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탤런트 고두심

 걸었다. 구석구석 고향길을 밟았다. 물집이 터지도록. 걸으며 눈으로, 가슴으로 느꼈다. 어머니, 고향의 대지를. 시월의 바닷바람을. 햇볕, 모퉁이에 핀 풀꽃들…. 감동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어려선 몰랐던 제주의 길. 7박8일, 204㎞. 고교 졸업 후 고향 품을 떠났던 앳된 소녀는 이미 이름만으로도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공인하는 국민배우가 되어 있었다. 제주도라면 몸서리치게 편애하는 사람, 그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 고두심! 연기인생 30년을 자축하며 의미 있게 걷고자 했던 2003년, 그 즈음이었다. 이 국민배우에게 또 다른 헌신성이 들어온 것은. 말로 사랑 사랑하지만 왜 사랑하고 있나 알고 싶었다. 걷는 사유가 그랬을까. 그때 그것이 왔다. 김만덕의 정신, 그것이. 우리 시대 흔들림 없는 국민엄마 고두심, 김만덕기념사업회 상임대표, 그를 만났다.

 1951년 제주생. 제주여고. MBC 5기 탤런트로 뽑혀 1974년 MBC 드라마 '갈대'로 데뷔했다. 드라마, 연극, 영화 등을 넘나드는 한국의 국민배우. '질투'로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여우조연상, 대종상. 1989년 KBS 연기대상 대상('사랑의 굴레'), '춤추는 가얏고'로 MBC 연기대상,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1991년 MBC 연기대상, 1998년 MBC 자랑스런 탤런트상. 2000년 SBS연기대상('덕이'), SBS연기대상 빅스타상. 2001년 MBC 연기대상 특별상, 제31회 한국방송대상 탤런트상('꽃보다 아름다워') 2004년. '한강수타령'으로 MBC 연기대상 대상, 2004년. KBS 연기대상 대상 등. 22년 출연한 '전원일기'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고, 여러 연기상을 받음. 1997년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 2007년 옥관문화훈장 등 수상. 최근 방영중인 '거상 김만덕'에 이어 6월19일부터 방영되는 KBS 2TV 주말 드라마 '결혼해주세요'에서 우리시대의 보통 어머니로 출연한다.
 "누구나 잠재적으로 굉장히 많은 것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서 내 안의 것을 얼마만큼 끄집어내 쓰느냐 하는데 달려 있죠. 내가 선택한 일이고, 지금도 좋아하는 직업이니까 근 사십년을 몰두할 수 있는 거예요." 한결같다. 제주사랑과 일에 대한 열정도. 세월을 가리는 저 미소도. 과장일까. 안방 극장 시간이 그녀의 얼굴과 함께 흘러갔다면. 거기엔 22년 전원일기의 수수한 맏며느리, '춤추는 가얏고'의 멋진 춤사위의 제주여자가 있었다. 뿐인가. '잘났어 정말'의 잘난 여자, 소름돋게한 눈물의 치매 엄마, 빠글퍼머 살랑대던 춘자씨가 있었다. 구름처럼 '천의 얼굴'을 보여준다는 배우 고두심. 그가 있었다. 달인 엄마에서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여대통령까지. 그 원동력은 어디서 온 걸까.

 카메라 불빛만 보면 정신이 번쩍난다 했다. 몸이 아파 너덜너덜 피곤하다가도 온 정신이 집중된다 했다. 천상 배우 고두심. 방송사 연기대상만 다섯차례 휩쓴 상복 많은 탤런트. 그런 그가 언제부턴가 아주 마음을 주는 이가 있다. 바로 김만덕이다.

 # 주말 드라마 '거상 김만덕'의 멘토 역 '할매'

 "만덕? 한마디로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살다가는 거야를 보여준거지." 거상 김만덕의 할매가 곧 만덕의 화신이 아닐까란 물음에 답한다. 어느새 종영을 앞둔 '거상 김만덕'에서 그가 맡은 할매는 주연은 아니었으나 극의 시작과 전개를 이끌어간 인물이었다.

 "만덕이 아니어서 아쉽다고도 하지만 만덕 정신을 보다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헷수다. 만덕의 멘토지만 사실은 만덕이나 할머니나 정신이 똑같은 거죠. 그것을 주지시키려고 만든 인물이고 사실 헷갈리더라고. 처음에는. 나중엔 만덕할머니 정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되새겨지면 되지 않겠느냐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드라마에서 이처럼 나오다 중간에 사라지는 역을 해본 적이 없다는 그지만 이번만은 예외였다.  

 김만덕이 누구던가. "이 세상 사람 모두가 다 나의 동포이거늘, 하물며 한 섬에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랴? 재물이란 벌 때와 쓸 때를 알아야 하거늘 내 어찌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가 되어 내 눈앞에서 굶어죽는 사람들을 보고 구제하지 않겠느냐?" 했다던 조선의 제주여자 아니던가. "아무때 죽어도, 작가 손에 죽는데도 아무런 불평이 없는 거야. 김만덕 이름만 걸려있으면 내 일, 내가 그냥 하는 것. 그동안 사장되어서 밖으로 끄집어 내지 못했던 인물을 밖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신이 난 거야."

 '거상 김만덕' 촬영 현장에서였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장렬한 죽음이 임박해가는 어둠속 신, 촬영장 바깥쪽은 차가웠고, 그 안쪽은 조명 열기로 뜨거웠다. 한 번의 엔지도 없이 그녀의 대사가 흘러나왔다.

 # 나눔과 봉사 실천은 나를 닦는 일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만덕할망 만덕할망 하니까 좋은 할망인가부다 그랬죠." 진짜 제주도 할머니였구나를 느꼈던 것은 1978년. 그가 주인공 김만덕을 맡았던 일일드라마 '정화'를 찍으면서. 우연일까. 그때 마지막 녹화를 끝내고 여기(모충사 기념탑) 와서그도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제막식에서 줄을 잡아당겼다니.

 본격적으로 김만덕의 마음줄을 붙잡게 된 계기는 7년전 제주사랑 제주도 걷기. "제주를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하더라도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사랑하는 걸까. 걷는 일을 기획하고 서울의 정형외과 원장 양원찬씨 등 지인들한테 의논했어요. 뭘 좀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데 하니까 좋은 생각이다. 해서 걸었죠." 마음으로 걷고 두 발로 걷는다는 것은 새로운 자기안의 무엇을 발견하게 하는 것. 그러한 동력이 모아져 사단법인 김만덕기념사업회가 발족됐다. 만덕 역시 조건없이 하지 않았는가. 그는 스스로 다 털어가면서 일하는 기념사업회 사람들이 고맙다. 모두가 만덕할머니가 살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번에 추사의 '은광연세' 현판을 기증한 분도 사람이라면 대인이야. 이렇게 활동하는 것을 보고 부끄러웠다잖아요. 이 일을 하면 할수록 늪에 빠진 기분처럼 무슨 일이 성사가 돼요. 또 손을 베풀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어디 급식소 가서 밥을 한그릇 떠주는 일을 한다해도. 내가 실천함으로써 내가 행복한 것. 이건 다 나를 위한 일이지. 만덕할머니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야. 나를 위해서 하는거지. 나를 닦으려고 하는거지. 곱게 하다가 가는 거지뭐."

 # 큰 정신 만날 수 있는 김만덕 기념관 필요

 김만덕? 화폐의 인물 선정 때만 해도 갸우뚱 하더니 이젠 아니다. '만섬쌓기' '거상 김만덕'도 있으나 그가 꼽는 가장 큰 성과는 올해 김만덕이 중학교 교과서에 등재된 것. "어릴 때부터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안착을 시켜야 되는 거지. 하루 아침에 성인이 된 다음에 해봐야 실천이 안되죠."

 김만덕기념관 설립이 시급하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옛날 유품이나 보관하겠다 이것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큰 정신을 가진 사람을 만덕관에 들어와서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도장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면 하는 거란다.

 사업회는 베트남에 학교를 세우는 계획도 갖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께서 세계 빈곤퇴치의 하나로 우리의 정신과 김만덕 정신이 함께한다고 했듯이, 할머니 정신은 우리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인류애로 번져나가게 해야 하는 정신이 아닐까 싶어요."

 제주도를 보란다. "나는 옛날에 밭 한가운데 산담을 보면서 우리 선조들이 상당히 지혜롭고 인정이 많고 결이 고운 분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저기가 명당이라고 생각하면 남의 밭에 가서라도 산소로 썼잖아요. 묻히고 싶으면 묻히게 했어요. 자기네 밭에 있는 산소가 꼭 자기네 조상 아니예요. 그런 풍습을 봐도 제주도 사람들은 다 고운 사람이예요. 이제는 안그러지만. 또 하나 좋은 풍습은 자기 수족이 움직일때까지는 의타심을 안 갖는 것, 그러면서도 서로 나눠 먹잖아요. 낱낱이 보면 척박한 상황에서도 사람다운 냄새를 풍기며 살아온 아름다운 풍습들이 너무 많아요. 지금은 힘든 풍습 하나 있는데 부조금을 식구수대로 한사람씩 주는 것, 옛날엔 없는 살림에 보탬 주고 싶은 것, 그랬지요."

 # 초등학교 때부터 연기의 싹 보였던 춤꾼

 싹수가 보였다. 그가 살던 두뭇골(남문통)에 아이들을 불러모아 안무를 한 것이 초등학생때. 빈 집이 아닌, 할머니 할아버지만 사는 집, 무대처럼 장방에 올라서 집집마다 다 다니면서 또래애들을 장악해 공연을 했다. "엄마들 한복 치마 몰래 갖고 와서 요렇게 묶어서 이렇게 해야된다 그렇게 했다니까요." 3남 4녀중 다섯째. 농토를 사랑하던 부모의 괜찮은 딸이었다. "공부나 잘해서 반듯한 직장 생활 했으면 한거지. 완전히 다른 길로 가는 것을 보고 잘못해서 니나노집 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했을까? 굉장히 명랑하고 긍정적이고 그런 애였죠."

 중1부터 제주여고 3학년 때까지 가장 잘한 것은 한국춤. 그는 당시 무용을 가르쳤던 스승 송근우 선생이 아니었다면 그의 오늘이 없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춤추는 가얏고'에서 춤사위가 남달랐다고 평을 받은 것도 그때 닦아놓은 기량덕이다. "송근우 선생님이 제주 민속의 맥을 이었듯이 김만덕사업회도 전통자수 인간문화재 한상수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에 지금도 이어졌다고 봐야합니다."

 그가 '불만'이라는 이름을 몸에서 털어내고자 한 것은 몇 해전 빈곤의 그늘 에티오피아, 우간다 갔을 때였다. "걔네들은 아무것도 안 입었어요. 한달에 5000원을 벌기 위해 하루종일 새만 쫓는 아이가 있더라구요. 낭창낭창한 나무 꼬리에 진흙을 딱 붙여서 휘휘돌리다가 던지면 그것이 날라가서 새를 맞히기도 하고, 그런 일을 하루종일 해서 어깨가 너덜너덜해요. 너무 안쓰러워서 울다가 입고 간 옷들 다 벗어주고 왔잖아요."

 돌아오면서 마음을 다시 들여다 봤다. "이렇게 누리고 사는데 내가 무슨 불만이야? 그랬어요."

 # 노후, 고향 제주에서 한가롭게 보내고 싶다

 그에게 어머니는 종교였다. 가버린 어머니 미소가 너무 고와서 사무치게 그리운 딸. 그의 미소 또한 아마도 그 어머니를 닮았으리. "내가 간 다음에 우리 자식들 눈에는 어떻게 비쳐지고 있을까 생각해요. 그저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남쪽 중에서도 남쪽에 내가 태어났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고, 그런 부모의 몸을 빌려 태어난 것, 모두 감사한 일이죠."

 "노후에 정말 올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중요하고도 달콤한 행복이죠. 내려와서 조그만 움막집이라도 짓고 해서 친구들과 노후에 한가롭게 보내고 싶다하는 생각 뿐입니다."

 딸은 돌아보지도 않았으나 연기인이 되고 싶어하던 아들은 미국에서 행정학을 공부했다. 자식에겐 평생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라고 하고 싶어한다.

 "배우란 다른 의미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참 내가 좋아하는 일에 일생을 함께 하고 있다는 일이 고맙죠. 왜 이렇게 고마운 일이 많지."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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