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잠녀] 제4부 '잠녀, 지키다' <173>독도잠녀의 가치 재평가
경상북도 최근 제작 「독도주민생활사」에 제주잠녀 독도 물질 의미 담아 
▲ 독도
독도영유권 문제 한 가운데서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산증거로 가치 평가
잊을 만 하면 불거지는 독도 영유권 문제는 언제나 뜨거운 이슈다.
이르면 이번 달 발표될 것으로 예상되는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 역시 이런 논란에 불을 지필 것으로 예상된다.
'독도는 일본의 시마네(島根)현 오키(隱岐)섬에 속한다'며 분쟁을 야기하곤 했던 일본의 교토통신은 최근 그런 오키섬으로 본적지를 바꾼 주민이 69명에 달한다는 보도를 하기도 했다. 영 탐탁치않다.
우리나라 국회의 각 상임위원회에는 독도 관련 법안 13건과 결의안 1건이 계류 중이다. 이중에는 국민들의 독도 거주를 지원해 독도의 유인도(有人島)화를 꾀하는 내용의 '독도영토수호특별법안' 등도 포함돼 있다.
이런 시점에서 독도를 지켰던 제주 잠녀를 공식 인정하는 자료가 만들어져 눈길을 끌고 있다.
분명 그 곳에 제주 잠녀들이 있었다. 오래된 일본 자료 속 왜곡된 모습이 아니라 그 곳에 발을 붙이고 살며 우리 영토의 실효지배적 의의를 지켜냈던 그녀들이다.
# 독도를 지킨 제주 잠녀들 
▲ 독도의 마지막 잠녀 고순자 할머니
경상북도가 최근 제작한 「독도주민생활사」에 '제주 잠녀들과 독도'가 실렸다. 독도 주민 생활사는 물론 독도의용수비대의 활약상 중에도 제주 잠녀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까지 지역 신문과 제민일보 잠녀기획팀의 취재를 통해 제주 잠녀들의 독도 물질의 역사가 하나하나 뚜껑을 열었다. 앞서 2009년 「독도를 지켜온 사람들」에 제주 잠녀들의 이야기가 일부 실리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그에 더 보태 '제주잠녀가 독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지키면서 우리 영토임을 확인했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독도주민생활사」에는 1950년대 독도에서 미역작업을 하던 제주 해녀들이 독도 의용수비대원들의 활동을 도왔던 사실과 이후 1970~80년대까지 독도를 생업의 영역으로 하여 독도에 사람이 발붙일 터전을 마련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잠녀인 어머니를 따라 독도까지 갔던 아이들의 사진이며 가장 마지막까지 독도에 남았던 제주 잠녀 고순자 할머니가 1984년과 1987년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두 차례나 독도로 주민등록을 옮겼던 사연도 실렸다.
# "독도에 사람이 발붙일 터전 만들었다" 
▲ 박옥랑 해녀 울릉도 물질 준비
이들 내용은 편협한 시각에 사실 여부 확인이 어려운 일본 자료와 달리 아직 살아있는 기억에 의해 정리된 것들로 더 신빙성이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제주 잠녀들이 울릉도와 독도에 들어간 유형은 세 가지로 구분이 되는데 첫 번째는 광복 전까지 일본인들을 통해서 울릉도와 독도에 들어온 경우이다.
당시 독도에서 조업을 한 잠녀들은 일본인을 통해서 모집된 사람들로 울릉도를 거쳐 독도에 들어가 조업활동을 했다. 그들이 채취한 해산물은 전량 일본으로 보내졌다.
두 번째는 광복 후 1950년대 이후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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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해녀들은 2~3개월간 지속된 미역 조업을 위해 서도의 동굴에 생활 근거지를 마련했다. | ||
세 번째는 제주도에서 바깥물질하러 나왔다가 울릉도로 들어간 잠녀들 중 결혼 등의 이유로 그 곳에 터를 잡은 잠녀들이다. 이들은 주로 울릉도에만 머물며 울릉도 주변 근해에서만 작업한 것으로 확인된다.
제주 잠녀들의 독도 생활은 비록 출어기간이 정해져 있기는 했지만 광복 후 20~40명이 독도에 들어가 미역 채취를 하며 독도에서 생활을 영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956년 울릉도수산업협동조합이 독도미역채취독점권을 갖게 된 이후에는 기업형 미역 채취가 가능해져 독도 잠녀들의 규모 역시 커졌다.
…당시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약 10시간 정도가 소요됐고, 독도에 입도한 잠녀들은 며칠이고 섬에 머물러야 했다. 당시 잠녀들의 잠자리는 서도의 물골과 탕건봉 주변에 위치한 동굴이었다는 사실들도 재확인했다.
특히 "제주 잠녀들의 독도생활은 비록 출어기간에만 한정되었지만, 독도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2~3개월간 또는 4~5개월간 머물며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독도에 사람이 발붙일 터전을 마련하게 됐다"며 당시 제주잠녀들의 독도 물질에 의미를 부여했다.
# 늦기 전 채록한 기억, 살아있는 역사로
지난 2009년 본보 잠녀기획팀의 '독도 잠녀'취재는 그런 제주 잠녀들의 흔적을 하나 하나 짚어내고 또 잃어버렸던 고리를 찾았다는데 의미가 있다.
당시 취재에서는 제주잠녀들이 1953년부터 독도에 들어가서 물질 작업했던 사실이 확인됐으며 실제 살고 있는 주민(김신열씨) 중에도 잠녀로 물질을 이어가는 이가 있다는 점 등도 강조했다.
기록에 따르면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혼란한 틈을 타 일본이 독도에 상륙하자 울릉도에 거주하는 민간인들과 울릉도 출신 국방경비대를 주축으로 독도의병대가 조직돼 독도 지킴이(1952~1956)를 자청했다.
경북일보의 독도 관련 기사 등에 따르면 1953년 최초로 박옥랑·고정순 등 4명과 1954년 김순하·강정랑 등 6명이 독도에서 물질을 했다. 이후 1955년 홍춘화·김정연 등 30여명이 독도 바다에 몸을 던지는 등 독도 물질이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1956년 이후에는 한해에 많게는 30~40명의 잠녀가 독도에 입도해 물질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살 꽃 다운 나이에 독도 물질에 나섰던 박옥랑 할머니(76·1953년 독도 입도)부터 1959년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독도행을 택했던 김공자 할머니(70)의 기억까지, 독도에서의 생활은 고단함 그 자체였다.
그래도 독도에 가기 위해 뇌물까지 썼다. 멀리 까지 나가 물질을 하는데 대한 시선 역시 곱지 않았다. 하지만 생계를 책임지는 위치에서 그런 사회적 시선 쯤은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기업형 미역 채취로 독도 잠녀 수가 늘면서 조를 짜서 물질을 하는 등 규칙도 정해졌고, 출신 지역별로 다툼도 잦았다.(김정란 할머니)
1960년대 들어서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물통이 있어 빨래며 목욕까지 해도 물이 모자라지 않을 만큼 사정이 나아졌다. 1970년대 양식 미역이 나오면서 울릉도·독도로의 출가 물질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없을 것 같았던 제주잠녀들의 독도행은 1973년부터 1991년까지 18년 동안 독도 바다를 헤집었던고순자 할머니(76)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 할머니에 대한 내용 역시 이번 「독도주민생활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별취재반=김대생 교육체육부장·고미 문화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