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산악인 엄홍길

 # 10대에 등반 한라산 남성·여성 양면성 갖춰

 1960년 경남 고성 출생. 엄홍길 휴먼재단 상임이사, 상명대 석좌교수, 밀레홍보팀 상무, 대한산악연맹 대외협력 위원장. 1979년 고교 졸업 후 설악산에 들어가 화운각 대피소에서 2년간 물품 전달하는 일 하며 설악산 곳곳 누빔. 이후 해군 수중 폭파대(UDT)에 입대, 1985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반을 시작으로 2007년 5월 로체샤르 정상에 서기까지 22년간 38번 히말라야 고산에 도전, 20번 등정에 성공했다. 로체샤르 정상 정복을 결정판으로 세계 최초 히말라야 8000급 고봉 16좌를 완등한 산악인으로 기록됐다. 2008년 엄홍길 휴먼재단(후원 문의=02-736-8850)을 설립, 22년간 도전과 희망의 상징이었던 히말라야 오지 사람들을 위한 나눔 프로젝트를 시작, 첫 번째로 팡보체초등학교, 두 번째로 타르푸초등학교를 건립했다. 16개 학교 건립이 목표다. 저서로 「꿈을 향해 거침없이 도전하라」 「오직 희망만을 말하라」 등.
 엄대장, 그에게 한라산은 가슴 뛰는 이름이다. 고교 졸업 10대 후반에 처음 한라산을 만났다. 산에 다니는 선배와 함께였다. 또다른 세상이었다. "대한민국에도, 더구나 섬에도 이런 큰 산이 있구나, 멋진 산이 있구나 매우 인상 깊었죠. 여성적이면서도 남성적이고, 남성적이면서도 여성적인, 양면성을 두루 갖춘 산. 좋은 날엔 너무나 온화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데 순식간에 변화하면 성나고 분노하는 남성의, 그런 넘쳐나는 기운과 열정이 느껴지죠."

 1985년부터 시작된 만년설 히말라야 원정. 그 길에 한라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 한라의 기운 앞에 공손히 엎드려야 했다. "입산 수도할 때 첫 수행의 관문 시험을 통과해야하는 것처럼. 그래야 큰 산, 히말라야를 갈 수 있는 겁니다. 히말라야 눈의 상태를 볼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훈련하기 좋은 곳이 한라산이예요. 때문에 꼭 여기서 설산의 모든 훈련의 마무리를 하고 출발하는 거죠."

 한라는 전혀 만만하지 않은 산이다. 한여름에도 수시로 변화하고, 겨울엔 하루에도 몇 번씩 변화하는 날씨를 수시로 경험한다. 갑자기 구름이 끼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날씨 때문에 같이 훈련하던 대원들이 서로 찾는 경험도 했다. "그런 산을 보면 야!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인가. 자연에 인간이 도전한다고 하지만 범접할 상대가 아니다. 자연과 인간이 어떤 교감이 통해야지 무모한 행동이나 과욕은 절대 한치의 용납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죠."

 한라산은 산악인들에게 어떤 산인가. 엄대장의 즉답. "한국판 히말라야가 아닐까."

 # 도전과 실패…세르파의 죽음에 엄청난 충격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두 번째 도전이었던 1986년의 사고는. "겨울인데 1985년과 같은 길로 가다가 실패를 했어요. 같이 등반하던 세르파가 7600m에서 로프를 잡고 올라가다가 떨어진거예요. 절벽 밑으로 날라가서 영원히 사라졌어요. 시신도 못 찾았았지요." 캄캄. 기막혔다. 바로 어제까지 얼굴 맞대던 동료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으니. 7600m에서. "저는 8600m고도에 있었어요. 둘이 물자를 지고 올라오면 저는 그 식량을 받아가지고 정상을 올라가려고 계획한 건데. 처음으로 사람이 죽은 것이죠."

 결혼한지 딱 3개월밖에 안된 세르파였다. "내려오다 본 동네 그 산자락 마을이 그 친구가 살던 마을이예요. 울고불고 막 야단이지요. 홀어머니 모시고 살던, 새신랑이었다. 한 동네에서 서로 좋아해서 결혼한, 열아홉 살의 세르파. 아, 죽고싶었어요. 더 이상 산은 내 인생에서 끝이다. 히말라야도 끝이지만 나도 끝이다. 그냥 죽은게 아니고 처참한 흔적을 봤는데. 내가 어떻게 그 가족을 보랴."

 갈등과 실의의 나날. 하지만 산이 그를 보내지 못했던걸까. 산의 줄을 놓지 못했다. "내 마음 속에서 쉽게 떠나게 하진 못하겠더라구요. 아무리 머릿속에서 지우려 해도." 1988년, 서울올림픽 때였다. "결국은 세 번째 도전끝에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올라간거죠."

 # 2007년 16좌 로체샤르는 등정의 종합판

 수많은 도전. 도전마다 곡절 없는 산이 어디 있으랴. 네 번의 도전 끝에 오른 16좌 로체샤르. 여긴 참 할 말이 많다.

 '내가 무리한 도전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다 죽지. 14봉하고 그걸로 끝낼 것을' 할 때는 나머지 16좌 갈 때였다. "히말라야 신이 날 언제까지 받아 줄 것인가. 행운을 줄 것인가. 그러잖아요? 네가 보자보자하니 머리 끝까지 올라서려한다. 천방지축한다고 노여워할 수도 있잖아요. 그것을 내가 알잖아요. 경험으로. 산이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체로 보이는 겁니다. 저는."

 허나 로체샤르는 히말라야 최고의 난공불락이라는 남벽을 택했다. 여기를 두달 만에 올라가서 성공한 것. 3000m 올라가고 날씨가 안좋으면 내려오고. 텐트 칠 수도 없고 비박해야 하는 극한의 상황. "여기서 8000m 37번 산을 오르면서 겪은 최악의 상황이 2007년 종합판, 완결판을 다 경험한거예요. 후배 두명과 나와 세르파 넷이 정상에 올라섰는데 어느 순간 무아지경을 경험한 거예요. 내려오는데 후배 한 명이 앞이 안보인다는 거예요. 설맹이죠. 헛소리냐? 얼마나 기막힙니까. 야, 결국엔 이렇게 끝나는구나. 내 모질고 질긴 생명줄이 결국은 여기서 끝이 나는구나. 이제 어떻게 내려가요?" 우여곡절 끝에 끌고 온 설맹의 후배는 결국 눈을 뜨는 기적을 보였다. "그 순간엔 살기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종교는 불교지만 모든 신을 찾게 되는 거예요."

 인간의 능력 외에 마지막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것은 산이 받아줘야 된다는 것을 그는 안다.  "일본의 대지진을 보세요. 계속 개발하면서도 자연재해는 인간이 뭐하나 사전에 알고 대비하지 못하고 속수무책 당하잖아요. 산이 선택해 줘야 한다는 거죠."

 7600m 안나푸르나에서는 세르파를 구하려다 오른쪽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부상 입고 4500m까지 2박3일동안 걷기도 했다. "베이스캠프에서 출발해 정상까지 가는 30㎝ 보폭 한걸음 한걸음이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는 거예요. 어느 순간 판단이 흐려지고 어느 순간 정신을 잃으면 죽는 거지요."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 안나푸르나 네 번 실패하고 다섯 번째 성공할 때. 8000m 14좌 성공해서 정상에 섰을 때다. 또한 최후의 절정은 로체샤르 16좌의 마지막 정상에 섰을때. "꿈인가 현실인가 심장이 터질 것 같죠."

 # 원도봉산이 키운 모험심 강한 소년

 그의 모산은 경기도 의정부시에 속한 원도봉산(서울쪽은 도봉산). 그 산자락에서 유년기에서 청년기까지 보냈다. 부모는 산에서 매점을 했다. 자연스럽게 그를 키운 건 자연인 셈. 2남 2녀 가운데 장남. 워낙 개구쟁이여서 휘청휘청 가지까지 높은 나무도 잘만 탔다. 타잔처럼. 모험심 강하고, 용감하고, 겁 없던 소년에게 산은 그저 놀이터이자 새로운 호기심의 원류였다. "산에서 살다보니 저 산 고개 너머엔 뭐가 있을까. 꼭대기는 어떻게 생겼나? 도시에 사는 아이들과 달리 사계절 분명한 산, 산에 있는 모든 형상 자체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거예요. 어려서부터 그런 것이 몸에 배이고. 자꾸 내 자신을 내던져서 얼마나 멋지게 잘 적응할까. 이것이 산으로 연결되면서 그게 아주 그냥 제 세상을 만난거지요." 등하굣길 오르락 내리락 왕복 두시간. 신체 구조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촘촘하게 단련이 됐다. "평지보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상하의 근육이 더 발달하게 되는 거죠. 나무에 올라가 봄이면 버찌 머루 달래 밤 잣 같은 것 따먹으려고 겁도 없이 매달리고 올라가고."

 어느날, 산소년을 설레게 한 동경의 대상이 나타났다. "산을 조금 다니면서 1977년 고상돈 선배님이 에베레스트 한국인 최초 등정하고 태극기 들고 정상에 턱 선 사진을 봤어요. 빨간색 오버트루즈라고 바람막이 고소모자 쓰고 안경 쓰고 산소통 쓰고 무전기도 이만해요. 야! 얼마나 기분좋을까. 참 좋겠다. 카퍼레이드하고. 나도 한번 올라가봐야겠다. 그랬던 거죠."

 # 히말라야 오지에 2개의 휴먼스쿨 설립

 하여 그랬다. 산에게. "아, 제가 살아서 8000m 16개 봉우리를 성공하게 해준다면 저도 살아남은 자로서 히말라야에 이러이러한 일들을 하겠습니다. 산하고 딜을 한 거죠. 그러니까 반드시 저를 살아 돌아 갈 수 있게 해주셔야 합니다. 간절히, 위험한 순간마다 기도를 했죠. 어느 순간 기적처럼 로체샤르 정상에 서고 죽었다고 생각했는데도 결국은 살아서 내려오고 말이죠."

 그랬다. 그러한 일을 하리라. 오랜 세월 히말라야의 오지만 다닌 그는 그 곳 아이들의 열악한 환경을 안다. 학교를 짓고 싶었다. "교육도 제대로 못받고 자라니까 가난의 대물림이예요. 이것을 깨우치고 이것을 탈피할 수 있는 방안이 교육이라고 봤어요."

 2008년 뜻에 동감하는 사람들과 모여 만든 그의 이름자 딴 재단 엄홍길 휴먼스쿨 제1호는 팡보체라는 4060m 에베레스트 산자락. 히말라야 등반해서 첫 번째로 죽은 세르파의 그 유족들이 사는 고향, 바로 그곳이었다. 짓는데도 우여곡절. "운반수단이란게 헬리콥터로 3800m까지 가서 자재를 날라가면 1박2일, 2박3일 만에 걸어서 날라가는 일을 했죠. 그들은 그를 '엄싸부'라 부른다.

 초등학교때 담벼락에 떨어져 다리 장애를 입은 열아홉살 소녀를 직접 한국까지 데려다 수술시켜주고 그곳 학교의 양호교사가 되게 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히말라야의 사랑을 받은 엄대장! 그는 이제 그 사랑을 인간에게 되돌리고 있다.

 세계 산악사에 불멸의 이름을 새긴 엄홍길 대장. 산에서 죽음을 만났고, 희망을 보았다.  높은 하늘의 기를 받아설까. 맑은 열정이 보인다. 엄대장. 인간이 갈 수 있는 극지를 최대한 정복한 그의 또다른 산은 바로 휴먼이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