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만난사람] 재일 음악가 한재숙
마음 놓고 조선의 '아리랑'을 부를 수 있다면. 식민지 소년시대. 슬픈 가야금의 선율이 가슴을 적셨다.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 예민한 음악적 감성을 타고난 소년에게 바람속 노동요와 무가는 가슴을 뒤흔드는 음조였으리. 4·3의 혼란기, 위험을 감지한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자를 똑딱배 태워 검은바다를 건너가게 했다. 해서 고향에 가면 살아있는 것이 부끄럽다는 이 음악가. 4·3대학살의 마을 제주시 북촌리를 고향으로 둔 음악가. 못다한 그 노래들을 타국의 동포들에게 전하고 있는 재일동포 원로 음악가 한재숙. 그는 일본에서 여성합창단을 이끌며 음악을 통해 민족의 혼을 심는다. 그를 만났다. 일본 나라현 자택에서. 피아노 앞에 앉은 노음악가에게서 맑은 열정이 느껴졌다. 그는 지금도 시대와 삶 앞에 놓여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슴 한구석에 넣고 살고 있었다.
# 일본 무대에 선 '아리랑', 객석의 눈물 뽑아내

그가 대표인 오사카 민족음악연구회가 주최한 '아리랑'은 그렇게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다음해도 그랬다. 오사카, 도쿄에서. 1993년 다섯 번째 아리랑의 밤이 오사카에서 열렸다. 남북 작곡가들에 의한 작곡과 실내악의 밤이 그것이다.
당시 도쿄 '아리랑의 밤'에 참석한 한 일본인 공동통신 기자의 사연은 그를 감동시켰다. 일제시대 조선마을에 가면 조선인 친구의 어머니가 밥을 해주었단다. "정월달에 모여 한 잔 마시고는 순번대로 노래를 하는데 그 조선 친구는 벽을 향해서 '아리랑'을 부른대요. 울면서 말이지요. 눈물을 일본 친구들한테 보이지 않게 하려고. 매년 그렇게 한대요. 그 기자도 그 친구의 노래에 눈물이 콱 난다고. 일본에 있는 사람들이 부르는 아리랑은 그런 아리랑입니다. 본토에서 그렇게 벽을 향해서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 '해녀의 노래' 노동 떠올리며 곡 써
그가 제주민요 악보집을 꺼냈다. 촘촘하게 그려진 악보. '해녀의 노래'다. "북촌은 해녀활동을 했고, 일제시기 순사들하고 싸우는 이들이 북촌에 많았어요. 그런 곳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해녀의 노래도 상당히 신경을 썼어요. 어릴 때 기억입니다. 어느 해녀분이 너무 깊은 데 들어가서 잠수병에 걸렸나 봅니다. 여름에 불 때고 그러다 결국 그 분이 돌아가셨어요. 깊은 곳에 들어가서 전복을 발견하고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목숨을 걸고 하는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그런 노동을 떠올리면서 곡을 쓰지요. 2002년에 한번 발표했지만 좀 더 힘썼으면 하는 그런 반성을 남기면서 했어요."
누가 제주도민들의 힘찬 삶을, 견딤 속에서 표현한 이 민요를 얇은 음악이라 생각할 것인가. 그 사람들의 그런 정신을 어떻게든 살릴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라는 이 노음악가. 타국에서 부르는 윤용하의 '보리밭'도 다른 느낌이란다.
일본에서 여성합창단을 지도하며 민족교육에 헌신하고 있는 한재숙. 여성합창단은 3세들이 참여하지만 열정적으로 발표회도 갖는다. "제주도 민요, 이걸 진행하고 싶다 생각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흘러간 노래 있잖아요. '눈물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 같은 것. 우리나라의 가곡이라 생각합니다. 그 당시 그 곡들이 많은 역할을 했어요. 사랑과 이별이 있지만 그 곡들이 전부 다 듣는 사람들에게 고향 사랑을 하게 했고…."
# 조부모 아래 자라던 외로운 소년, 가야금에 반해
아이는 제주시내에 진을 친 유랑 서커스단의 공연을 보러 몰래 철조망을 넘어서 갔다. 바지가 걸려 쫙 찢겨가면서도. "두루마기를 입은 한 청년이 현악기를 연주하고 있었죠. 악기가 왜 이렇게 우는 것 같이 들리는가. 왜 이 악기가 우는가." 세상에서 처음 소년을 매혹시킨 악기. 그것은 울음소리였다. 슬픈 리듬으로 아이에게 온 그 악기. 우리 가야금. 스물아홉에 첫 딸을 낳자 그는 딸 이름을 '가야'라 지어줬다. (딸 한가야는 재독피아니스트가 되었다.) 예술이란 때로 결핍 속에서 탄생한다. 그 역시 어려서 양친 품에서 자랐으면 음악을 안했을지도 모른다. 바다에서 죽은 영혼을 부르던 굿의 리듬이 처연하게 감돌던 시기가 그때였다.
소년의 마음을 강하게 흔든 것은 오사카의 중3때. 친구집에서였다. 라디오로 흘러나오던 목소리. "'인간의 목소리로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프라노인 스나하라 미치코가 부른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의 1곡인 '보석의 아리아'란 곡이란 걸 나중에 알았죠. 그땐 음악 말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죠." 오사카 음악학교에 진학하고 음악인생이 시작됐다. "고향이 그리워서 몰두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고, 음악으로 표출됐지요."
아버지는 일본에서 인쇄일을, 대마도까지 출가 원정 다니던 해녀 어머니는 집을 비웠다. 섬에 남겨진 그는 형과 조부모의 밥을 먹고 자랐다. 그런 외로움이 그를 음악의 길로 들어서게 했으리. 해동에서 함덕국민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학교에선 역사시간에 역대 천황의 이름을 모두 암창 시켰다. 모국어가 금기였던 시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은 자유였다. "자기말로 하면서 돌아가잖아. 그때가 제일 편안한 거라. 그만큼 철저하게 일본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었어요. 그 후 한국에 가서 이 강산이 이렇게 넓게 있었는가 이해할 수가 없을 때가 있어요."
어느날, 태어나서 본적이 없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태극기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풍경. 조부모가 제주시내로 이사를 한 것은 그가 5학년때. 그도 제주북교로 전학을 갔다. 강당에서 풍금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년은 설렜다.
# 4·3의 복판에 똑딱배 타고 고향마을 떠나
이사한 건입동 초가집은 방이 많았다. 섬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할아버지는 빈 방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줬다. 어느 농고생 삼촌 조카가 살았다. "어느날 재숙아 산에 가서 볼레 따고 온다"하고 나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없어 발발한 4·3으로 제주섬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때문에 얼마후 집주인인 할아버지가 연행되었다. 새벽이 되어 발을 질질 끌며 힘없이 돌아온 할아버지. 그날 이후 꼭 문을 잠그고 항상 쫓기듯 했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형제를 불러 일본으로 피난가라 했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가고 싶지도 않다고 엉엉 울었다. "아이고, 이놈의 새끼"하며 할머니도 울었다. 1948년 10월말이었다.
"할머니가 시든 갈치를 큰 대야에 넣고 선장한테 주어서 저를 보냈어요. 똑딱배 타고 와서 살았는데 일본에서 자랑할 만한 게 없어요. 마을에 가 봐도 어릴 때 내 친구들이 없어져서 미안한 생각이 있지요. 나는 팔자가 좋아서 살아나고. 고향에서 서귀포를 향해서 산을 넘어 갈 때는 역시 괴로워요. 중산간이 크게 당했으니까.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은 다 죽어불고."
결국 1949년 1월 19일 북촌리의 대비극을 오사카에서 들어야 했다. 그의 어머니, 할머니도 그날 그렇게 희생됐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친족이 시체를 발견하여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형제는 조부모의 판단으로 간신히 산자가 되었으나, 강렬한 고향의 기억은 그를 몸서리치게 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선명한 4·3의 기억. 제주시 동문통 재생병원 앞에서 피묻은 이불을 쌓은 트럭. 그 소리와 붉은 색. 어릴때 친구들은 거의 다 희생됐다. 사촌은 죽은 어머니 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매년 음력 12월 18일이 제삿날. 그도 오사카에서 제사를 지낸다. "그러니까 난 여기와서 살지만 자기 고향에서 자라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 "일년에 한번 동포들끼리 한복입고 세배했으면"
오사카에 오랫동안 살던 그는 몇 년전 나라현 이코마에 와서 집을 지었다. 제주도다운 분위기를 찾다보니 그랬다. "이 지역에 굴이 있는데 이 굴을 만드는데 조선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근처에 작은 절이 많습니다. 그때 돌아간 사람들이 결국 거기서 살아있는 셈이지요." 그는 요즘 제주도 꿈을 자주 꾼다. 60년 만에 제주에 가서 만세동산에 올라갔는데 크게 변했다. "이번에 가보니까. 일본에서 몇 십년 살고 있으면 잊어버리지 않나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북소학교 다닐때 동문통 시장이 벌판이거든요. 태풍이 오면 야단이 났던 기억이 나요. 제주도는 비가 오면 땅속으로 전부 다 스며드는데 아스팔트하니까 태풍 때 물난리도 심하지요. 가난 속에서도 제주도 사람들은 토지란 것을 알아서 살아왔는데, 그걸 연구도 안하고 관광지다하면서 만들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가 품고 있는 오랜 꿈. 한때 4·3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일본에서도 그에겐 금기어였다. 허나 정부차원에서 진상규명되는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본다. 그 또한 분명 살아낸 자가 할 몫이 있었을 게다. 어릴때부터 제주말을 하던 아버지와 피아노를 함께 치던 딸 가야도 같은 꿈이다. 딸이 그랬듯이 아버지도 세월이 흐른 지금, 제주도의 비극이 음악을 통해 세상 밖으로, 세계를 향해 나가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더 이상 비참한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꿈 말이다.
성악가이자 작곡가·지휘자이기도 한 음악가 한재숙. 타고난 그의 음악은 고향의 바람속에서 배태된 것이 아닐까. 그는 화가이기도 한 아내 현정자와 함께 예술가족을 이뤘다. "오사카와 제주도가 제주민요를 통해서 더 힘있는 교류를 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 하나의 꿈. 일년에 한번만이라도 두루마기 입고 동포들끼리 서로 서로 세배를 했으면 하는 것. 그 소박한 꿈. 이룰 수 있는 것 아닐까. 어둠이 깔리는 역까지 그가 배웅을 했다. 바람이 일었다. 바람은 다르지만 그는 거기서 고향바다의 음조를 듣는 듯 했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