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시인 이생진

# 결정적인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
"성산포에서는/남자가 여자보다/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그리운 바다 성산포'연작 중).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는 그를 '섬의 시인'으로 결정지어버렸다. 성산포 어느 할머니의 민박집에서 다른 시를 정리할 때였다. 앉으면 문 밖에서 바람소리 파도소리가 자꾸 시인을 불렀다. 그 바다가 시인의 가슴을 예리하게 훑었다. 파도처럼 시가 덮쳤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연작은 그때 나왔다. 그 시를 5인의 동인지 「분수」에 20편 발표했고, 자비로 500부를 냈다. 어느날 보니 대학 다방가 DJ들의 입에서 그 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인도 놀랐다. 70년대 후반 이후 시집은 수십년간 스테디셀러가 됐다.
성산포와 시인의 모교 서산 중앙고에도 그의 '…성산포'시를 새긴 시비가 세워졌다. 그도 모교에 제주도 분위기를 살리려고 제주산 돌하르방을 갖다 놨다.
그의 제주 순정은 한결같다. 10년 동안 새해 첫날 일출봉에 올라가서 시낭송을 한다. 출발은 50여명 안팎이었으나 이젠 수천명이 모인다. 그가 사는 서울 도봉구에서도 갈옷 입고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낭송한다. 그는 시의 자유인이다. 방랑자다. 어디서든 읽고 싶으면 읽는다. 가슴 울리는 그만의 어조로. 그 시를 듣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저 행복하다.
"내가 늙고 그러니까 시로써 얻은 행복을 시로 갚아야겠다. 시에서 얻은 즐거움을 내 시로 인해서 그 사람들이 즐거워하면 얼마나 좋으냐. 옛날에는 고독하고 실의에 빠졌을 적에 시를 썼지만 지금은 오히려 행복을 낳았다 이런 생각을 해요."
# 한국전쟁 시기 제주도 모슬포서 군생활 인연
제주 땅과의 인연은 20대.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모슬포에서 3년 동안 훈련 받으러 왔다가 기관병으로 남게 되면서였다. "진중대학이라고 한국대학에도 다니고 공부도 하면서 지냈는데, 산방산·단산·모슬봉 다 환해요. 천지연 폭포 아래서 수영도 했죠."
허나 제주도는 4·3의 비극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섬이었다. "당시 산에 올라간 사람들을 막기 위해 4, 5씩 돌담을 쌓고 있었고, 성산포 같은 데는 마을 전체를 담을 쌓아서 보초 서고, 밤에는 잠그고 아침엔 열어놨어요. 외지 사람은 쌀쌀하게 대했죠."
늦게야 그 제주의 비극에 공감했다. 시가 나왔다. 4·3 장시 '아끈 다랑쉬의 비가'. "팽나무 밑에 잃어버린 마을 비석 표석이 있었어요. 제주도의 아름다운 경관도 좋지만 그 경관 이전에 역사를 알아야 더 아름답지요." 해마다 4월이면, 아끈 다랑쉬에서 노시인은 육성으로 4·3의 슬픈 영혼들을 진혼한다. 지금은 구좌문학회가 중심이 돼서 하지만. 절절한 아픔이 시인을 그리로 이끄는 걸까.
마라도가 좋았다. 가파도는 그 다음에 찾은 섬. 이후 주변 섶섬, 범섬, 문섬…어선 타고 가서 답사했다. 우도, 비양도 저쪽에 관탈섬, 북촌 다려도. 추자도, 추포도 다음에 횡간도. 제주도 주변 섬 안다닌 데 없어요. 지귀도만 못가봤어요. 섶섬은 일엽파초, 울창해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못해요. 수평선 쪽에서 올라오는 파도가 좋죠."
섬에서도 그는 시를 읽는다. "실미도는 영화 때문에 섬이 망가졌어요. 그 섬에서도 시낭송회를 하고, 목포에서 4시간쯤 가면 우이도가 있는데, 거기서도 음악하는 사람들이랑 함께 시낭송회를 했죠. 우이도는 백사장이 나를 미치게 만들어버려요. 이북의 저 안쪽까지, 그 섬까지 가보고 싶었는데 그게 안됐어요."
수십년 돌아다녔지만 지금도 시인은 지도를 보듯, 배타고 이동하듯 머릿속에 섬을 그릴 수 있다. "맑은 날 섬을 보면 다 보여요. 완도 지나면 청산도, 청산도 지나면 여서도…" 섬 이름이 줄줄이다.
"지금은 우리나라 섬 전체가 3180개 정도죠. 새로운 섬이 900개가 생겼어요. 자꾸 유인도가 줄어요. 사람들이 떠나니까. 유인도가 420개 정도. 아마 북한이 1000여 개로 보면 남북 합쳐서 4100개 정도 아닐까요?"
# 초등학교 3년때 빠진 섬, 바다의 낭만과 이어져
시인은 왜 그리도 섬에 홀렸을까. 섬을 좋아했던 것은 초등 3년때부터. 집에서 바다까지는 3~4㎞. 서해안 태안 안면도에 뻘이 있는 바닷가가 있다. 사촌누나들하고 처음 본 바다는 신기하고 좋았다. "일제때 의무적으로 해양 훈련을 2주 동안 시켜요. 수영, 노 젓는 것 다 배웠어요. 일제는 바다가 곁에 있으면 수영하고 노를 저어야 된다고 했지요. 교육 방침이 그렇게 됐어요."
그때 그렇게 배웠으나 그것이 바다의 낭만과 이어진 것 같단다. "대개 등대하면 교실에서 작문시간에 '반짝 반짝 등대' 이러지만 등대를 찾아가면 실감이 난다고요." 시집 「외로운 사람이 등대를 찾는다」도 그렇게 나왔다. 섬에서 맺은 민박집 노인들과의 정은 또 어쩌랴. 요절시인 김만옥의 섬이자 동백꽃 아름다운 여서도, 시적인 섬 만재도, 섬은 그에게 시였다. 하루저녁에 쏟아진 시들도 많다.
한하운의 시 '전라도 길', 이상의 '거울'을 좋아한다는 시인. 교사시절, 방학때면 이 시를 읊으며 섬으로 갔다. 보름에서 이십 일. 배낭엔 노트하나 스케치북 하나. "홍도같은 데는 일주일에 한번 가요. 배가 일주일에 한번 오니까. 책 가지고 가고. 전기시설이 없을 때는 초를 열 한 개쯤 꽂아 놓아야 내가 글을 쓸 수 있었어요."
요즘은 짧으면 4~5일. 일주일쯤 머문다. 관광객들이 없는 섬의 겨울이 시인에겐 오히려 더 좋다. 시상이 잘 떠오른다. 시인은 섬에서 이따금 스케치도 한다.
고교시절, 미술에 대한 열망에 탔던 소년. 집에서 유화를 할 때 반고흐의 면도칼로 자른 이미지 초상화를 늘 그렸다. 노년에 이르러 반 고흐를 향한 시가 나왔다. 시집 「반 고흐, '너도 미쳐라'」. 황진이와 김삿갓, 반 고흐, 자연에 귀가 밝다보니 곤충시도 나왔다.
# 어머니, 네 시는 왜 이리 슬프냐?
그를 가슴 저리게 한 독자는 여든넷에 세상 뜬 어머니였다. 서른 여섯 젊은 아버지는 장티푸스로 일찍 그와 작별했다. 일제말, 그가 중3때. 3남 2녀 중 열여섯살의 장남. 홀로 남겨진 어머니와 장남의 외로움은 말할 수 없었으리.
"우리 어머니가 내 시를 읽고 말한 게 있어요. 왜 네 시는 이렇게 슬프냐? 그걸 내가 말을 못했어. 그것은 우리가 슬펐으니까 슬프지. 평론가들 보고 말해요. 좀 쉽게 쓰면 안되냐. 우리 어머니도 읽게 써라. 우리 어머니는 내 시를 읽고도 섧다고 했다. 일제말에 야학가서 한글을 배운 실력으로 아들 시를 읽은 게지요. 말년에 성경책을 가져다 매일 노트에 베끼니 치매도 안걸리고 현명했어요."
시가 온실 재배도 있고 자연산도 있다면 그의 시는 자연산이다. 편하고 울림이 있는 그의 시에 독자들이 위안 받는 이유가 아닐까. "팔자좋게 섬에 여행하고 그럴 수도 있다하지만 숙명이야. 뿌리부터 캐면 이 사람은 이것밖에 할 수 없는 인간이구나 그래요."
얼마전에 쓴 시처럼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시의 밑거름이기를/그렇게 피를 아끼고 아끼며/시를 쓰다가 가고 싶습니다"는 시인의 세속적 나이 이제 여든. 허나 여전히 맑은 눈매, 목소리도 열정적이다. 그는 이메일로 소통하고, 답장 주고, 젊은 시인들의 시도 거의 읽는다. 건강? 섬에 가면 늘 걷지만 평소에도 늘 하루 세 시간 걷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이 일본선생이었지만 일기쓰라, 냉수마찰하라. 야산에 가서 '야호'해라 했는데 지금도 다 지키고 있어요."
책 부치러 간 시인에게 동네 우체국직원은 커피를 주고 한번도 무슨 책을 보내느냐 묻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이런 시가 나왔다. "…그는 내가 책을 보내러 우체국에 오는데/한 번도 무슨 책이냐고 묻지 않았다/나는 그에게 내 시집을 주고 싶은데/시집이 '암에 좋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암에 좋다'-우체국장의 커피). 그렇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시가 건강에 좋다는 것을.
"자기가 직접 써봄으로써 내가 나를 알아요. 정치가들도 정치에서 손을 떼면 섬으로 간다 입버릇처럼 하지만 한사람도 간 사람 없어요. 시인은 진실성이 있지만 정치가의 그것은 정치적인 거지요."
# 변화하는 제주도, 변하지 않는 것을 느껴
제주도?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속에서 그는 변하지 않는 것을 느낀다. "제주도의 남아있는 그것이 인간을 변화시키는데 좋은 곳이란 거지요. 제주도에 오면 머리가 바뀌고 에너지가 바뀌고 건강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길을 너무 만들어서 숨통을 끊어놔요. 안면도 생태계 변하고. 김이 안돼요. 지자체가 여러 가지 머리들 써야하고 연구도 많이 해야 해요. 제주도는 예술가들이 와서 좋아하는 섬이 돼야지요. 내가 왜 우이도로 가느냐. 경제적으로 자꾸 떠나니 노인네들이 지켜. 나도 조용하니까 가는 거지. 시끄러우면 안 가죠.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마음 속 깊이 제주를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