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잠녀] 4부 ‘잠녀를 만나다’<175> 2005년 최우수 해녀상 이정현 할머니

   
 
  ▲ 해녀박물관에 전시중인 ‘해녀상’. 이정현 할머니의 얼굴도 있다.  
 
한림 한수에서 수원으로…지난해까지 '바당'에서만 70년 삶 살아
스스로 '해녀'라 부른 적 없어, 자기벌이 할 수 있는 일 '자부심'


볕 좋은 토요일 오후 할머니의 손은 좀처럼 쉴 틈이 없다. 이웃에 살던 친척이 병원에 입원하며 한시도 걱정을 놓지 않아 대신 쪽파를 손질하고 계신 참이다. 검은 흙이 배긴 손톱이며 손마디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올해 88세. 2005년 최우수 해녀상을 받았던 이정현 할머니가 작업하는 밖거리 한 쪽 벽에는 검은 고무옷이 걸려있다.
"이젠 물에 못 들어. 작년에 수술을 해서…"하는 할머니의 표정에 아쉬움이 비친다. "(날씨가)이만하면 물에 들엉(들어가) 작업도 해실건디(했을텐데)". 60년 넘게 온몸에 배긴 바다는 좀처럼 빠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 이정현 할머니  
 


# 철들면서부터 물질 인생


"작년까지는 물에 들었주. 수술 해부난 못했지". 할머니는 그렇게 바다로 갔다.

"나이 한 할망신디 무신거 듣젠(나이 많은 할머니한테 무슨 말을 들으려고)"하면서도 누군가의 방문이 싫지는 않은 기색이다.

이 할머니는 슬쩍 안방 기침을 살핀다. 18살부터 70년을 함께 해온 김종호 할아버지(90)가 할머니의 기억을 돕는다.

제주 섬 아이들은 누구나 그랬듯 놀면서 바다와 가까워졌다. '물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업은 15~16살 무렵 고향인 한림 한수리에서 시작했다. 17살과 19살 때 두 번 일본으로 물질을 다녀온 것을 빼고는 이후 내내 한림 수원 바다를 지켰다.

처음 금릉 잠녀들과 일본 고치현에 다녀 온 이듬해 김 할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19살 일본 물질은 남편과 함께였다.

"다른 동네서는 혼자도 바깥에 가고 해신디 나는 경은 못허고, 한번 같이 갔다왕 아들 놓고 해부난 뭐". 사공이었던 김 할아버지는 그 이후도 수차례 다른 잠녀들을 모집해 바깥물질을 다녀왔다고 했다. 바다가 없었다면 4남 3녀 자식들 뒷바라지는 생각도 못했을 터다.

#고무옷 보급 후 더 고돼


할 말이 없다는 이 할머니의 얘기는 계속됐다.

처음은 소중이도 없이 속곳만 입고 작업을 했다. 일본 물질을 갈 때는 속적삼을 입었다. 수건에 '족은 눈'을 쓰고 하던 작업이 일본에 가서는 아마들과 마찬가지로 헝겊으로 된 모자로 바뀌었다. 그 때만 해도 속적삼이나 속곳 다 직접 만들었다. 고무옷을 입기 전 한 1년 정도는 고무로 된 모자를 썼다.

이 할머니는 "'스폰지'(할머니는 고무를 계속해 '스폰지'라 말했다) 모자라도 얼마나 뜨셨는지 몰라. 이제사 한량이주"하고 기억을 뒤졌다.

그 때까지만 해도 겨울에는 물질을 하지 않았다. 한번 작업도 15분을 넘기기 힘들었다. "추워서". 이유는 그 것 하나였다. 음력 3~4월은 돼야 해경을 해 미역을 조물고 작업을 시작했다. 찬바람이 불면 여간해선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고무옷이 보급되면서 계절이며 시간 구분이 모호해졌다.

아이를 낳고 몸을 채 추스르기 전에 바다에 몸을 던지다 보니 두 차례나 유산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래도 바다에 갔다.

   
 
  ▲ 최우수 해녀상  
 
#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요


그렇게 몸이 상해 한창때 한 몇 년 바다를 떠났었다. 이 할머니는 "중바당은 좀 알겠는데 바깥바당은 잘 몰라"하셨다. "보통은 했다"는 할머니지만 최우수 해녀상만 두 번 받은 '실력파'다.

예전 물질하던 사람들을 뭐라 불렀냐는 질문에 이 할머니가 툭 하고 말을 내뱉는다. "처음에는 이름들 부르고 아그들 요그믄(아이들 크면) 누구 어멍하고 부르고". 혹시 해녀라고 부르지 않았냐는 말에는 "놈도 아니고 누가 해녀라 부르겠냐"는 답이 돌아온다.

"녜나 녀라고는 했던 것 같은디 우리들끼리 뭐하러 그리 부르냐"는 말에 가슴이 덜컥한다.

"속곳만 입고 작업을 하는데 남들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았냐"고 묻자 이 할머니는 "그 때는 힘들고 그래서 물질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생각했주 무슨 험한 일 그런 생각은 안 해봐서"했다.

할머니의 기억에도 할머니의 할머니 그 할머니 적에는 그런 인식들이 있었다는 흔적이 있었다. 그래도 결단코 자신의 일을 험하다 생각한 적이 없다 잘라 말했다. 누구나 다 물질을 할 수 없었던 까닭에 힘든 살림에 손을 보탤 수 있어서 다행이었던 마음이 전부였다.

세 딸 모두 바다와는 거리가 먼 일을 한다. 누구도 물질을 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물질을 하라 하지 말라 했던 적도 없다.

"아그들이 물에서 잘 헤우기는 해도(수영은 잘 해도) 바당에 가겠다는 말은 안했다. 머리들 크고 허켄도 안허곡 뭐 시키젠도 안허곡…".

할머니의 눈은 몇 번이고 바짝 말라버린 고무옷으로 향한다. "물에 가면 몸도 편하고…바당에서는 자기가 벌믄 다 '공짜'고 허니까 가고만 싶지".

할머니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니 정말 그들의 삶, 진정한 속내는 잘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이 생겼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그 일에 대한 사회적 경중은 온전히 바깥 기준이다.   /▲특별취재반=김대생 교육체육부장·고미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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