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잠녀를 만나다' <156>] 소리를 따라-명창 박순재씨

   
 
  ▲ 미역 해경기를 맞아 바다로 나가는 잠녀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발췌  
 
대상군 어머니 밑에서 바다 배워…아기상군·고래상군 등 ‘머정 좋다’꼬리표
어머니 빈자리 채우기 위해 소리 시작, 지금은 딸까지 3대에 걸쳐 이어져

‘대상군’인 어머니는 어렵지 않은 생활에도 딸을 바다로 보냈다. 딸은 그런 어머니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바다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했다.

소리를 잘 했던 어머니는 딸이 자신을 잇기 바라셨다. 주변의 반대 등으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딸은 지금 당신이 살아 계실 때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렇게 어머니와 딸은 조금은 다르지만 같은 삶은 살고 있다. 그리고 다시 딸에게 바다는 물려주지 못했지만 소리를 남기고 있다.

△머정 좋은 아기 상군

   
 
  ▲ 명창 박순재씨  
 
김녕 출신의 박순재씨(63)는 당시 딸들이 그랬듯이 어머니를 따라 바다에 갔다. 대상군으로 해녀회장이며 대한부인회회장 등을 맡아 활동했던 어머니(고 양승옥)의 그늘은 넓고 짙었다.

‘머정이 좋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들었던 박씨는 아기상군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열 여덟 살 되던 해 어머니와 함께 울산으로 바깥 물질을 나갔고 이듬해부터 혼자 돈을 벌러 바다를 건너갔다.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울산에서의 물질은 쉽지 않았다. 2월 그믐경에 물질을 가서 미역, 전복, 성게 등을 작업했고 소꼴을 벨 무렵인 8월에 돌아와 꼴을 벤 후 9월에 다시 돌아가서 ‘앙장구’ 작업을 했다. 겨울이 들면 제주에서 4개월을 지내거나 ‘해묵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7~8월 ‘신마정’이라는 기간의 얼음같이 찬 바다는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처질 정도다. 물 위는 따뜻한데도 물 속은 얼음이 얼 정도로 수온이 낮아 짐은 울산에 두고 솔머리 등 전주(뱃사공)가 가르쳐 준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일도 적잖았다.

가지고 간 보리살과 좁쌀로 밥을 했다. 반찬이라곤 된장이 고작이다. 열 여덟이 지나서는 구룡포로 바깥 물질을 갔다. 그때 독도 바다에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 고 양승옥씨  
 
독도 땅을 밟아보지는 못했다. ‘솔짝치기’라고 발동기를 타고 독도 바다에 가서 모르게 작업을 하고 몰래 돌아왔다. 박씨는 “새벽 5시에 발동기를 타고 가서 동 틀 무렵인 6시쯤 물에 들어갔다”며 “20분만에 한 망사리는 충분히 조물었다”고 회상했다.

소라도 지천이었지만 돈이 되는 전복만 잡았다. 껍질에 감태가 수북한 ‘머드레 생복(실력 좋은 사람이 잡아오는 큰 전복)’을 잡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바다를 뒤로 하고

그런 박씨는 생각보다 일찍 바다를 접었다. 그의 나이 35살 때 일이다.

“돈을 하영 벌었다”는 주변의 시기는 중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던 남편을 대학까지 보내 번듯한 직장에서 일하게 했던 일과 남동생의 대학 졸업장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

남편 직장을 따라 제주시로 옮기고 나니 어촌계원이 아니라고 물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사촌동생을 대신해 작업을 했지만 탑동 매립으로 오래지 않아 그만뒀다. 머리띠까지 매며 바다를 지키러 나갔던 것도 이젠 옛 일만 같다.

19살에 상군 소리를 들으며 김녕 대표로 물질경연대회에 참석, ‘물 속에서 오래 숨비기’  ‘빨리 물건 많이 따기’에서 일등을 해 쌀 한 가마니와 광목 두통을 받은 일도 추억으로만 남았다.

“미역이나 성게는 돈이 됐고 소라는 잡아다 떡과 바꿔먹었다”는 얘기에 고개를 갸웃하는 기자의 표정에도 그냥 웃고 만다.

박씨는 “모처럼 고향에 가서 송키 미역(미역을 조물고 남은 부분 또는 국거리용) 작업을 하러 바다에 나갔다가 타리에 나간 사람이 물질을 한다며 타박을 받았다”며 “들고 갔던 콧박 테왁까지 부숴 버리는 등 홀대가 심해서 다시는 바다에 가지 않겠다고 한 게 이렇게 됐다”고 털어놨다.

천초 작업을 할 때는 테왁 두개를 능숙하게 이용하며 채취량도 많아 ‘고래상군’  ‘고래쟁이’라고 불렸는가 하면 지역 대표로 물질대회까지 나갔던 그였던 만큼 상처도 깊었다.

△후렴 따라 하면 선창도 한다

“…우리네 인생은 해년마다 소곡소곡 다 늙어 간다…요 강산이 뭐시 좋아 도람들멍(달려 들어) 나 여기 왔다/여끝 돌끝에 내 눈물이여/한숨을 쉬면 동남풍되고/눈물을 흘리면 한강수여…”

박씨는 지난 2005년 ‘명창’이란 호칭을 얻었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아쉬워한 한 지인의 권유로 지난 1985년 전국 민요 경창 대회에 참석해 입상한지 꼬박 20년만의 일이다.

자신이 이렇게 소리를 하고, 딸이 자신을 이어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박씨의 어머니 양승옥씨는 ‘멸치후리는 노래’를 잘했다. ㈜브리태니커사에서 그 목소리를 녹음했을 정도다.

“소리를 배우지 않겠냐”는 말은 어릴 때부터 들었다. 밭에서 검질을 매며 어머니가 풀어내던 소리는 그대로 귀에 와 박혔다. “후소리를 받아 보라”는 말에 ‘ 래  는 소리’를 배웠다. ‘밧볼리는 소리’를 할 때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냥 후렴을 받았다. “후렴 받아 가면 선창해진다”는 어머니의 말은 그렇게 현실이 됐다.

‘노젓는 소리’며 ‘방애찧는 소리’며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1984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박씨는 지금도 “그 때 왜 잘 배워두지 못했나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창민요는 어머니와 맺은 형제인 김지옥 선생에게 배웠다.

처음 참가한 전국민요경창대회에서 우수상을, 이듬해에는 최우수상을 받는 등 상이란 상을 휩쓸었다. 지난 2005년 전국제주민요경창대회 대상 수상으로 ‘명창’ 칭호을 얻고 제주도예술인상까지 받고 나니 어머니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

그런 아쉬움은 이제 딸이 채우고 있다. 딸 한유심씨(38)는 2007년 전국제주민요경창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제주의 젊은 소리꾼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제는 손자와 손녀가 자연스레 한 무대에 오를 정도다.

테왁 장단에 맞춰 ‘해녀놀이요’ 한 곡조를 뽑아낼라 치면 멀리 어머니가 손장단을 맞춘다. 옆에는 딸이 후소리를 받고 분위기를 이끈다.

매일같이 지난 1991년 자신이 창단한 탐라예술단에서 사람들을 맞는 박씨는 “사라지는 것이 아쉬운 만큼 지키려는 생각도 강해진다”며 “그것이 소리를 내는 힘”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