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피아니스트·작곡가 임동창

 아하, 그런 내력이라니. 소년의 몸 속에 피아노의 신이 와락 들어와 버렸다니. 서양 악기를 우리 악기로 만들어버리는 그의 연주엔 우리 음악의 원류가, 바람과 물의 만남같은 풍류가, 백제여인의 사랑같은 마음의 떨림판이 있다. "진정으로 조상들의 풍류가 다시 한번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때가 됐다고 생각해요. 우린 발효민족, 풍류민족이예요. 서양이 10대 감성이라면 우린 40대죠. 결국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 이것이 풍류죠." 새벽의 다랑쉬오름에 다녀왔다는 그를 만났다. 의외다. 이 달변가, 제주도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 한다. 바람결 하나, 돌담 하나에도 비극이 서려있는 땅임을 안 자, 제주도에 대해, 이 땅의 황홀에 대해 어떻게 말하리. 말을 아낀다. 천재, 괴짜, 국악과 양악을 넘나드는 문화게릴라. 그 앞에 수식은 또 왜 이리 많은가. 까까머리 피아노 연주가 임동창. 허나 그는 '그냥 임동창'이다.

 1956년 전북 군산 출생.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허튼가락' 창시자. 서울시립대 작곡과 졸.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같은 전래동요나 산조의 피아노 변주, 전위적 창작곡, 오페라, 연극·무용 배경음악 등 음표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영역을 넘나드는 연주가다. 1993년 첫 창작음반 '신아위'와 1995년 74분짜리 즉흥연주음반 '천국인간'. 1996년 연강홀 연주회. 1997년 장사익 이생강과 한 무대에 선 '공감' 공연. 예술의 전당 독주회. 경기도 안성 쟁이골에서 '쟁이골 촌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현재 전북 남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국악을 자기 식으로 해석한 강의와 공연으로 인기를 끈 EBS 기획시리즈 '임동창이 말하는 우리 음악'은 대중의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10년전, 연주자로서 인기 절정 속에 외부활동을 중단, 침묵하던 그가 마침내 새로운 작곡법과 연주법인 '허튼가락'을 들고 세상 앞에 나왔다.
 무대를 흐르는 피아노 가락은 거의 즉흥이었다.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 갤러리 개관기념 공연장 무대에 선 홍신자의 설문대할망 춤공연. 잠깐만! 임동창이었다. "객석에서 자연을 볼 수 있고, 무대 앞에 빈 터가 많아서 좋았어요. 여유 있고, 얼마든지 무대로 활용할 수 있고, 객석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특별한 무대여요." 특히 제주도의 구석 구석을 좋아한다는 사람. 시원시원한 목소리, 듣던대로 확실한 자기세계가 느껴진다. 

 "보통 우리말로 멜로디를 가락이라고 해요. 우리 조상들은 가락이라는 말을 음악 용어의 토탈적인 개념으로 썼어요. 가치가 있는 장단을 두드릴때, 음악이라고 하는 말이 가락이죠. '허튼'은 자유, 자유로운 음악이라는 뜻이죠." 영락없다. 음악교육자 답다. 그의 음악의 지점은 풍류다. "한마디로 우리 조상을 만난 거예요. 1번이 조상. 내 부모를 만난 것. 내 몸과 마음은 부모로부터 온 것. 우리 부모는 조상으로부터 온 것. 결국 그 조상도 죽 올라가면 결국 하나지요. 저는 우리 조상의 빛난 얼을 진정으로 '온고이지신'할 때라고 봐요." 그것이 풍류란다. '허튼가락'은 "어떻게 해야 오롯이 내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해온 그가 찾아낸 결과물인 셈. 임동창. 그가 꼽은 우리 음악의 원류는 '수제천(壽齊天)'이다. 지난 7월, 그는 음악적 칩거 10년만에 이 창작곡을 발표, 주목을 끌었다. 1116쪽에 달하는 방대한 작곡집도 나왔다. "'수제천'은 자신의 사랑을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입니다."

 # 수제천은 아주 소박한 사랑 노래

 '달하 노피곰 도됴샤…'로 시작된다.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한 백제 여인의 노래 '정읍사'. 여기서 유래된 '수제천'. 그는 사랑한다. 아악의 백미로 손꼽히는 이 아름다운 곡을. "소박하지만 최고의 품격을 지닌, 한없이 깊은 사랑 노래죠." 21세기의 그가 이 조선시대 멜로디를 지금의 '수제천'이란 이름으로 다시 되살려냈다. "옷을 달리 입힌 거예요. 알몸은 똑같은데. 실루엣만 걸치게. 이게 우리 사랑의 정서라는 거죠." 지금까지 한 것이 아르바이트라면 '허튼가락'은 자신의 참모습이란다. "풍류란 제 인생의 결산. 제 삶의 결산이죠."

 그는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우리의 정서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아쉽다. "마치 그것은 부모를 잃었다는 것과 같죠. 한국사람이 서양사람을 자기 부모처럼 착각하며 사는 거죠. 서양의 감성은 우울해요. 근데도 화려한 것처럼 착각해요. 우리 가락은 우울하다고 느끼는데 전혀 안그래요. 우리가락? 굉장히 밝아요. 제주도 한라산 밝은 날처럼. 잘못된 거죠. '전설의 고향' 영향도 크고. 우리 기막힌 조상들에 감사해서 오리지널 가락을 이번에 석장 낸 거예요."

 피아노를 안했으면 언어학, 우리의 고어, 옛말을 연구했을거라는 임동창. "'어긔야 아롱다리 아으 다롱다리'나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정말 아름답죠. 진리가 내포됐죠."

 # 벼락치듯 피아노의 신이 그를 찍었다

 그때 왔다. "억. 벼락치듯", 신내림처럼. 중2 겨울방학 후 맞은 첫 음악시간. '고향집에 홀로 계신 어머님 그리워~' 선생님이 노래 '여수'를 칠 때였다. 아이들과 정신없이 떠들던 소년의 몸에 어느 순간 꽂혀든 어떤 전율. 피아노의 신이 열다섯 소년의 몸으로 들어온 걸까. "돌이켜보니 하늘에 찍혔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늘이 느닷없이 너 피아노 쳐. 넌 종이다. 그런거야. 이 숙제를 풀기 위해서 온 열정을 다 바친거야." 소년은 그날부터 친구들 도시락 까먹으며 교실에 살았다. 홀로 피아노 교본 사다가 쳤다. 초등6학년때 먼저 가신 아버지, 어머니가 가장이었다. '넘들 밥먹듯이 밥 먹던' 가난한 집 5남매의 맏이. 피아노 건반만 뚫어져라 쳤다.

 "대부분 음악가들이 부모 손에 잡혀가서 레슨 받고, 와글와글 짝짝짝 하며 인정받잖아요. 저같은 사람은 아직까지 본 적 없어요." 하늘이 내린 숙제가 너무나 무거웠다. 중3 겨울, 벽에 부딪혔다. 어떻게 하면 피아노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반드시 길이 있을텐데. 아무리 쳐도 레코드 음악과 내 피아노는 달랐어요. 그래서 레슨을 받는구나. 돈은 없으나 그래도 배워야했다 생각했죠." 군산시내 돌다가 만났다. 유일한 피아노 스승 이길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선생님이었어요. 레슨비가 3000원. 어떻게 알았는지 레슨비 갖고 오지 마라. 낼 수도 없었죠." 목숨 걸고 5년을 피아노만 두드렸다. 고교는 1학년 중간쯤 다니다 교회에서 살았다. "열 여섯시간. 하루 두시간 잤나?" 다른 공분 없었다. 완전 몰입. 피아노 입문 동기가 다르니 과정이 다르고, 결과 또한 달라야 했다.

 첫 번째 화두. 그러면 어떻게 쳐야하나? 초등학교 5년 여학생을 무지무지 좋아했다. 고1때였다. "아, 가슴속에 무엇이 꿈틀거려. 내가 연습하던 곡을 치는 게 아니고 나도 모르게 속엣 것을 두드려. 그게 작곡이 되는 거야. 내 음악을 만들어야겠다. 내 속에서 나오는 것을 쳐서 소리를 만드는 거여."

 # 피아노가 터진 스무살, 혼자서 춤추며 새벽 맞아

 터졌다. 스무살. 허나 모든게 저절로 오는 일은 없다. 순식간에 오되 그만한 과정이 있는 법. 미쳐야 온다. "이제 하나로만, 딱 모든 에너지로 몰아가는 거예요. 피아노 두드리는대로만. 저 놈 보다 징그럽게 열심한 놈은 없다고 할 정도로. 무섭게 몰아간 거예요. 근데 내 감각은 아무리 연습해도 안되는 거예요. 안돼. 그러니까 더 해. 마치 참선이란 게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할 수 없구나 똘똘 뭉쳐서 일심이 됐을 때 머지않아 깨닫듯이." 그렇게 큰스님처럼 완전 몰아가서 답도 없고 기진맥진할 때. 그때였다. 확! "뭔가 열린다. 환해진다. 그런 느낌에 혼자서 춤추며 교회에서 새벽을 맞았지요." 두 번째 화두. 세상에 나는 나밖에 없는데 나의 음악은 왜 없나? 진짜 나를 찾아 떠났다. 스물한 살. 머리를 밀었다. 인천 용화사. '이 뭐꼬'의 길. 아홉달 공양주. 음악은 없고, 참선 또 참선. 10명에서 400명분 밥을 지었다. 법명 보림도 얻었으나 1년 반 정도하고 군입대로 그만둬야 했다.

 # 제 삶에서 아이들 가르는 것, 교육이 젤 커요

 대체 다른 사람들은 무슨 공부를 하지? 스물아홉,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그래도 대학을 갔다. 대학 가면서 무대에 섰다. 성창순 선생의 판소리에 도발적 피아노 반주. 호암아트홀. 학생인데 난리가 났다. 누구냐고? 독일까지 소문났다.

 작곡 야인 임동창. 1989년 김덕수패 사물놀이와 만나면서는 국악과의 교류가 시작됐다. 어느 국악인이 그랬다던가. "임선생이 피아노를 치면 피아노가 아니야. 피아금, 가야금처럼. 가얏고처럼 피아고야." 임동창의 피아노 때문에 피아노가 어느새 우리 악기처럼 됐단다. 피아노가 양악기의 왕인데 피아노가 들면 안되는 게 없다는 임동창. 허나 피아노는 정말 까다롭다. "현악기는 음을 변화시킬 수 있지만, 피아논 완전 불가능한 악기죠." 작곡가로서 그는 베토벤이 좋다.

 평생 야전군으로 살아온 그는 실내공연을 싫어한다. 사람이 그렇듯, 한옥이 그렇듯 소통이 잘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9년 안동수몰지구에서 성주풀이를 했을 때다. 그 해, 우연히 임하댐 수몰지구를 지나는데 물이 빠지면서 모습을 드러낸 400년 된 한옥을 만났다. 까닭 모를 슬픔은 뭔가. 그해 4월 폭우 치던 날, 그 폐가 앞에서의 특별공연, 뻘밭 연주였다.

 그는 음악교육자다. 이십대부터 사람들이 그를 찾았다. 숨은 명의처럼. 유치원에서 대학교수까지, 둔재에서 천재까지 가르쳐봤다. "제 삶에서 교육이 젤 커요."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에게? "배우지마라. 맘대로 쳐라. 떨려서 어쩔줄 몰라서 하는 것. 탱~ 피아노 소리 신기하지? 여기서 출발해요." 아이들이 사랑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전부라는 임동창. 또 하나, "아름다움이 뭔지 교육시켜야 해요. 집을 하나 짓더라도 어디에 앉아야 집이 아름다운지 알아야죠."

 많이 알려진 얘기. 난 먹고 살기위해 결혼하지 않는다. 거지도 먹고는 산다는 말에 끄덕여준 보자기 아티스트 이효재와 40대 중반 늦은 나이에 결혼했으나 서로 자유롭다. 오로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야 행복하다는 그. 그러나 툭터질만큼 하려면 얼마나 해야 할지를 보여준다. 곧 그의 음악을 정리한 묵직한 책도 나온다. 「임동창 풍류 鏡」. 1400쪽 분량.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4가지 숙제. '피아노, 작곡, 이 뭐꼬?, 사랑'. 어떻게 풀어나갔는지를 썼어요."

 # 제주도의 아름다움은 텅 빈 곳에 있죠

 그는 텅빈 곳을 좋아한다. "제주의 아름다움은 작은 길, 텅 빈 곳에 있다고 생각해요." 제주도는 빈 곳이 참 많은 곳이구나 느꼈을 때는 언젠가 두달간 제주 중산간에 살면서 작곡을 할 때였다.

 그는 언젠가 제주도 오름에서 연주하고 싶다 했다. 허나 제대로 하려면 우선 할 일. 4·3의 다양한 모습을 연가곡으로 만들고, 평화의 뿌리가 되는 노래부터 만들고 싶다. 아이들도 쉽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제주의 비극이 주는 무게 때문일까. 오래 생각을 굴리던 그. "제주도의 모든 아름다움은 지울 수 없는 아픔으로 빛난다는 생각을 해요."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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