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잠녀] 4부 '잠녀,지키다'<176> 하도리 굴동네 고명순·임정연 잠녀⑴

   
 
  ▲ 하도 잠녀들이 톳 작업하는 모습  
 
춥고 길었던 '겨울'덕택에 해조류 풍년…1960년대 이후 물질 사정 꿰뚫어
"물질은 자랑거리이자 대접 기준"  "이제야 옛 어른들 말 이해할 수 있어"

'어머니'의 표정이 환하다. 지난 겨울 칼바람과 강추위에 호되게 당했던 것에 비하면 바다가 건네준 것들이 풍성하다. 4월 구좌읍 하도리 바닷가는 톳이며 우뭇가사리 작업으로 쉴 짬이 없다. 조를 나눠 작업을 하는 것이 흥이 난다. 바다가 있어 가능했던 일들이다. "이 맛에 물질한다"는 말이 피부로 느껴진다.


   
 
  ▲ 고명순 굴동네 잠수회장(사진 왼쪽)과 임정연 총무  
 
# '물질'이 생계수단이던 시절

하도어촌계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해에 비해 톳 생산량이 크게 늘어 손이 바쁘다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촌계 작업장 인근은 톳과 우뭇가사리로 빼곡하다. 방사능 오염 우려가 있다는 말에 수차례 창고를 오가며 잘 손질된 해초의 자태는 그대로 어머니들의 표정이 된다.

톳 풍년을 핑계 삼아 고명순 굴동네 잠수회장(55)과 임정연 총무(60)를 만났다. 잠녀 기준으로 '한창 때'인 두 잠녀들에게서 물질 얘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떵 시작해져신지…. 너무 힘들엉 결혼하면 물질 안 하는데 가켜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 임 총무는 아직도 때만 되면 물에 간다.
곳물질이지만 뱃물질을 하는 만큼 먼 바다에서 작업을 하는 지역에서 '상군'으로 꼽힌다.

물질을 할 때 잠녀들이 '뭐 들을 게 있겠냐'던 손사래가 어색해질 만큼 어머니들의 기억은 꼬박 반세기를 더듬는다.

해안가 마을은 다 마찬가지였다. 자라면서 바다를 배우고 저절로 물질을 했다. 누가 시킨 것도,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지만 물질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물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매들 사이에도 차등을 뒀을 정도다.

고 잠수회장의 기억 속에 '언니'는 대단한 존재였다. "물질만 하고 나면 어머니가 으당 니가 고무옷 널라 파싹하게 몰려산다 했다"며 "같이 물질을 해도 잘 하는 언니가 힘들다고 나한테만 일을 시켰었다"고 말했다. 지금이야 웃지 그때는 그게 많이 야속했다.

1960년, 1970년대만 해도 딸 자랑은 '물질'뿐이었다. 다른 할 일이 없을 때라 더 그랬다. "그때는 어디강 말할 때 육지강 얼마 벌언 집샀져 소샀져 하는게 자랑이었주. 물질 잘 햄쪄 하면 딸 잘 났댄 허고…".

   
 
  ▲ 하도어촌계 잠녀들이 톳 작업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 바다에 갈 수 없으면 마음 불안해

그렇게 시간을 흘렀다. 이제는 누구도 물질을 잘 하는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에서는 인정을 해준다. 누구든 물질을 하지 말라고 하면, 날씨가 나빠 물질을 하지 못하게 되면 괜히 마음이 불편하다. 바다에 가야 맘이 편하다.

임 총무가 오랜 기억하나는 끄집어냈다. 고무옷이 없던 시절, 미역을 조물자 마자 바다에서 나와 불을 쬐지 않으면 못견딜 때 한 상군 잠녀가 했던 말이다. 

"새벽에 일어낭 영 들으믄 아마도 문이 덜렁덜렁 해가믄 누가 거느리지 않아도 속에서 부에가 확 나고, 아마도 문이 소리가 안나면 마음이 노롯해진다(새벽에 일어나 작은 유리문이 덜컹소리가 나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속에서 화가 나고, 문 소리가 나지않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말이 그 땐 무슨 뜻인고만 해신디, 이제는 알아지크라"

행여나 물질을 못하게 될까 가슴 졸이던 심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한창 때 잠녀들의 입에서 "앞으로 10년이나 갈까"하는 자조섞인 말이 나온다. 그나마 잠녀수가 많은 편인 굴동네에는 50대 잠녀도 여나믄 명이 있다. 그래도 10년을 버티기 어렵단다.

고 잠수회장은 "고무옷 입고 나서 작업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몸이 성한데가 없다"며 "밭일은 혼자서도 해도 물질은 혼자서는 못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없어지지 않겠냐"고 말했다.

물질은 묘하다. 처음에는 겁을 먼저 집어먹지만 하면 할수록 사람을 강하게 한다. 지금 바다에 나가는 것도 그만큼 단련이 돼서다. "물질을 하면 할수록 더 강인해지는 것 같다"는 어머니들의 말은 '강인하기 때문에 물질을 하는 것'이란 일반의 생각과는 반대다.

# 내가 한 만큼 벌 수 있단 믿음

절대 대물림은 없는 잠녀 일을 왜 놓지 못할까.

어머니들의 대답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같았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 때는 사회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남자는 더 그랬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물질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지금도 자신이 일한 만큼 벌어서 생활비도 하고 필요한 것도 살 수 있으니 물질을 한다고 했다.

고 잠수 회장은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할 수 있는 일도 많고 해야할 일도 많고, 아이들신디 물에강 헤어보라(아이들 한테 물에서 놀라)는 말도 못한다"며 "만약에 우리가 살았던 만큼만 했으면 다들 물질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변의 홀대나 험한 일을 한다는 불편한 시선 때문에 물질을 물려주지 않았을 거란 생각은 이번에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임 총무는 "어렸을 때 돈 벌젠 밖에 나가면 그렇게 천하게 봤주. 보재기랜도 부르고. 그래도 물질을 잘 하면 대접해줬주. 제주에서는 여자는 거의다 잠녀여신디 누가 뭐랜 할 수도 없었주게"라고 말했다.

새로운 형태로 '바깥물질'을 나가는 잠녀의 얘기도 들린다. 할 말도, 들일 거리도 많다. 50여년을 헤집는 일이 쉬울 리 없다.   /▲특별취재반=김대생 교육체육부장·고미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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