠져

 소년은 조숙했다. 한라산과의 운명적인 열애라니. 중2. 농사 짓고 우마들을 많이 갖고 있던 동네. 사람들이 한라산 아흔아홉 골짜기에 장작하러 가던 시절이었다. "나도 어쩌다 선배랑 선배 아버지랑 따라 처음 갔는데 산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그때 당시는 지들커(땔감) 목적이 아니라 그냥 따라간 거죠. 선배네는 점심밥으로 흐린 좁쌀을 가져 갔어요. 불땔 것도 많고 항고에 조팝을 했는데 그게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어." 밥맛이 그를 매혹시켰다.

 비오는 날, 그가 리더가 되어 선배들과 의기양양하게 한라산을 다녀온 때는 중3. '쇠 찾으레(소 찾으러) 가는' 산행. 이십대가 되어 제주산악회에 들어가기 전까진 그랬다. "일주일에 4번, 일년 100번은 한라산을 올랐죠."

 # 어머니, "용수에 강 날 먹돌 들이청 가라"

 "용수(용연)에 강 먹돌 묶엉 날 들이쳐두고 가라."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든 한마디. 에베레스트의 발목을 붙잡은 이는 어머니였다. 에베레스트보다 높은,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어머니란 이름의 산. "점심 저녁 밤에도 날 감시하는 거라. 등산 장비 쌈시냐. 못간다." 24시간 감시체제. 그를 대신한 18명의 대원들은 에베레스트로 갔고, 그는 자기만의 방황에 시달렸다. 한라산으로만 갔다.

 에베레스트! 1976년 2월16일 에베레스트 도전을 위한 '77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설악산 훈련도중 그는 갑작스런 눈사태로 동료 3명을 잃는다. 거기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그는 두명의 동료를 구했다. "무뽑듯 동료를 눈속에서 끌어낸 건 초인적인 힘이었죠." 신문엔 그도 죽었다고 오보가 나오기도 했다. 그 사고로 1977년 고상돈이 에베레스트에 오른 원정대의 본대원 18명 중의 한 명이었음에도 함께 떠나지 못했던 것. 그 시절, 부친의 내림인지 손재주가 좋았던 산사나이 박훈규. 망치 하나 갖고 뭐든 뚝딱 만들어내던 그때 그를 선배들은 그렇게 불렀다. "야 제주도! 힘좋고 손재주 좋은 놈." 그래도 당시 김영도 77에베레스트 대장은 지금도 모임에 가면 77대원 취급을 해준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그랬다. "너 장가만 간 후에 맘대로 해라. 당신이 열아홉살에 결혼해서 정뜨르까지 내려와 남편도 없이 아들하나 믿고 사는데…그런거지. 장가만 가라."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사나이 고상돈이 카퍼레이드를 할 때, 그는 앞좌석에 앉았다. 그때 어머니는 상당히 미안했던 듯. 지금도 어머니와 아들은 그 얘기를 안하는게 불문율이 됐다. 

 # "맥킨리 끝나면 히말라야 미답봉 섭렵하자"

 1978년 제주에 내려온 고상돈. 그에게 제안한다. "다음에는 나와 외국가자. 외국 산." 꿈같았다. 당시 비자발급 받고 외국에 간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맥킨리라고 안 것은 서울 청계천 고가도로 위를 달릴때였지. 상돈이가 그랬지. 맥킨리다. 어디있는 산이냐? 북미 최고봉이다."

 그렇게 간 맥킨리였다. 그때 당시 "상돈이랑 야, 맥킨리 끝나면 히말라야 미답봉들을 우리 두루 섭렵하자. 좋다" 이랬다. 허나 맥킨리 정상의 교신 후 세명이 1000m 아래로 추락한다. 멀리서 그들을 발견한 미국인 의사팀에 의해 그는 살아났다. 그를 두고 미국 앵커리지 의사들은 '동양의 불사조'라고 했다. 그의 사례는 미국 의학잡지에도 실렸다. 의사들은 기다리면 손가락 발가락 다 살릴 수 있다고 했다. 병원서 한달. 그는 귀국을 고집했다. "한국 올때는 손 다 있었어요. 한 마디만 거뭇거뭇 죽었지. 이렇게 정리할 게 아니었는데." 당시 동상에 대한 우리 의료기술은 무지에 가까웠다. 결국 발가락 손가락이 정리됐다. 단지 손가락 세 개 남겨두고.

 처음 일년은 죽고 싶었다. 자포자기. "다다미방에 거꾸로 엎어 놓으니까 기라고 하니까 기지도 못해. 죽고 싶어도 힘이 없어."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아들이 태어난 것. "살아야돼." 의지를 붙잡는 순간 의사들이 놀랐다. 하루 하루 다르게 회복하기 시작한 것. 손가락 다 굳어버린 것을 다 펴려니까 뼈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48시간 안 움직이면 다 붙어버린다했다. "물리치료 받으려면 죽는거야. 이쪽 무릎도 오그라지지도 펴지지도 않고 4∼5개월 그냥 있으니까 굳어버린거라. 펼 때는 뼈가 빠드득빠드득 소리가 나. 이게 고문이야." 그래도 속으로 소리쳤다. "살아야돼. 살아야돼."

 # "손가락 세 개 남겨주셔서 신이시여 고맙습니다"

 그의 삶의 절대적 존재는 어머니. 살면서 한없이 고맙고 미안한 이는 아내다. 임신한 아내를 두고 유언장을 써놓고 떠났던 맥킨리였다. 그녀에게 온전한 몸을 보여준 것은 단 3개월이던가.
두 번이나 마의 산에서 살아남은 그는 산에서 치유를 받는다. 쓸쓸해도, 몸이 찌푸둥한 날도. 그러고보니 모든게 고맙다. "발가락 없어도 산에 오를 수 있고, 이걸로 밥 먹지. 한쪽 손으로 낚시 미끼 꿸 수 있고 뭐든 만들 수 있어. 술 잔 들어도 안 떨어지지. 신이 이렇게 만들어 준거다. 절대신이 있다면 말하고 싶어요. 손가락 세 개 남겨주셔서 신이시여 고맙습니다." 

 그런 기억탓일까. 그에게 산행 일조는 안전, 백번째도 안전이다. "산은 오르면 내려와야 하는 걸 잊어요.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에베레스트도 200~300m 남겨두고 오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산악인입니다. 몇 년 동안 준비해서 왔는데, 몇 백m 가면 되는데 하다간 자칫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죠. 다음에 오자. 이 돌아서는 용기가 최고의 용기입니다." 또 하나. 극한 상황일수록 나는 너를 배려해야하고, 너는 나를 이해해야한다. 한라산도, 에베레스트도, 히말라야도 그렇다. 그러다보면 얼음을 어떻게 올라가는지를 알게 된다.

 # 고상돈 추모 조명, 진정한 등반가는 "열정"

 지금도 그는 산에 가지 않는 날은 오름을 찾는다. 원정등반 없을 때는 백두산을 찾는다. 일년이면 서너차례. 카메라를 들고 백두산을 찾은 지 벌써 10여년. 백두산과 언저리의 꽃을 찍는다. "무조건 좋으니까 가는거죠. 백두산에 빠진 좋은 친구 안승일 따라서."

 그는 올 봄, 또 히말라야로 간다. 물론 정상 욕심은 없다. 작년에도 베이스캠프까지 트레킹했다. 그는 그 곳에서 느림의 미학이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잘 걷는 척 졸락졸락하면 쓰러져요. 트레킹 코스도 4000~5000m죠. 누구든. 자칫하면 폐수종 뇌수종이 와. 천천히 천천히 자연에 순응하면서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루에 가는 코스도 한 15㎞ 넘지 않아요. 살기 위해서죠. 그러니까 느림의 미학이 거기서 온거라니까. 그래야 자연도 잘 보여. 한라산도 그래요." 진정한 등반? 극복해내야 할 삶과도 같은 것 아닐까. "어느 사람이 산을 잘 탄다는 것은 그 산에 대한 열정이죠. 열정을 가진 사람은 절대 오르게 되어있어요. 나는 못가. 그건 못가는 사람이고. 모든 산은 인간이 오를 수 있어요."

 살면서 산 벗들을 많이 떠나보냈다. 산악 선구자이자 그리운 친구 고상돈. 그에 대한 진정한 조명을 하고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그가 이사장을 맡은 고상돈기념사업회에서 내놓은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은 그런 의미가 담긴 값진 결과물. "고상돈은 세계 제일 높은 산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갔다온 사람이며 희망을 준 사람입니다." 그는 또 꿈꾼다. 전국 산악인의 발을 프린트해서 1100도로에 갔다놓고 싶다. "40∼50년 되면 제주도가 산악명소가 될 수 있죠."

 많은 후배들이 따뜻하고 유머있는 선배, 그를 따른다. 바닷가 소년으로 자라 산처럼 초월한 눈빛, 그래도 스산함이야 어디 가시겠는가. 돌아서는 그의 등 뒤에 산 하나가 성큼 다가선다. 바다는 안개를 서서히 걷고 있었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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