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잠녀] 3부. 잠녀를 만나다
<159>소리를 따라-우도 고태연 할머니

   
 
  ▲ 우도 바다  
 
숙명 같은 물질, 어려움 풀어낸 항일해녀가 4절까지 기억해
온 몸에 담아낸 세월 흔적 뚜렷…'이제 됐다'한마디 아쉬워


'훅' 할머니에게서 바람소리가 난다. 뜻밖의 방문에 당황하던 모습은 잠시. 누군가 자신을 찾아줬다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신명이 비친다.
바다와 부대꼈던 오랜 시간은 고스란히 할머니에게 남았다. 이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입은 잊혀지지 않는 어제를 풀어내느라 여념이 없다. 한창 때처럼 '쫙'하고 펴지지 않는 손가락 마디마디는 굳은살처럼 두꺼워졌다. 세월이 착색된 듯 갈그랑거리는 목소리가 귀지처럼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 고태연 할머니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운 날 무더운 날 비가오는 날에도
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되면 돌아와
어린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종일 해봤으나 버는 것은 기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이른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하고
온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어
파도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기울산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배움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기관 설치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가

# 강인하고 억척스런 섬 잠녀

우도 잠녀들은 다른 지역 잠녀들에 비해 강인한 체질과 억척스런 생활력을 갖고 있다고 했다. '타고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섬이 그렇게 만들었다.

한해 방문객만 5만명이 넘는 그 곳에서 일흔이 넘는 잠녀들이 아직도 고무옷을 입는다. 그만 해도 속곳을 입고 물에 들 때에 비하면 사정이 나아졌다고 한다.

지난해 70대 잠녀가 작업 중 목숨을 잃었지만 그녀들은 버릇처럼 바다로 향한다. 백화현상이 크게 개선되면서 바다밭 사정이 나아진 까닭에 맘도 편해졌다.

그런 기대에도 점점 노령화되고 수가 줄어드는 잠녀들에 대한 걱정은 커지기만 한다.

잠녀들이 내다보는 미래는 넉넉잡아 '10년'이다. 하지만 바다는 그대로다. 몇 년 전까지도 20년생 잠녀가 바다에 들었었다. 걱정스런 마음이 칠럼댄다.

상군이라고 해도 혼자서는 섣불리 바다에 들지 못한다. 의지할 동료 하나 없이 험한 물질 작업에 나서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다.

지난 2008년 우도면 오봉리에 세워진 세계 최대 규모의 잠녀상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높이 3m의 잠녀상은 단순한 명물 이상이다.

멀리 던진 시선은 지금이 아닌 어제를 본다. 과거를 기억하기에 힘든 오늘 대신 내일을 생각하라는 교훈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 우도 바다  
 

# 온 몸으로 노래를 기억하다

섬을 에돌아 왔지만 잠녀는 그 자리에 있었다.

고태연 할머니(89)다. 오랜 물질에 고 할머니 몸 역시 어디 성한 구석이 없다. 굽은 허리에 힘겹게 다리를 옮긴다. 음식을 씹는 기본적인 기능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입으로 술술 기억을 풀어낸다.

몇 번을 되묻는 일이 죄송스럽다. 어느 샌가 땅바닥에 무릎을 대고 할머니의 가슴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댄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바람소리다. '기억이

   
 
  ▲ 우도 오봉리 해녀상  
 
다 날까' '말도 제대로 못 하는데 노래가 될까' 할머니의 생각은 기우였다.

한참 물질 작업을 하던 도중인 것처럼 거친 숨소리가 더 많이 들렸지만 고 할머니는 항일해녀가를 4절까지 완벽하게 기억했다.

바깥물질을 오가는 동안 저절로 배워진 노래다. 얼마나 불렀는지 셀 수도 없다. 힘들 대 그냥 새어나오던 노래다. 누가 적어줘서 암기했던 것도 아닌데 할머니의 기억 속에는 어제 배운 노래 마냥 생생하다.

고 할머니는 "지금이야 그때 불렀던 노래라고 관심을 주지만 당시에는 힘들었던 일이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었다"며 "나이를 먹고 기억이 가물거려도 부르다 보면 불러진다"고 말했다.

# 노잠녀를 기억하는 일

해녀 항일가는 사회주의 이념 하에 민족해방을 목표로 활동하던 제주지역의 비밀결사인 '혁우동맹'의 일원인 우도 출신 강관순씨(1909∼1942)가 1933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돼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던 중 지은 총 4절의 노래다.

유일한 혈육인 강길녀씨(67)는 제주 동쪽 끝 섬 이 곳에서 물질을 한다. 그녀 역시 젖먹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잠녀였던 홀어머니 손에서 자라며 물질을 배웠다.

한 때 '소리를 잘 한다'는 말을 들었던 고 할머니였지만 시간은 할머니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몇 번이고 숨을 멈추고 침을 삼킨다. 머리는 노래가 흐르는데 입으로 긴 한숨이 펄럭인다.

할머니의 바람 소리만큼 '이제 그만 됐다'는 말을 삼킨다. 돌담 위로 거미 한 마리 집을 허물고 짓기를 반복한다. 아직 멀었냐는 채근 같아 눈 둘 곳을 찾아 서성이다 보니 노래는 마지막 구절로 넘어갈 참이다.

할머니의 기억 안에 남아있는 항일해녀가를 듣고 돌아오는 길. 우도의 관문인 천진항 입구 우도해녀항일기념탑이 발을 잡는다.   /특별취재반=김대생 교육체육부장·고미 문화부장·해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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