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서각가 강영자

 분명, 그녀에게 각(刻)은 밥이다. 각은 생의 결이다. 빨리 새벽이 와서 각을 했으면 했다는 그녀. 어느해 겨울 새벽, 타오르는 난롯가에서 그녀는 하나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다른 아무런 것에도 귀를 열지 않는 사람처럼. 이랑을 파는 농부의 손처럼. 오로지 나무와 서각칼, 망치를 들고 나무에 새김질만 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사십대 초반에서 육십대 중반까지 온 지금도 그의 서각에 대한 열정은 변함없다. 아니다. 계속 진화한다, 무릇 서각이란 마음의 결이 한데 모아져야 하나니. 자연에 겸허해야 한다했다. 나무 결의 흐름과 하나가 되어 망치로 칼등을 내리친다. '각!' 하는 여자 강영자. 서각의 빈터에 씨앗을 뿌리는 사람. 자연에 자신의 생을 새기는 사람. 그렇게 흘렀다. 37년. 그녀의 각은 담대하다. 단단한 손. 그녀의 오른쪽 팔뚝, 왼팔보다 1인치나 굵어져 있었다.

우현(友賢) 강영자는

 1947년 제주시 출생. 신성여고, 상명대 예술대학원 사진 최고 관리자 과정 수료. 한국서각협회 제주도지회장 역임. 한국서각협회 초대작가, 진주개천예술대전 심사, 서예문화대전, 인터넷묵객 심사, 광주광역시 서각협회 초대작가를 지냈다. 활발한 창작활동과 함께 청소년 서각교육, 제주교육대학교 평생교육원 서각강사로 12년 출강. 서예문화대전 서각운영위원, 서예서법 문화예술대전 운영위원, 대한민국 서각대전 운영위원을 했다. 1974년 MBC주최 대통령 영부인배 전국여성경진대회 조각부문 우수상, 1989년 소암 현중화 글씨로 제주지방법원, 제주도문예회관 현판 등을 새김질했고, 제주시 학생회관, 조천항일기념관 등에 대형 작품들이 걸려있다. 2007년 개인전(남편 서예가 목인 김영준과의 부부 작품전이기도 했다). 제3회 대한민국 서각대전 문화관광위원장 공로상 수상. 일본 산다시 백조 서도 서각교류전, 2005 서예문화 100인전(예술의 전당), 2007 국제각자연맹전(일본전) 등 출품. 2008 재암문화상 수상.

 "어느날 싱크대 공장에서 일하는 한 노동자를 봤어요. 하얀 런닝이 군데군데 눈(구멍)이 난 상태에서 땀을 쏟으며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위대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저 역시 작업할 때는 나에게 푹 빠져버려요. 다른 일은 힘들면 게으르지만, 각 작업하다 새벽녘에 마칠때도 툭툭 털면서 이게 기쁨이구나 합니다. 우리가 고난에 처했을 때 희망이 보이는 것처럼." 소암 현중화 선생의 글에 각을 하고, 상형문으로 조형체를 시도하는가 하면 오래된 암각화, 갑골 조형문자 등을 재현하기도 하는 서각가 강영자. 서각의 기본인 그림과 서예, 전각을 함께 하는 그녀의 작품은 동양의 사상이나 철학, 불교의 선(禪)이 바탕에 깔려 있어, 조용하면서도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는 평을 받는다.

 서각이란 이름도 없던 70년대에 칼과 망치를 잡았다. 이제 60대 중반. 무릎도 팔도 신음소리가 들릴 때. 허나 그녀는 젊은 그들 못지않게 서각의 길과 서각교육에 몰두한다. 그녀의 과감한 다음 도전? 필생의 작품을 그녀는 지금 준비중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설레던 우리의 보물 '탐라순력도'죠. 이것을 한계가 있는 종이로만 보존하지말고, 여건만 닿는다면 이 시대에 정말 오래가는 나무에다 각을 하고 싶은 겁니다." 

 # 한국의 새김질 문화 상징은 암각화

 "우리나라는 인쇄문화에 관한 한 세계적이지요. 세계 최고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 팔만대장경 같은 서각의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습니다." 서각의 역사는 문자 이전 시대부터 시작된다. 목판인쇄의 실체가 새김질 문화다. 허나 서각이 예술로 이름값을 한 것은 20여년 밖에 안된다.

 무언가를 새기던 새김질의 예술 서각.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은 조형을 돌이나 나무에 새겨넣었다. 바로 암각화가 상징적이다. 돌도끼를 잡고 그것을 팠고, 목판에 각을 새긴 쟁이들이 있다.

 "돌이나 나무에 이정표 같은 것도 새기고, 나중에 자기 후손들에 남겨주고 싶어 각을 한 것이죠. 제주의 대표적인 것이 방선문에 새긴 것입니다. 시나 목사 이름들, 운율적인 것들을 새겨넣은 게 있어요. 돌에든 나무에든 새김질한 것은 어느 순간에 지워지지는 않습니다. 매장은 될지언정."

 # 70년대 목공예서 시작한 서각인생

 "전 나무가 정말 좋습니다." 그녀는 나무와 대화를 한다. 처음 나무에 새김질을 하던 때가 스물여덟 1973년. 부업 겸 취미로 공예사를 열었다. 당시 평면예술인 서예에 와당같은 무늬로 잔잔하게 입체감을 살리기 위한 작품들이 많던 때였다.

 "1974년인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한라산 잡목을 벌채해 생산성 있게 하라해서 도에서 목공예반을 양성했어요. 유류파동 전이죠. 10여명 회원들이 목공예를 했죠. 거의 회원들이 만든 작품을 판매하기 위해서 공예사를 열었습니다." 자비 들여 한라산 나무 2대분을 끙끙 실어와서 작업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사치스러운 것을 한 셈이죠. 쫄딱 망한거라예."

 그녀의 본격 서각 인생에서 영향을 준 이는 예술적 감성을 공유하는 그의 남편인 서예가 목인 김영준. 80년대 중반 전각가이자 서예가 청사 안광석에게선 전각 전서 등을 2년여 배웠다.

 글과 그림을 평면세계에서의 표현 한계를 뛰어 넘어 입체적인 세계로 표현하는 종합예술인 서각. 나무 선택부터 잘해야하는 것은 기본. "가장 중요한 자세는 나무의 성질을 따르는 것, 결이죠. 자연 그대로. 나무는 너무 무르지도 않아야 해요. 삼나무나 소나무는 절대 안되고, 굴무기나무도 너무 결이 강해서 엇박자 나기 쉽습니다. 서로 몸이 정밀한 벚나무, 돌배나무가 좋지요. 나무의 골밀도가 적당하고, 결과 결사이가 강하지 않는 것. 편백나무는 결과 결사이가 너무 넓어서 공간이 물러요. 칼이 일정하게 못 나가서 나무가 손상됩니다. 칼에 지는 거죠." 

 중요한 것은 마음. 믿음이 설 만큼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것. 칼등을 억지로 내리쳤다간 손도 다치고 작품도 엉망이 된다.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말일게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더 이상 잘 할 수 없다해도 아쉬운 부분은 꼭 있으니까요."

 # 도문예회관 현판 작업 혼신…큰 기쁨 맛 봐

 팔을 뚝 잘라버렸으면 했다. 극심한 통증. 앉아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무릎에 이상도 왔다. 웬만하면 아프다 소리 하지 않는 그녀가 이렇게 고통에 시달린 것은 1989년. 전체 60글자. 6㎝ 두께 12 대작인 제주도문예회관 현판을 완성하고 난 후였다. 그때 더 이상 큰 기쁨은 없다고 느꼈을 만큼 희열이 왔다. 혼신을 다한 행복감과 혹독한 육체적 고통은 평등했다. 함께 왔다.

 도연명의 '잡시'였고, 소암 현중화의 글씨. "나무를 구하는 것이 어려웠죠. 겨우 나무 스물두개를 육지에서 구해 붙여서 각을 했지요." 작업하는 동안 소암선생은 일주일에 두 번 꼬박꼬박 찾아왔다. 기일에 맞추려니 제대로 잠맛을 볼 수 있었겠는가. 아무리해도 하루에 몇 자 새기지 못한다. "소암은 자기 글이 잘 표현되었는지, 자신이 잘 못 쓴 부분이 있나, 자기 성격을 제대로 살렸느냐를 봤던 것 같습니다. 늘 '됐다' 끄덕끄덕 했을 뿐이었죠. 저는 제자들에게 지금도 소암의 글은 그대로 하라고 합니다. 권력이나 욕심 때문에 내가 최고요 안할 뿐이지 당대 최고였으니까요."

 그녀의 혼과 열정이 새겨진 생애 첫 개인전이 열렸던 때는 2007년. 그에게 글씨를 대주던 목인 김영준과의 부부전이라는 의미도 깊었다.

 # 오빠 화가 강태석 영향…그림 잘 그리던 소녀

 3남2녀의 막내딸. 남자들도 힘든 서각의 길을 결정지어버린 것은 이미 초등 4년때. "복사지에 헬리콥터를 그렸더니 담임 고문선 선생님이 칠판 가운데 걸어놓고 오빠 닮아 그림을 잘그린다고 한마디 했어요. 그때 그래서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구나 괜히 그런 생각이 든거죠." 큰 오빠 강태석(1938∼1976). 제주에서 그림 그린다면 모르는 이가 없던 그 빛나던 화가. 서울대 미대 다니던 오빠는 파란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어린 누이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따복따복 오빠 따라다니던 그때 그 칠성통 분위기가 지금도 선하다. 중·고교도 미술특기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고교 미술반에 갔더니 미술선생이 "영자야, 너는 그림을 그리지 말라"그림을 못그려 그런가? 했더니 오빠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는 섭섭했어예. 이제 철이든 지금은 그게 얼마나 고통의 길, 답이 없는 행로를 가려하느냐 하는 뜻인줄 알게 됩디다."

 그녀에게 하늘이었던 오빠. 1976년 그 젊은 화가는 병마와의 싸움에서 안타깝게도 미완의 생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오빠가 계셨으면 나에게 그림 그리지 못하게 했을 겁니다." 지금도 벽에 걸린 오빠의 그림들을 보면 가슴이 시리다. 1966년 3월, 대학을 포기한 그녀가 서울서 색상 디자인 연구실에 있을 때였다. "옷 디자인을 하면서 병환의 오빠 뒷바라지 하기도 했는데…. 조카도 결국 그림을 하는 걸 보면 피는 못속이나 봅니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만, 이쯤에서 그치자. 

 # 통이 큰 서각가 강영자 작은 것은 체질에 안맞아

 어머니는 통이 컸다. 일을 보면 못참는 성격, 어머니를 닮았다. 그녀는 사람이나 작품이나 통이 크다는 소리를 듣는다. "큰 나무만 보면 막 에너지가 나와요. 나도 못말리는 형이에요. 대형 할 때는 머리도 안 아파마씀. 아침에도 신이나. 그게 신들린 것처럼. 지금도 밥하는 건 피곤해도 서각은 힘든게 없어마씀." 작년에도 나무 하나가 4m80㎝짜리 서복공원 일주문 현판을 탄생시켰다. "더 없을까 하는 생각만 나요. 작은 것은 체질에 안맞아."

 그가 공들이는 대목은 12년째 하고 있는 서각교육. 일반인들도 서각을 생활예술로 다가서게 하기 위해서다. 지금껏 그가 배출한 서각인들은 200여명. "아이들에겐 가장 기초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 쌀 갖다주지 말고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라고 농부들이 말하듯. 스스로 칼 사용하는 방법, 나무결 보는 방법만 가르친 다음에 그 아이가 흡족해질 때까지 기다려줄 줄 아는 기다림이 필요하죠. 내가 뿌리를 만들어주면 나중에 아이들은 굵은 가지가 되지 않을까요?" 전통과 현대의 결합이며 문자향과 조형미가 조화로운 세계. 서각은 담금질 겪은 나무재료에 배접할 글귀를 붙이고 새김질 할때까지 집중해야 한다. 칠순 노인들도 서각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치매예방에도 좋단다. "왼손에 칼 잡고 오른손에 망치 잡으면 두드릴때 신경이 울리니까 당연히 좋지요."

 일단 서각을 하려면 집안정리가 완벽해야 한다는 그녀. "텅빈 마음이죠. 각을 하다보면 저절로 마음이 다스려지고 여유롭지요. 인생에서 힘든 순간은 다 각하면서 희석되어버리고 생각이 없어집니다." 말할 수 없는 시련이 왜 없겠는가만 거기에 집착해본 적이 없다는 강영자. 나무결 거스름없이 칼끝을 대는 새김질, 나무결따라 그녀 청춘의 결이 새겨졌다. 빛과 그늘처럼, 음각과 양각으로 흘러간 한 여자의 생이.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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